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관점’으로 읽는 성경 이야기 ⑨

 

임승훈 목사 - 월간목회편집부장 역임, 한국성결신문 창간작업 및 편집부장역임, 서울신학대학교총동문회 출판팀장, 위대한맘 인천한부모센터 대표, 설교학 신학박사(Th,D), 더감사교회 담임

-창세기 35장을 중심으로

지금까지 우리는 에덴동산에서의 아담과 하와,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 에녹의 이야기, 소돔과 고모라성에서의 롯 이야기, 에서와 야곱의 팥죽 이야기, 하갈의 하나님을 만난 이야기, 이삭의 번영과 우물 분쟁 이야기, 라반과 야곱의 밧단아람에서의 이야기, 세겜성의 대학살과 야곱의 가나안 정착이야기 등을 다루었다.

이번 이야기는 창세기의 야곱의 기사 중 마지막 부분이요. 대미가 될 듯싶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이야기는 죽음과 관련한 야곱의 슬픔이다. 인간은 출생과 함께 시작하고 죽음으로 마감을 하는 존재이다. 그 과정은 사람마다 다르다. 요즘 탁구를 치다보니 탁구공의 구질(球質)은 사람에 따라 다르고, 그때그때 상대의 컨디션에 따라 다르다. 어느 라켓을 잡았느냐, 어떤 러버를 쓰느냐에 따라 각양각색이다. 마찬가지로 사람마다 같은 70년을 살았다 해도 그 양과 질은 천양지차(天壤之差)가 된다. 야곱은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많은 교훈과 시사점을 던져준다. 그가 겪은 삶은 말 그대로 우여곡절(迂餘曲折)이다. 그의 아들 12명이 이스라엘 12지파를 이루기도 하지만 역사적으로는 훨씬 전기의 일이다.

야곱의 기사는 창세기 27장에서 36장까지로 구분되어지지만 실은 36장이 에서의 후손들에 대한 이야기임을 감안하면 아홉 장에 불과하다. 그러기에 35장은 야곱의 전성기 중에 끝부분에 해당한다. 그런데 이것을 성공이라 해야 할지 실패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인간의 삶을 문학에 비유하면 기승전결(起承轉結) 같은 과정이 있다. 야곱이 꼭 그렇다. 실패 같은 모습들이 여기저기 보이지만 가나안 땅에 들어와 정착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사건들로 전환(轉換), 변환이라 할까, 자동차로 말하자면 엔진의 강력한 힘을 트랜스미션을 통해 바퀴 축에 전달하듯이 야곱은 생애를 변환시키고 있다. 라반의 집에서의 삶이 첫 번째 전환(轉換)이라면, 가나안에 들어와서 당하는 오늘의 이야기들은 두 번째의 전환(轉換) 사건이라고 말하고 싶다.

① 야곱이 벧엘에 올라 제사를 드리고 난 후였는데 그만 어머니(리브가)의 유모 드보라가 죽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장례를 치른다.

② 벧엘에서 에브랏으로 가던 길에 라헬이 베냐민을 해산하다가 그만 산통을 이기지 못하고 죽었다. 야곱, 그가 가장 사랑하던 아내가 길섶에서 죽다니, ‘어찌 내 생애에 이런 일이 얼어날 수 있단 말인가.’ 연이은 초상으로 정신을 잃을 지경이다.

③ 또한 얼마 안 있어 기럇아르바(헤브론)의 마므레에서 아버지 이삭을 만나 모시게 되었는데 얼마 후(180세)에 죽었다. 이들 사건들이 며칠 간격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야곱에게는 기억하기 싫은 겹친 상(弔詞)을 어이하랴. 아무래도 이삭의 나이가 180세인 것을 보면 이 사건 만큼은 훨씬 후대, 그러니까. 야곱이 가나안에 정착하고도 140년이 넘는 시간적 간극이 있음을 본다.

 

첫째 이야기

어머니 리브가의 유모 드보라가 죽었을 때 야곱은 서러워서 통곡하였다. 제단 아래 상수리나무 밑에 장사하고는 얼마나 울었는지... 그 나무 이름을 ‘알론바굿’(통곡의 상수리나무)이라 불렀다. 드보라는 리브가의 유모로 여기에 이름이 처음 나타난다. 리브가를 기른 사람이란 말 아닌가. 드보라는 리브가의 어린 시절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이다. 야곱은 어머니 리브가가 말하지 않은 것까지도 안다. 드보라 큰 이모(?)를 통하여 재미난 이야기들을 많이 들었기 때문이다. 어머니 리브가의 모든 비밀들, 재미있는 일상들, 어린 시절의 소소한 이야기들을 그녀에게서 들었다. 드보라에게서 엄마 이야기를 듣는 날이면 그건 신나는 날이다. 달콤하고 찰진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야곱은 어쩌면 어머니 리브가 보다도 드보라의 손에서 더 많이 길러졌는지도 모른다. 야곱은 어려서부터 드보라의 사랑과 보살핌을 받았다. 왜냐하면 리브가의 특별한 사랑을 받은 것은 에서보다 야곱이 아닌가. 하니 당연히 드보라의 사랑도 많이 받았음직 하다.

야곱은 큰 이모 같은 드보라의 죽음을 맞이하고는 그래서인지 ‘정성껏 장례를 치러주었다’고 생각된다. 그렇기에 눈물을 많이 흘렸다. 이것은 서러움의 눈물이기보다는 감사의 눈물이라고 생각된다. 그래서인가 야곱은 수많은 눈물을 많이도 흘렸다. 나의 손에서 드보라 큰 이모(?)를 거두게 해주시다니, 하나님께 무한한 감사의 기도를 올려드렸다. 만일 야곱이 지금도 외삼촌의 집에서 나올 생각을 하지 못하는 실정이라면 어찌 드보라의 장례 소식을 알 것이며, 드보라의 장례를 친히 집행할 수 있었을까? 때마침 가나안 땅에 들어오고, 벧엘에서 제사를 드린 후 부음(訃音) 소식을 들었다. 이 어찌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다음 이야기

야곱에게 라헬이란 누구인가. 야곱에게 라헬은 밧단아람에서 살아가는 희망이었다. 라헬을 아내로 얻는다는 사실은 야곱에게 즐거움이었고 희망이었다. 첫날밤의 신부가 라헬에서 레아로 바뀌었을 때 야곱은 실망했고, 라반을 얼마나 원망했는가. 그것은 야곱이 라헬을 얼마나 사랑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이야기다. 우여곡절 끝에 라헬을 아내로 맞이한 야곱은 정말로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라반이 7년을 일한 라반을 잡아두기 위해 라헬마저 아내로 주고는 7년을 더 일하도록 약정하였다. 갑자기 야곱의 밧단아람 생활은 14년으로 늘어난다. 7년을 더 일하기로 했지만 처음 7년도, 결혼 후의 7년도 ‘며칠같이(수일같이) 여겼다’고 성경은 표현한다. 사랑하면 시간가는 줄 모른다. 왜냐하면 함께 있다는 것만으로도 기쁘고 행복했기 때문이다. 야곱에게 있어 라헬은 그런 여인이었다. 어쩌면 라헬은 야곱의 전부였는지도 모른다.

헌데, 헌데, 바로 그 라헬이 죽은 것이다. 정착지도 아닌 이동 중에 죽었다는 말이다. 라헬이 귀염둥이 요셉을 낳고는 얼마 안 있어서 또 태기가 있었다. 그런데 베냐민을 임신하고는 무리한 행진을 하였다. 그녀가 나귀를 탔다고 하더라도 밧단아람에서 가나안까지는 산 넘고 물 건너 굽이굽이 험한 길이었다. 무리가 되었는가. 심신이 약해져서인가. 벧엘을 지나 에브랏(베들레헴)을 얼마 두지 않은 노상(路上)에서 그만 해산통(解産痛)이 시작되었다. 산파의 도움을 받기는 했으되 그만 라헬은 베냐민을 낳고는 산고를 이기 못하여 죽고 말았다. 야곱은 그녀를 길가에 장사하고 말았다. 그동안 라헬로 인한 행복이 얼마였는데 그녀가 죽다니 이게 말이 되는가? 그녀의 죽음은 곧 야곱에게 희망의 꺼짐, 생동하는 삶의 기우러짐, 불행이나 마찬가지였다. 아니 레아도 있고, 빌하도 있고, 실바도 있는데, ‘왜 하필 라헬만을 가지고 의미부여한단 말인가.’ 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런데 얼마나 애석했으면 야곱은 그녀를 위해 묘비를 세워주었다. 돌맹이 하나 일으켜 세운 것이 아니다. 네 명의 아내가 있었다가 그중에 하나 잃은 슬픔이 아니다. 어떤 이유로도 라헬의 죽음을 평가절하 할 수가 없었다. 시간이 걸려도, 재정이 들어도, 묘비가 만들어져 오기까지 그는 무덤을 지키고 있었던 게 아닐까?

라헬이 해산의 고통 가운데 죽었을 때 야곱은 절규했다. 하지만 성경은 담담하게 야곱이 ‘라헬의 묘비’를 세웠다(창 35:20)고만 기록한다. 통곡을 할 기운마저 없었을까? 그가 사랑하던 라헬이라면 두 줄, 세 줄, 상술할 만도 한데 라헬이 죽으매 야곱이 ‘라헬의 묘비’를 세웠는데 (창 35:20) 지금까지도 그 이야기가 전해온다는 말로만 약술한다. 야곱의 기력이 쇠해가는 징조인가? 아니다. 원숙함이다. 입이 무거워진 것이다.

야곱은 다짐을 해 본다. ‘내, 다시는 눈물을 흘리지 않으리라.’ ‘이제부터는 오직 감사만 노래하리라.’ ‘라헬과 함께 살아오며 나는 얼마나 감사했는가.’ ‘그 때는 정말 행복했지 않는가?’ 라헬 없는 세상, 덧없을 법도 한데, 아니라고 부정하지 않지만 내심 작정을 한 것인가. 그를 기억하면 된다. 라헬 없는 세상, 무슨 희망을 논하랴. 그러나 절대로 아니다. 오히려 이제부터는 라헬로 인해 행복했던 20여년의 세월, ‘그를 결코, 결코, 결코, 나는 잊지 않으리라.’ 라헬의 묘비를 야곱은 정성껏 만들어서 양지바른 쪽에 세웠다. 날 짐승이 툭!, 친다고 넘어져서는 안 되도록, 튼튼하게, 그리고 야곱은 그 묘비를 수 없이 쓰다듬는다. ‘내 생애는 당신으로 인해 빛났었소.’ ‘내 생애는 당신으로 인해 행복했었소.’ ‘그리고 내 생애는 당신으로 인해 감사하였소.’ 드디어 야곱의 메말랐던 눈에서 말똥 같은 눈물이 줄줄 흘러내린다. 하나님께 올리는 감사의 눈물이다.

 

그 다음 이야기

야곱이 가나안에서 정착하고 서너 세대가 지난 세월 즈음에 이삭을 장례한 이야기다. 기럇아르바(헤브론, 25:27)의 마므레 라는 지역에 올라갔고 거기서 그가 살고 있을 때였다. 그곳은 할아버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이 살았던 곳이다. ‘야곱의 아버지 이삭이 180세가 되어, 기운이 다하매 열조에게로 돌아갔다.’(창 35:29)고 기록한다. 분명코 이 사건은 위에서 드보라가 죽어 장사하고, 아내 라헬이 죽어 장사하던 때 하고는 시기적으로 훨씬 후대의 일이다. 하지만 창세기의 저자는 이삭의 죽음을 알리고, 장사할 때 야곱과 에서가 힘을 합하여 대사를 치루었음을 보여준다.

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이는 아마도 야곱에게 있어 그의 인생 중에 가장 큰 감사의 사건임에 틀림없다. 어려서부터 성격이 다르고, 모양도 달랐던 야곱과 에서는 쌍둥이 아들이었다. 쌍둥이는 서로 떨어져서도 같은 생각을 할 수 있다던데, 아마 이들은 이란성 쌍둥이였는가? 이들의 집안의 이야기는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아도 비극적이다. 어찌 그리 다른지... 리브가와 야곱은 이삭을 속여 장자권과 하나님의 축복을 탈취한다. 이 사건의 근본에는 하나님의 주신 신탁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는 말씀이 있다고 하지만. 하나님의 이 말씀은 이삭의 가정을 지배했고, 영향을 미쳤고, 형제를 분열시키기에 충분했다. 야곱의 이야기는 언약백성 속에서도 하나님은 계속해서 선택하시며 나아간다는 사실을 주지시키는 반면, 언약백성다운 내면성이 없는 에서는 거기서 탈락하고 만다. 선택받은 야곱은 오랜 시간의 훈련을 거쳐 하나님으로부터 이스라엘로 거듭나기에 이른다. 야곱과 에서의 이야기는 성경의 신비한 이야기이다. 그래서 이들이 형제였지만 분규가 커져 급기야는 생명을 훔칠 만큼 큰 사건으로 비화하고 만다. 그런데 이삭의 죽음 앞에서 이들 형제가 서로 상의하여 장례를 치렀다. 서로 의논하기를 재정의 문제, 절차의 문제, 장지의 문제, 모든 문제들을 둘이 의논하여 진행하였다. 얼마나 은혜로운 일인지, 얼마나 감사하고 감사한 일인지, 과거 같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야곱이 가나안에 돌아온 뒤 약 140여년을 이들 형제는 서로 화합하면서 살았음을 일러주는 상징적인 장례이다. 그래서 야곱은 오늘 더욱 감사할 수밖에 없다.

 

한주 전, 서울의 어느 교회에서 선포한 설교내용을 인용해보자.

“어떤 상황에서도 감사는 선택입니다. 감사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감사는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는 것입니다. 감사는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고백입니다. ... 하나님은 우리의 강점을 통해 일하시기보다 우리의 약함을 통해 일하십니다. 감사를 통해 하나님이 주신 은혜는 상황을 뛰어넘는 것, 나를 향한 하나님의 신실함이 있기에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감사는 마중물과 같습니다. 작은 양이지만 큰물을 냅니다. 감사는 하나님을 끝까지 신뢰하는 것입니다.”

“불행할 때 감사하면 불행이 끝나고 형통할 때 감사하면 형통이 연장된다”(스펄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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