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가족을 잃고 비통해 하며 고통스러워하는 이웃들이 건강한 모습으로 일상생활에 복귀할 수 있도록 돕는 데는 어떤 방법들이 있을까요? 여러 가지 방법이 있지만 교회 내에는 앞서 가족의 사별을 경험한 다양한 계층의 다양한 경험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러한 경험자들을 중심으로 교회내의 재활그룹을 구성하여 이와 유사한 가족상실을 당한 교우들을 지지해 주고 도울 수 있는 소그룹을 활성화하는 것이 사랑하는 가족을 상실하고 슬퍼하는 사람들을 위한 효과적인 목회사역이 됩니다. 장례의식이 가족들에게 치유사역이 되려면,
첫째, 사별가족으로 하여금 상실의 감정을 인지하고 표현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합니다.
가족을 상실한 사람의 첫 번째 단계는 충격입니다. 이로 인하여 사고능력이 무력화되면서 호흡에도 이상이 생기며 자기 눈에 보여진 고인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게 됩니다. 동시에 잊어버린 대상을 찾으려고 방황하는 모습을 보게 되면서 도르티 죌레(Dorothy Sölle)가 지적한 대로 무감각하고, 평소에는 볼 수 없고 들을 수 없는 언어들을 쉽게 들을 수 있습니다. 그만큼 충격이 크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가족상실이란 위기에 직면해 있는 사람에게 절실한 도움은 말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옆에 함께 있어만 주어도 커다란 힘이 되어준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둘째, 사별가족으로 하여금 상실 사실을 현실화할 수 있도록 돕는 것입니다.
고인과 정서적으로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던 가족일수록 그 충격이 강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가족을 상실했다는 현실을 거부하거나 인정하려 하지 않고 오히려 잊어버린 대상을 자기 눈으로 확인하면서도 그 대상을 찾으려 합니다. 그러므로 비판 없이 그의 말에 귀를 기울여주면서 상실의 당사자로 하여금 현실을 수용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가족 상실로 인하여 슬픔과 우울한 깊은 늪에 빠진 사람을 건져내기 위해서는 비논리적이고 비이성적인 그의 감정과 생각일지라도 그대로 이해하고 수용하면서 사별의 고통을 인정하도록 지지해주면 자신의 마음을 헤아려 주는 사람이 있음을 인지하면서 상실 그 자체를 현실화시키는데 속도가 빨라지게 됩니다.
셋째, 사별가족으로 하여금 고인 없이 살아갈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가족과의 사별은 무엇으로도 표현하기 어려운 고통이지만 특별히 고인이 가정의 경제권을 가진 경우라면 그 고통이나 후유증은 심각한 지경에 이르게 됩니다. 자녀들이 아직 어린데 사랑하는 아내 혹은 남편과 사별을 하는 경우 어떻게 하고 어린 자녀들의 양육은 어떻게 해야 할까? 이러한 경우일수록 교회 내에 가족상실의 비통함을 극복한 경험자 그룹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교회는 이들에게 지속적인 관심과 도움을 주므로 재활의 기회를 제공할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들을 통하여 유사한 고통 속에서 아픔과 슬픔을 당한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는 그룹으로 활용한다면 몇 배의 효과를 거둘 수 있을 것입니다.
넷째, 사별가족으로 하여금 고인의 유품을 정리하도록 돕는 것입니다.
사별의 고통과 충격을 극복할 수 있는 또 한 가지 방법은 현재의 환경을 바꾸도록 하는 것입니다. 장례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고인과 관련된 가구마다 또는 고인의 손길이 미친 것마다 그리고 고인이 밟고 다닌 골목마다 고인을 생각나게 하는 환경으로 뒤바뀌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장례를 치르는 과정보다 더 큰 슬픔과 고통 속에 방치되기 쉽습니다. 그러므로 가능하면 되도록 빠른 시간 안에 고인의 유품을 정리하면서 현재의 주거지 환경에서부터 탈피하도록 다른 환경에로의 이사를 권해볼 만합니다. 이러한 방법을 ‘환경치유’라 합니다.
다섯째, 사별가족으로 하여금 슬퍼할 수 있는 시간을 배려해 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가족을 먼저 떠나보내야 하는 가족들은 마음껏 슬퍼해야 합니다. 사별의 슬픔을 잘 통과해야 이후에 찾아오는 무서운 후유증을 피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으로 인한 절망은 슬피 우는 것으로 표현됩니다. 이러한 표현은 극히 정상적이고 건강한 반응입니다. 슬픔을 다루는 방법 가운데 가장 위험한 방법은 슬픔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의식 가운데 슬픔에 대한 생각이나 감정이 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것은 그 생각들을 의식의 저 깊은 속 잠재의식 속으로 도망치게 하는 결과를 낳게 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나 슬픔을 당한 이웃에게 “슬퍼하지 마시오, 크리스천은 기뻐해야 합니다”라고 강요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오히려 우리 자신이 슬퍼하고 있음을 그대로 인정하고 주님께서 그 슬픔을 치료해 달라는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여섯째, 계속적인 도움을 제공하는 것입니다.
장례식을 마칠 때까지는 많은 사람들의 도움이 있기 때문에 슬퍼할 시간이나 자신의 감정을 정리할 만한 여유가 없었습니다. 하관 예식이 마쳐 질 때까지 교회의 도움은 사별자 가족들에게 큰 힘이 됩니다. 그러나 모두가 돌아가고 나면 남은 가족들에게 찾아오는 허전함과 허탈감 그리고 도저히 믿어지지 않은 현실로 인한 무기력으로 인하여 또 한 번 고통을 당하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에 너무 오래 젖은 채 도움을 줄 만한 대상이 없을 때는 안절부절못하고 방황하는 경우를 흔히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장례 예식을 넘어 사별자들이 건강한 삶으로 돌아올 때까지 지속적인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일곱째, 사별가족으로 하여금 고인과 마지막 작별 인사를 나누게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가족을 먼저 보내고 남은 자들은 나와 같이 고인에 대한 여러 가지 감정들로 인하여 크고 작은 상처들을 안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이런 슬픔을 이해하면서 도움을 주는 이웃은 아직도 많지 않은 우리의 현실입니다. 우리의 문화는 정(情)의 문화인지라 단칼에 베어버리듯이 그 동안 깃들었던 정을 한 순간에 정리하기는 무리수이지만 고인과의 사별이란 현실을 인지하고 그 깊은 늪에서부터 헤어 나오지 못하면 더 큰 불행의 덫에 걸릴 수도 있기에 고인과의 작별의 시간은 반드시 필요하다고 강조하고 싶습니다. 물론 이러한 과정은 위에서 소개한 여러 가지 절차들과 병행해야 더 효과적이 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