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와 예수의 예배 (2)

  • 입력 2020.07.30 08:00
  • 수정 2020.11.06 1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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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인 연속칼럼】 미래교회의 예배 (2)

 

최종인 목사, 평화교회담임, 성결대, 중앙대석사, 서울신대박사, 미국 United Thological Seminary 선교학 박사, 공군군목, 성결대학교, 서울신학대학교 외래교수
최종인 목사, 평화교회담임, 성결대, 중앙대석사, 서울신대박사, 미국 United Thological Seminary 선교학 박사, 공군군목, 성결대학교, 서울신학대학교 외래교수

예수께서 회당예배 참석의 의미

초기 기독교 예배에 많은 영향을 준 것은 회당예배였다. 예수께서는 자주 회당에 들어가셨고 회당예배에 참석하셨으며, 회당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시고 병을 고쳐주셨다. 예수께서는 고향인 나사렛이나 사역의 중심지로 선택한 크파르 나훔(가버나움)을 비롯하여 갈릴리에 있는 여러 회당에서 복음을 가르치셨다고 복음서들은 증언하고 있다. 눅 4:16은 안식일에 회당예배에 참여하시는 것이 예수께서 늘 해 오시던 일임을 알려준다. 또한 바울 역시 유대인의 회당을 중심으로 전도활동을 한 것은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그는 데살로니가에서도 유대인의 회당을 발견했고 회당 예배에 참석했다(행 17:2). 여기서 누가는 안식일에 회당예배에 참석하는 것은 바울이 늘 해오던 ’자기의 관례’라고 소개했다. 예수와 바울이 회당예배에 적극적으로 참석하였다는 것이 기독교 예배가 회당예배를 직접 물려받은 것이라는 증명이 될 수는 없다. 그러나 예수님, 교회의 기초를 놓은 사도들, 그리고 초대 기독교인들이 회당예배에 익숙해 있었다는 증거는 될 수 있을 것이다. 또 기독교 예배가 회당예배의 형태를 거의 그대로 수용했을 것이라는 추측을 가질 수는 있을 것이다. 따라서 회당예배를 비교적 자세하게 고찰하는 것이 신약 성경의 예배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 회당은 다른 나라에 거주하던 유대인에 의해서 세워졌으나 세월이 지나면서 회당은 유대 본토로 확산되었다. 예수 당시 팔레스틴에만 적어도 약 480개의 회당이 있었다는 기록도 있는데, 웬만한 유대인 거주지에는 어김없이 회당이 세워져 있었다는 것은 신약성경으로도 충분히 증명할 수 있다. 회당예배의 시작은 확정 짓기 어려우나, 바벨론 포로 시대에 발전했을 가능성이 크다. 에스라 시대 이후에는 회당예배를 통해 “율법과 경건 생활을 준수하는 것을 그들의 생활 전체에서 가장 필수적인 일로 여겼다”.

복음서에는 예수가 회당예배에 참여했다는 보도가 여러 차례 나온다(막 1:21; 1:39; 6:2; 눅 13:10; 요 6:59; 18:20). 예수가 설교하고 가르치는 장소로 회당을 택했다는 사실은 역사적으로 의심할 이유가 없다. 그런데 누가 복음 4장 16절에 따르면 누가는 예수가 “관례대로”, 즉 규칙적으로 회당을 방문한 것으로 묘사한다. 이는 예수의 회당 사역을 체계화시키려는 누가의 편집 의도와 관련이 있다. 복음서 보도를 통해 드러나는 것은, 예수가 회당을 방문할 경우 방문의 일차적 목적은 회당예배에 참여함으로써 자신의 경건의 의무를 행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메시지를 선포하고 또한 활동하기 위해서 회당에 갔다는 사실이다. 예수는 자신의 가르침과 사역을, 예배를 위해 마련된 특별한 장소에 국한시키지 않았다. 그러나 복음을 전하기 위해 회당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신 것을 배울 수 있다. 죄인들과의 교제 구제와 기도와 금식은 유대교가 특별하게 중요하게 여기는 경건의 실천 덕목이다. 예컨대, 토빗 12:8은 “진실한 기도와 의로운 자선은 부정한 재물보다 낫다. 금을 쌓아 두는 것보다 자선을 베푸는 것이 낫다”고 말한다(cf. 행 10:31). 유대 신앙에 따르면 이와 같은 선행들을 행하는 자에게는 특별한 약속이 주어졌다. 구제와 기도 그리고 금식에 관한 예수 전승을 담고 있는 마태복음 6장 1-6절, 16-18절에는 복음서 저자의 편집 부분(특히 도입부)이 포함되었으나, 이 단락의 배후에는 의심의 여지없이 역사적 예수의 음성이 담겨 있다.

예수는 1세기 유대인으로 사셨다. 그분은 아주 구체적인 정치사회적 환경으로 인해 형성된 특정 종교문화를 경험하셨다. 성경은 예수께서 당시 유대 공동체의 문화와 로마제국의 그늘 아래서 살아가는 유대인들의 예식, 수행과 토라로 표를 삼은 사람들을 보고 배우셨다. 그분의 삶과 그분의 영성은 1세기 유대교를 반영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께서는 유대인들이 경건을 대표하는 3가지 덕목을 사람들에게 과시할 목적으로 회당과 거리에서 공개적으로 하는 것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그러한 선행을 은밀하게 가식 없이 할 것을 요청한다. 다시 말해, 사회적 통제에서 완전히 벗어나 자유로운 상태에서 그러한 선행을 실천할 것을 요청한다. 이러한 예수의 요청은 분명 당시 경건 실천의 관행에 역행하는 것이었다. 또한 누가 자료에서 유래한 누가복음 18장 9-14절에 나오는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는 역사적 예수에게서 비롯된 것이 틀림없다. 기도와 금식을 거론하는 이 비유에서 예수는 경건의 선행을 자랑하는 바리새인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을 죄인으로 고백하는 세리를 칭찬한다. 이로써 경건의 실천을 자랑하며 떠벌리는 당시 종교적 관행에 일침을 가하는 것이다.

종교적 형식을 거부하고 새로운 예배 공동체를 세우심

우리나라에서 기독교의 역사가 점점 길어지면서 오늘날 많은 교회들은 예배와 예전의 중요성을 보다 강하게 느끼고 있고, 그것에 비례하여 예배의 의식화 경향이 자라고 있다. 이런 현상이 자연스럽게 구약시대의 성전 및 예배 전통에 대한 관심을 초래한 것 같다. 바로 이 점에 우려가 생긴다. 그것은 구약의 성전 관련 제의적 전통이 점차 강하게 자리 잡아 가고 있는 것과 반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사건에 토대한 기독교 본래의 예배 정신이 점점 약화되고 있다는 우려이다. 그러한 우려는 놀라운 외적 성장을 자랑하는 한국 교회가 오늘날 심각한 교회 정체성의 위기를 맞고 있는데서 현실로 드러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유대교 예배에 대해 가졌던 예수의 입장을 살펴보는 일이 의미가 있다. 초기 그리스도교 케리그마의 근거와 토대가 되는 “예수”야말로 오늘의 기독교가 지향해야 할 길을 알려주는 나침반이다. 이는 예배와 관련해서도 타당하다. 즉, 예수가 당시 유대교 예배에 대해 가졌던 입장과 태도를 통해 오늘의 기독교 예배가 지향해야 할 길을 배울 수 있다. 유대교 예배에 대한 예수의 태도와 입장은 크게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하나는 예수는 일상의 모든 영역을 율법 전통에 따라 엄격하고도 세밀하게 규정짓는 삶의 제례화에 저항했다는 사실이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영광이 현존하고 있다고 굳게 믿어 왔던 예루살렘 성전에서 드리는 거룩한 예배의 시대가 끝났음을 선언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곧 구약과 유대교에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중재하는 거룩한 제의 직분의 시대가 끝났다는 것을 뜻한다. 그 결과 초기교회가 일시 성전예배에 참여했으나 마침내 그것과 과감하게 단절할 수 있었다. 이와 같은 사실은 알게 모르게 목회직의 거룩성을 지향하는 경향을 가진 오늘 한국 교회에게 많은 것을 시사한다. 다른 한편 예수가 경건과 제의의 형식 전체를 거부했다고 말할 수 없다. 예수는 자신의 삶과 말씀을 통해 자기가 지향했던 새로운 형태의 예배를 위한 중요 한 단초를 제자들에게 남겨주었다. 그것은 바로 ‘주기도’와 ‘최후 만찬’이다. 주기도를 통해 예수는 가식 없이 하나님과 친밀하게 대화하는 기도 본연의 중요성을 우리에게 일깨워주었다. 또한 최후 만찬은 성전예배에 대한 대안으로서 새로운 예배를 창시하는 예수의 예언자적 상징 행위였다. 그것은 임박한 죽음에 앞서 제자들에게 남겨준 그의 유언으로서 죽음과 무의미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구원의 완성을 소망하며 끝까지 사랑하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그것은 곧 오늘의 교회가 종교형식과 경건의 모양만을 따르는 화석화된 조직이 아니라 생명을 자라나게 하는 사랑의 공동체가 되라는 유언이다.

코로나19와 예수의 가르침

지금까지 예수의 예배에 대해 몇 가지로 살펴보았다면, 이제는 현대 사회의 큰 이슈로 떠오른 코로나 전염병과 공존하는 이 시대와 미래에는 어떻게 예배해야 할 것인지 살펴보려 한다. 예수는 분명히 성전예배를 개혁하셨다. 우리도 오늘날 모이는 장소로서의 성전 개념을 탈피하여 개혁이 필요하다. 종전과 같이 모이기 힘들어지고, 회집이 어려운 때에 ‘성전 안으로’의 개념에서 ‘성전 밖으로’의 패러다임 전환이 필요한 시점이다.

거리의 예배와 같은 찾아가는 예배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복음서를 보면, 예수께서는 한 장소에 정주하지 않으셨고 계속하여 사람들이 모이는 곳에 찾아가셔서 복음을 나누었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를 거리에서 만나신 것을 보라. 사람들이 걷고, 일하고, 쉬고, 모이는 곳이 예배의 자리여야 한다. 장소의 변화를 주자는 것이 아니라 찾아가자는 것이다.

예수께서 죄인들과 어울리실 때에는 항상 웃음과 감사가 넘치는 잔치 자리였다. 미래의 예배는 쓸쓸하고, 엄숙하기만 하고, 조용한 예배가 아니라 기쁨과 환희가 넘치는 축제의 예배가 될 전망이다. 초대교회는 예수의 예배를 잘 전승받아 모일 때마다 애찬을 나눴고, 그 애찬을 통해 주님의 임재를 경험했다. 우리는 모이기만 하고 웃음이 없는 예배, 성찬은 나누지만 주님을 체험하지 못한 예배에서 탈피해서 감사로 넘치는 예배로 전환해야 한다. 그러나 그들은 모여 자기들만의 잔치에 심취하지 않았고, 주님의 관례에 따라 전 세계를 향하여 복음을 들고 나갔다. 특히 고난 받고, 낮고 천한 자들을 찾아 만났고 초청했다. 바로 그런 사랑의 섬김이 지중해를 건너 로마제국을 뒤집어 놓은 것이다.

초대교회는 유대교 회당의 전례에 따라 그들의 자녀는 물론, 예수를 새로 믿기로 작정한 이들을 대상으로 특별한 관심을 갖고 교육했다. 새신자가 세례를 받으려 할 경우에는 단계적으로 교육을 거친 후 예식을 가졌다. 코로나는 알곡과 쭉정이를 나누고, 반석위에 집을 세우는 자와 모래위에 세우는 이를 구분했다. 이제부터라도 교회는 교육에 힘써 알곡 신자를 세워야 한다. 그래서 코로나보다 더 극성스런 바이러스가 교회를 흔들어도 끄떡없도록 만들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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