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기도란 "내면의 공간을 넓히는 것"
종교와 정치가 서로 맞물려서 이념이란 극한 대립으로 엉켜있는 형국이다. 종교든 정치든 서로 자기가 보고 싶은 면만 보고 듣고, 다른쪽의 주장이나 생각들은 듣지도 않고 무조건 반대한다.
서로를 이해하는 내면의 공간이 너무 좁아졌다. 이 땅에 모든 국민들이 극좌. 극우만 있는 것이 아니다. 보수주의와 진보주의로만 구성된 것이 아니다. 많은 국민들이 중도 좌우에 위치하고 있다. 극단적인 분들은 한국교회나 정치를 양분하려고 한다. 내편 네편이란 식의 이념적 잣대로 평가한다. 아주 위험한 발상이다.
극단으로 치닫고 있는 우리 사회를 치료하는 길은 무엇일까? 교회에서 사용하는 언어중에 묵상이나 침묵기도가 하나의 처방전이 될 듯 싶다. 묵상이나 침묵 기도는 같은 용어로서 다르게 표현한 것뿐이다. 침묵기도의 장점은 “내면의 공간을 넓히는 훈련”이다. 널브러고 흐트러진 공간을 잘 정리 정돈하는 것을 청소라고 말한다. 마찬가지로 묵상이나 침묵 기도는 집을 청소하는 것과 같은 개념이다. 내안에 엉클어진 생각을 정리 정돈하여 내면의 공간을 넓히는 것이다. 여기서부터 다시 시작하면 좋을듯 싶다.
침묵기도란 “모든 생각을 하나님께로 사로 잡아오는 방법”
침묵기도와 묵상은 단순하게 내 공간을 정리 정돈하는 것을 뛰어넘어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법으로 청소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임재를 갈망하는 성도들이 추구하는 신앙의 전통이 바로 묵상과 침묵기도였다. 묵상과 침묵기도의 목적은 ‘모든 생각을 하나님께로 사로 잡아오는 방법’이다. 그러면 바울 사도의 말과 같이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새로운 존재로 결단하며 살게된다.
침묵기도란 “내적 굶주림을 채워주는 것”
하나님을 깊이 묵상하면 하나님의 부르심을 알게 된다. 하나님께 집중하다보면 그분의 사랑이 내 맘을 채우며, 모든 필요를 내안에 가득 채워주신다. 현대인들은 외적인 것은 화려함으로 치장하고 있는데 내적 굶주림에 목말라한다. 내적 굶주림을 해결하는 방법은 외부에서는 절대적으로 채워지지 않는다. 값비싼 명품옷이나 구두나 가방이나 집의 크기나 물질이나 성공이나 관계나 지식이나 높은 자리나 명예로는 내적 굶주림을 어느 정도는 유지할 수 있지만 근본적으로 채우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하나님을 깊이 묵상하는 침묵 기도가 답이다.
[23회] "피투성이가 되더라도 믿음으로 살라"ㅣ 최원영목사의 마음세우기 5분백신ㅣ
침묵기도란 “하나님안에서 휴식을 취하는것”
토마스 머틴(Thomas Merton)은 “묵상은 하나님을 발견하기 위한 통로라기보다는 하나님안에서 휴식을 취하기 위한 방법”이라고 했다. 하나님안에서 휴식을 취할 때 내안에 진정한 안식이 이루어진다.
일터에서 휴식없이 몸이 탈진하도록 일하면 어느날 자신도 모르게 몸도 마음도 붕괴현상이 일어난다. 추락하는 마음과 몸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길은 잠시 멈추는 것이다. 단순한 멈춤이 몸과 마음에 새 힘을 얻게한다.
리차드 포스터는 “책에서는 묵상하는 법을 배울 수 없다. 묵상하는 법을 배울 수 있는 것은 오직 묵상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했다. 다윗은 묵상을 읊조린다는 언어로 표현했다. 하나님의 말씀이 너무 좋아 하루 종일 읊조렸다.
침묵기도란 “하나님의 메시지와 주파수에 나를 맞추는 것”
21세기는 참으로 복잡한 경쟁 구도에 내몰려 있다. 심신이 지쳐 허우적거리고 있다. 모든 것이 성공지향적이고 더 많이 움켜잡아야 성공한 것으로 인정받는다. 오직 성공에 목말라한다. 젊은이들은 영혼까지 끌어 모아 집을 사고 주식에 몰빵한다. 이런 방식의 삶이 동시대에서 살아남는 길이라면 우리 사회는 많이 병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사회 환경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은혜안에서 충만하게 사는 것이 가능할까? 바로 그 해답이 묵상이다. 침묵기도이다. 묵상이란 단어를 정의 내린다면 “하나님의 메시지와 주파수에 나를 맞추는 것이다.”
침묵기도나 묵상은 우리의 창의력을 발전시키며, 묵상의 과정은 그리스도의 임재와 우리의 상상력과 직관력을 풀어 놓도록 해준다.
지니 마일리는 “그리스도는 내게 있어 모든 영감의 진원지”라고 했다. 그리스도는 영감의 원천이라고 했다. 주님께 모든 주파수를 맞추다보면 내안에 창조적 에너지가 흐른다.
로드니 깁슨은 상심과 절망 가운데 빠져 시간을 낭비하며 있는 분들에게 성경적 조언을 하였다. “복음서를 공부하며 당신을 그리스도의 삶속에 푹 담궈 보세요. 그것만이 당신에게 힘을 주는 원천입니다”라고 했다.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에 나를 푹 담궈보라. 내안에 놀라운 영적 에너지가 나온다
우리의 묵상기도에 하나님의 다스리심과 통치하심에 내 자신을 푹 남궈지면 하나님이 가장 적합한 지혜로운 방식을 주신다. 이것이 묵상이 주는 힘이다. 나의 시각과 삶의 방식을 궤도 수정해라, 주님의 말씀과 주파수에 맞추라. 이것이 침묵기도이다.
침묵기도란 "나 홀로 주님께 내 시간을 드리는 것"
이삭은 온유함의 대명사이며, 그리스도의 예표이다. 이삭의 삶을 살펴보면 어떤 위대한 업적을 이룬 것은 성경에 나와 있지 않다. 그런데 최고의 아름다운 명칭을 받았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그 근원을 우리는 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삭이 저물 때에 들에 나가 묵상하다가 눈을 들어 보매 낙타들이 오는 지라”(창24:63).
저녁 노을이 지는 시간에 들에서 묵상하는 이삭의 모습이 얼마나 존귀하고 아름다운 모습인가? 하나님을 깊이 묵상하는 가운데 아내 리브가를 맞이한다. 이 표현 하나로 그의 온전함을 우리는 느낄 수 있다.
침묵기도란 “한 획의 차이를 발견하는 것”
묵상하다보면 점 하나의 차이를 발견하게 된다. 그 차이로 삶을 부정에서 긍정으로, 절망에서 희망으로 전환하게 된다.
“고질병”에서 한 획을 넣으면 “고칠병”이 된다. “Impossible”(불가능)에서 한 획을 넣으면 “I’m possible”(나는 가능하다)가 된다. “빚”에서 한 획을 넣으면 “빛”이 된다. 절망에서 희망을 꿈꾼다. “Dream is nowhere”(꿈은 어느곳에도 없다)에서 단어를 띄어놓으면 “Dream is now here”(꿈은 바로 여기에 있다)가 된다.
우리는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 국민으로서 살아간다. 서로 총질하는 모습은 미래가 없다. 극단적인 좌우의 대립을 벗어나서 잠시 내면의 아름다운 음악 소리를 듣는 시간이 필요하다. 종교계도 내부 총질이 심하다. 예수님은 없고 이념만 존재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너무도 값싼 종교로 전락하고 있다. 코로나 바이러스를 해석하는 관점의 차이가 너무도 크다. 그러나 서로 좀 이해를 하면 좋겠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영원히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언젠가는 사라진다. 코로나는 극복의 문제이지 정쟁과 이념의 대상은 아니다. 기독교 정신은 생명존중사상과 이웃사랑이다. 기독교의 숭고한 가치를 잃어버려서는 맛을 잃어버린 소금이 되어 사람들에게 버려짐을 당할 것이다.
침묵기도란 “세미한 소리를 듣는 것”
3000년전 엘리야 선지자는 시내산에서 간절한 마음으로 주님을 사모했다. 그때 “세미한 소리”를 들었다. 혼잡한 세상에서 우리가 듣고자 하는 것이 바로 이 소리이다. 세미한 소리를 듣고자 한다면 꾸준히 주님을 내 안에 채우는데 갈망해야 한다. 침묵기도나 묵상이 깊어지면 “세미한 소리”로 다가오시는 주님의 세계가 열린다.
정쟁이나 이념 논쟁의 중심에 있는 분들의 헌신적인 수고를 폄하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의 자기 내려놓음과 수고로 인해 우리 사회는 균형을 잡아 가기 때문이다. 건강한 방식의 의견 개진은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나 지금은 비정상적인 방식이 난무하고 있다. 집권여당도 야당도, 기독교 우파와 좌파도 너무 감정으로 과열되어 있다.
한국교회는 한 발 뒤로 물러나 주님께 초점을 맞추는 기초 훈련부터 다시 시작하는 것이 좋겠다. 1군 선수들이 부상을 당하거나 성적이 좋지 못하거나 몸과 마음의 균형이 무너졌을 때 감독은 2군으로 보내 기초훈련을 다시 시킨다. 지금은 한국교회가 기초훈련을 다시 시작해야할 때라고 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