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 표절의 비탈길에서 (1)

한명철 목사는 말씀 연구와 기도에 매진해 온 목회자이다. 서울신학대학을 졸업하고 미국 조지팍스신학대학원(George Fox Evangelical Seminary)과 버클리연합신학대학원(GTU-JSTB)에서 성서신학을 전공했으며, 현재 캘리포니아 은혜와평강교회 담임목사로 섬기고 있다.  한명철 목사는 말씀이 어떻게 삶속에서 역사하는지를 끊임없이 연구해왔다. 그래서 그의 책은 오로지 성경에 초점을 두고 있기에, 그의 글은 읽는 이의 삶을 헤집는다.  그는 책은 성경을 깊이 이해하는데 혜안을 던져주고 있다. 대표적인 책은 《강한 용사》 《살아난다 성경암송》 《창조적 사고를 키우는 자기학습법》 (두란노), 《붕괴의 신호음이 들릴 때》 (쿰란출판사), 《고백》《전쟁》《소통》《부흥》《대언》 (본출판사) 등이 있으며, 약 30여권 이상을 출판하였고, 책과 글은 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영감을 주고 있다

학문의 여왕 신학계의 표절 사태

논문 표절 시비가 지성의 전당을 먹구름처럼 뒤덮어 대중들의 지탄을 자아냈던 적이 기억에 새롭다. 표절 시비로 인해 고통당하는 이들을 바라보는 필자의 마음도 그 열기로 인해 화끈거린다. 사실 표절 시비는 어제 오늘의 문제가 아니며 우리나라에만 뚜렷한 현상도 아니다. 크고 작음의 차이는 있지만 어느 시대,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나타난 현상이다. 시간이 지나면 세인의 관심에서 멀어져 잠잠해지겠지만 머지않아 다시 저격수의 단골 표적으로 드러나게 될 것이다. 사실 이 사건보다 더 치명적인 것은 잊을 만하면 등장하는 가짜 박사 사건이 아닌가!

표절(plagiarism)은 주로 학술 논문에서 빈번히 나타나는 행위로서 원래 지적 납치 또는 도적 행위를 뜻하는데 저자의 독창적 생각이나 표현을 자기 것처럼 사용하는 경우를 빗댄 표현이다. 옥스퍼드 참고서(Oxford Reference)에서는 “누군가의 작품이나 아이디어를 자신의 것인 체 하는 것으로 17세기 초엽 ‘납치’를 뜻하는 라틴어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정의한다.

외국에서는 그 측정 기준이 엄격하고 처벌도 매우 분명하다. 표절의 유형은 매우 다양하며 표절 자체에 대한 학문적 연구가 생겨날 정도로 이것은 다루기 매우 까다로운 주제다. 오랜 옛날 한 때는 학문의 여왕으로 일컬어졌던 신학계에서 표절로 인한 공격과 변명, 폭로와 사과 그리고 법적 대응 같은 현상을 듣고 보아야 하는 일반인의 마음은 허전하다.

가요계, 영화계, 학계를 막론하고 표절 시비가 그치지 않는다. 잊을 만하면 다시 대두되어 시중에 회자되곤 한다. 문단의 중진 이문열 씨와 화제 작가 신경숙 씨의 작품이 표절 시비에 휘말려 문학계를 큰 충격에 빠뜨렸던 적이 있다. 요즈음은 웹툰까지 덩달아 표절 시비에 휘말리는 양상이다. 지금도 버젓이 활동하는 각계각층의 지도층 인사들 중에 상당수가 표절 전력을 지니고 있음은 이미 확인된 사실이다. 온 나라가 표절과의 전쟁을 한바탕 치르는 중이다.

지난 3월에는 아카데미 시상식을 앞두고 13개 부문 후보에 오른 기예르모 델 토로(Guillermo del Toro) 감독의 화제작 <Shape of Water>가 1969년 연출된 퓰리처상 수상 작가인 고(故) 폴 진델(Paul Zindel)의 희곡 <Let Me Hear You Whisper>를 표절했다는 이유로 그 아들에 의해 캘리포니아 중앙지법에 소송을 제기 당했다. 아직도 진행 중인 재판 결과가 자못 궁금하다.

 

인터넷의 발달로 더욱 쉬워진 표절

표절은 인간이 문화생활을 영위하면서 발생된 기형아라 볼 수 있다. 일종의 문화적 병증(cultural infirmity syndrome)이라 칭할 만하다. 인터넷에 다양한 정보가 강물처럼 흘러가는 중에 거짓된 정보도 많지만 양질의 정보도 적지 않다. 좋은 성적이 타깃인 학생들은 인터넷에서 이 정보들을 짜깁기 식으로 편집해서 제출하고 심지어 교수들까지 논문 작성이나 작품 전시회에 출처를 밝히지 않거나 학생들의 탁월한 아이디어를 자신의 것인 양 둔갑시킨다.

IT 정보 기술의 발달은 지식 획득에 있어서 새로운 방도를 계속 제시하고 있다. 인터넷에는 특정 분야의 최고 전문가나 탁월한 학자들이 쏟아내는 최신 정보나 배움의 내용들로 넘쳐난다. 힘들이지 않아도 필요한 자료들을 접할 수 있고 원하면 최고의 지적 자산을 손쉽게 확보할 수 있다. 약간만 변형시키면 감쪽같이 개인의 창작으로 둔갑된다. 시간에 쫓기는 사람들에겐 더할 나위없는 도우미(?)다. 표절 방지를 위한 검사법과 진단 프로그램이 운용되고 있긴 하지만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글 쓰는 당사자의 철두철미한 의식 변화에 있다.

 

창의적 표절을 넘어선 모방과 도용

일본인을 가리켜 모방의 천재라 말하지만 그 일본인들이 만든 것을 해체하여 더 나은 제품을 만들어내던 이전의 한국인은 거의 창작에 가까운 모방 능력을 지녔다. 축적된 기술이 전무했을 때 한국 기술의 선구자들은 그렇게 해서 오늘의 기술대국을 이루는데 밑거름이 된 셈이다. 기업 경영에서 다른 기업에 관한 내용 중에서 장점과 강점을 비교 분석 연구하여 배우는 벤치마킹도 엄밀한 의미에서 창의적 표절이라 볼 수 있다.

창의적 표절 현상은 문화 방면에서도 매한가지였다. 때로는 창의적이라는 표현을 붙이기 어려운 복사 수준의 ‘따라 하기’도 있었음도 사실이다. 적어도 8~90년 이전까지 인기리에 방영된 한국의 많은 프로그램들은 외국의 것을 그대로 베끼거나 도용한 것임을 웬만한 사람이면 모두 안다. 지금은 중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들이 한국의 프로그램을 버젓이 도용하는 형편이니 격세지감을 느끼게 한다.

 

지적 절도인 표절의 폐해

거두절미하고 표절은 사라져야 한다. 적어도 교수 사회에서만큼은 표절 행위가 근절될 수 있도록 근본적인 해법이 절실하다. 누구보다 창의적이어야 하고 창의적일 수 있는 그들이 표절의 유혹에 빠지는 원인이 무엇인지 알고 원인 제거에 힘을 쏟아야 한다. 관련자들만이 아니라 학교와 사회의 공조가 절실하다. 표절은 양심에 거리끼는 윤리적 차원만이 아니라 형벌이 가해질 수 있는 법적 차원에서 다루어질 수 있기에 조심해야 한다.

창작이 한 생명의 탄생에 비유될 수 있다면 표절은 건강한 아이가 아니다. 어쩌면 달수를 미처 채우지 못한 조산아일 수 있다. 더 원색적으로 표현하자면 솔로몬의 재판에 나오듯 남의 아이를 바꿔치기한 것에 비유될 수 있다. 표절된 내용의 분량이 많고 적음보다 표절 자체에 사람들이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것은 그것이 지적 생명의 절도 행위라 여기기 까닭이다.

논문이나 저술에서 표절은 극약 처방이다. 전체 내용을 파국으로 내몰지는 않지만 이는 매우 위험한 시도다. 몇 줄의 문장이나 표현을 그대로 혹은 약간 변형시켜 사용한다든지 유사한 표현의 빈번한 사용과 과도한 인용 등은 표절의 위험도를 높인다. 표절은 마치 극약을 삼킨 것과 같아서 자신도 상하고 여러 사람을 힘들게 할 수 있다. 표절의 현실을 개탄하면서도 우리가 감히 그들에게 돌을 던지지 못하는 것은 우리의 내부에도 모양새는 다르지만 뭔가 표절의 인자가 박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욱 착잡한 심정이다.

솔직히 말하라면 학계에 번진 표절의 범람 현상으로 인한 울울한 심사를 지울 길 없다. 그들 중에는 참으로 성실하고 역량 있는 실력자들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표절이라 불리는 몇 단어나 문장 때문에 탁월한 연구의 흔적이 바래지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물론 사회적 이슈가 되도록 단초를 제공한 특정인들을 감싸려는 뜻은 추호도 없다. 다만 마녀 사냥 식으로 몰아가는 다분히 집단적 히스테리 증상만은 경계하자는 조바심에서 이 글을 정리한다.

정말 학계의 고질적인 풍토를 개선하려는 충정과 선한 의지에서 문제를 제기한 것이라면 표절 시비의 회오리에 실린 당사자들이나 경계의 사각지대에서 가슴 졸이는 이들 할 것 없이 그들 스스로 문제의 진원지를 알고 개선할 여지를 남겨두어야 한다. 그들은 충분히 난도질당했고 여전히 고통당한다. 사회가 용서해도 그들 자신의 용서를 얻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다. 학자의 양심이란 그리 쉽게 휘거나 사라지지 않는다.

표절 여부를 쉽게 알 수 있는 프로그램도 함께 발달했다

 

절이 평생의 주홍글씨가 되지 않도록 하는 배려도 필요해

이 시점에서 그들의 가족을 생각하면 짠한 마음이다. 괜히 부끄럽고 죄스런 마음에 오그라든 삶을 이어갈 그들의 나날이 걱정스럽다. 역지사지란 이런 때에 아주 적합한 말이다. 값싼 동정이 아니라 너그러운 마음으로 문제의 핵심을 들여다보며 사태를 무마시켜야 한다. 여론을 등에 업거나 싸잡아 개개인과 그룹을 비난하는 것은 온당치 않다. 적어도 이 나라, 이 사회의 도덕적 긍지심이나 정신적 강도(剛度)는 그만한 아량을 베풀기에 넉넉하다고 믿고 싶다.

표절 시비는 입구가 보여도 출구를 찾기 어렵다. 한 번 빠져들면 빠져나오기 힘든 유사(流砂)와 같다. 부끄러움을 모르면 그것이야말로 변명할 수 없는 부끄러움이 된다. 표절에 관련된 당사자는 논란의 중심에 선 인물이기에 백배사죄하고 재발 방지의 의지를 스스로 다져야 옳다. 석고대죄인들 대수이랴! 표절의 강변에 붙어 있는 낚시 금지 팻말을 잊지 말라! 이제 문제 제기자는 적정선에서 비평의 칼날을 칼집에 꽂아야 한다. 발본색원의 검법은 살상력이 높아 많은 이를 다치게 한다. 극히 신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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