[바이블 시선] 2차 자료인 기독교강요에서 원(原)자료인 성경 자체로 귀환

  • 입력 2024.08.16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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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희 목사, “성경을 도구화하지 말고 성경 자체를 연구하는 리쉬마”

하나님이 만드신 에덴동산을 파괴하는 사단의 전략은 선악과의 명령을 변질시키는 것이었다. 본질을 훼손하는 일에 아담과 하와는 미혹되었다. 그 결과 이 세상은 이렇게 악해졌다. 이 사단의 전략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그것이 헬레니즘 인본주의 방식이다. 대표적인 예가 신학이 들어오면서 성경을 시녀로 전락시켰다. 말씀의 순수함이 상실되면서 말씀의 절대적 권위가 사라졌다.

결국 이것은 말씀의 능력을 약화시켰다. 우리가 말씀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말씀이 순수하고 원래의 모습을 지녀야 한다. 말씀 자체가 나의 생명과 일치되어야 한다. 가감 없는 말씀에 우리는 목숨을 건다. 원자료가 훼손되면 능력도 상실한다. 원자료는 원자료가 가장 잘 설명한다. 이것이 성경으로 돌아간다는 의미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

그 말씀을 믿고 그대로 사는 것이다. 행함은 말씀의 순수함이 움직이는 역사다. 행함을 이루려면 가장 먼저 말씀 자체로 귀환해야 한다. 영국의 유명한 목회자요 설교자인 스펄전의 말은 의미가 있다. “야산의 맹수, 사자는 변증이 필요 없다. 사자는 풀어놓으면 된다

사자를 설명하지 말고 우리에서 사자를 풀어 다니게 하라 그러면 사자가 무엇인지 사자가 가장 잘 알려 줄 것이다. 이것은 성경 자체가 가장 강력한 힘이라는 뜻을 비유로 말하고 있다. 우리가 모인 이유는 본질을 드러내는 데 있다. 본래의 모습을 가감 없이 살려내는 방안을 찾는 문제 해결의 핵심이다.

아드 폰테스근원으로 돌아가는 그것이 종교 개혁의 정신이다. 이것은 성경 공부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종교개혁자들이 성경을 강조한 점은 공헌이지만 성경을 2차 자료로 대치한 일은 미완의 개혁으로 지금 우리가 감당해야 할 개혁 과제다

당시는 성경이 번역되지 않았기에, 성경을 가르치기 어려운 구조이었기에 2차 자료인 사도신경, 요리문답, 기독교강요등이 성경을 대신했지만 이미 성경이 번역되어 우리 손에 있는 상황에서 원자료인 성경 자체로 성경 전체로 돌아가야 한다. 그래야 실천의 능력이 생긴다. 성경 자체를 통하여 예수를 직접 만나야 한다. 그럴 때 수가성 여인처럼 행동하며 변화가 일어난다.

2차 자료는 진리가 아니다. 진리에 대한 설명이다. 그것으로는 제자가 힘들다. 진리자체. 말씀 자체 속에서 우리는 인격이신 예수를 직접 만날 수 있다. 그리고 그 예수가 나를 변화시키고 움직인다. “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8:31-32) 진리는 변하지 않는 원자료를 말한다, 진리를 설명하는 2차 자료가 필요하다. 하지만 그것이 주인이 되면 안 된다. 주님을 섬기는 종으로서 자리를 지키지 않으면 말씀의 거침돌이 될 수 있다.

한국 교회가 성경 공부를 나름대로 많이 했지만 문제는 제대로 공부해 보지 못했다. 그동안 성경공부는 성경 자체가 아닌 성경에 관한 것이 대부분이었다. 예를 들면 조직신학적 성경 공부와 교리 중심의 성경 공부가 주를 이루었고 관심 있는 주제와 교회 성장에 관계된 내용을 선택하여 주입식으로 공부했다. 성경 텍스트 자체보다는 성경에 관한 지식 내용을 공부했다. 그렇게 된 가장 큰 이유는 목회자들이 신학교에서 그런 방법으로 배웠기 때문이다. 신학교의 가장 큰 위기는 신학은 공부하지만 정작 신학 교과서인 성경은 공부를 하지 않는다.

 

신학은 공부하지만

성경은 공부하지 않는

신학교의 위기

필자는 신학교에서도 교수한 경험이 있지만 지금까지 가장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다. 원칙에는 모두가 공감하면서 커리큘럼을 정할 때는 전혀 반영이 안 된다. 무엇이 신학교 안에 도사리고 있기에 이런 일이 수십 년 동안 달라지지 않는지 이유를 모르겠다. 마음 아픈 일이다. 신학교에서 성경 공부를 배운 적이 없는 상황에서 교회와 목회에 성경 공부가 중심이 되기 어려운 구조가 형성되었다. 그러다 보니 교회도 성경 공부가 중심이 아닌 설교로 유지하는 허약한 교회가 되었다. 많은 목회자들은 신학에서 배운 성경 개관 정도의 지식으로 성경 공부를 다 배운 것처럼 착각하고 더 이상 성경을 배우지 않는 것에 심각성이 있다. 그러다 보니 성경을 가르치는 일에 목숨을 거는 교회가 드물다. 지금이라도 언약을 지키고 다음 세대에 전수하는 중대한 일에 최후 보루가 되는 교회가 많아지는 것이 한국 교회를 살리는 대안이다,

이제는 오직 성경의 개혁교회 정신이 명료하게 드러나야 한다. 성경 자체를 공부하는 방식으로 성경 공부 패러다임이 바꾸어야 할 때다. 인간이 다시 성경을 구성하는 방식이 아닌 성경 자체를 있는 그대로 배우고 만나는 방식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이것은 성경 공부가 그동안 2차 자료를 공부했던 것을 넘어 본문 자체인 원자료로 돌아가는 성경 공부의 근원 운동이다. 가공되지 않는 유기농인 성경 자체를 공부할 때 인간이 변화된다. 조작과 변조가 불가능한 상황에서 우리는 비로소 말씀 앞에서 무너지게 되며 삶의 갱신이 일어난다.

2차 자료가 아닌

원자료인 성경을 공부

히브리인들은 토라를 공부하는 중요한 정신이 있는데 그것은 리쉬마(Lishmah)이다. 이것은 성경을 도구로 삼으면서 공부하지 말고 말씀 그 자체를 즐긴다는 뜻이다. 성경을 도구화하지 말고 성경 자체를 위하여 공부하라는 리쉬마 정신은 우리에게도 필요하다. 이것은 성경 공부의 기본적인 자세다. 말씀 자체를 좋아하고 사랑하다 보면 나머지는 저절로 온다. 성경을 공부할 때는 자세가 중요하다. 여기서 성경공부의 승부는 결정된다. 성경을 공부할 때는 순수해야 한다. 하나님을 더 이상 도구로 삼으려 하는 것은 아주 위험하다.

존 칼빈은 우상숭배란 영생을 주신 하나님보다 영생을 더 사랑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성경 공부에서 조심해야 할 일은 성경을 도고 삼는 일이다. 이런 공부는 자신이 변화되지 않는다. 말씀 자체를 사랑하는 성경 공부 진정한 공부다. 말씀을 도구화하면 안 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성경 자체다. 그리고 성경을 통해서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성경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다. 예수 그리스도는 사랑이다. 교육은 도구가 되는 순간 삶의 변화가 없다. 아무리 많은 교육을 해도 교육이 도구가 되면 그것이 우상이 된다.

우리의 모든 교회교육의 문제점은 바로 여기에서 일어난다. 성경 공부도 도구화하면 변화가 힘들다. 교회 개혁은 원전으로 돌아가는 즉 성경 자체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존재를 성경으로 둔다는 것이다. 성경 자체를 사랑하는 성경 공부가 필요하다. 성경을 공부할 때 내 입맛에 맞는 성경을 골라서 공부하는 것이 문제다. ()~관한 공부.~에 대한 공부) 그 자체를 온전히 교육하는 방식으로 바뀌어야 리쉬마 정신이 회복되고 인격이 변화된다. 리쉬마는 신학교와 교회와 학교 교육의 출발점이다. 지금부터라도 성경 66권의 각권 내용을 목회자와 성도들이 공부하면서 주님을 직접만나는 경험이 한국교회 속에 일어난다면 복음이 활화산처럼 교회 속에 타오르게 될 것이다. 지금이라도 행하는 성경 공부가 되려면 본질을 붙잡아야 한다. 그 본질은 마씀 자체다, 성경 공부는 결국 이 싸움이다,

지금은 사도신경과 요리문답과 기독교강요를 공부할 때가 아닌 성경 자체를 사모하며 본문 속으로 들어가 본문과 일치되는 삶을 사는 것이 필요한 때다. 그런 2차 자료가 교회의 중심이 되거나 나의 기준점이 되면 더 이상 주님의 제자가 되기 어렵다. 우리는 주님이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치고 지키는 제자를 삼아야지 교리나 성경 요약집이나 그럴싸하게 만들어진 말씀 자료가 중심이 되면 안 된다. 이것이 지금 위기에 처한 한국 교회에게 성경 공부 개혁이 필요한 이유다.

필자는 이일을 위해 30년 넘게 준비한 것이 예즈덤 말씀 콘텐츠다. 300여 권의 교재들을 말씀 자체를 공부하도록 단순하게 말씀을 말씀되게 하는 성경 교재를 준비했다. 가능한 실명은 줄이고 모두 질문으로 구성되었다. 이것은 교재에 초점을 두는 것이 아닌 성경 자체에 마음을 두게 하기 위함이다. 말씀 자체를 사랑하고 체험하는 필자의 경험과 노하우를 담은 미리토크 성경 공부가 있다. “ 미리토크는 순수하게 그리고 바르게 말씀을 배우고 가르치는 모든 것을 담은 것이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말씀 자체의 힘을 경함하고 맛본 사람들은 즐거움으로 살아가고 있다. 이런 힘이 필자에게도 주어지기에 힘든 외길을 40년 넘게 올 수 있었다. 말씀 자체가 주는 놀라운 힘이다. 이것이 모두에게, 가능한 많은 사람들이 경험되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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