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은 특정한 지역이나 민족이 아닌, 우주적 대격변을 제시하면서 복음의 대상 범위를 무한대로 확장한다. 복음이 지구촌 구석구석 전파돼야 하는 당위성을 제공한다. 땅의 약속에 대한 최초의 언급은 창세기 1-2장에서 나타난다. 황량한 광야에서 하나님이 임재 하는 유일한 장소는 성막이었다.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유일한 처소는 성전이었다. 제사장이 하나님의 독특한 임재를 경험하는 장소였다. 최초의 성소는 에덴이었다. 하나님이 거니시는 성소였다. 아담이 하나님과 거닐면서 대화를 하던 곳이었다. ‘거니셨다’에 해당하는 ‘הלך’(할라크)는 히트파엘 동사이다. 하나님의 성막 임재를 묘사하는 데 사용되었다(겔 28:14). 레위기 26:12에는 하나님이 성막에 행하시므로(할라크) “너희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될 것”이라 말씀하신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려고 진중에 행하신다(할라크, 신 23:14). 사무엘하 7:6에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부터 오늘까지 집에 살지 아니하고 장막과 성막 안에서 다녔다(할라크)”고 말씀하신다.
고대 세계에서 신전들은 신전 안에 신의 형상을 두고 있었다. 고대의 왕들은 직접 통치하기에 너무 먼 땅에 자신의 형상을 세우곤 했다. 아담은 땅이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고 있음을 보여주려는 목적에서 왕이신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다. 이는 하나님의 임재를 뜻했다(창 1:26-28).
만국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구약성경은 성도들이 메시야의 나라를 다스리는 데 참여할 것이라고 약속했다(단 7:18, 22). 예수님은 온유한 자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을 말씀하셨다(마 5:5). 제자들은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할 것을 가르쳤다. 바울은 신자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왕 노를 할 것을 주장했다(딤후 2:12). 요한계시록에서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최후의 승리와 통치에 참여한다는 것을 빈번하게 언급한다. 그리스도는 이기는 자 그리고 내 일을 지키는 자에게 메시야 나라에 참여하도록 허락하겠다고 말씀하신다. 그리스도는 이 메시야 나라를 다스릴 권세를 이미 받으셨다(단 7:14). 따라서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받으신 권세를 받고, 만국을 다스릴 것이다.
그리스도는 시편 2:8-9을 인용한다. 다스리는 권세를 이미 받았다고 밝히신다. 예수님은 자신의 통치를 그의 백성들과 함께 공유한다. 이는 하나님이 땅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담에게 위임하셨기 때문이다.
1.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
직업을 영어로 ‘calling’이라고도 한다. 하나님의 부르심이라는 뜻의 소명(召命)이다. 천직(天職)과 같은 말이다. 자기 직업을 천직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다. 모든 직업이 천직이다. 원래는 왕의 자리를 뜻했다. 왕이 하늘의 일을 대신하기에 천공(天工)이라고 한다. 임금 혼자 다할 수는 없다. 보좌하는 여러 관직을 두게 되었다. 천직은 벼슬이란 뜻으로 그 의미가 넓어졌다. 직업을 줄여서 ‘직(職)’ 또는 ‘업(業)’이라고도 한다. ‘직’과 ‘업’은 엄연히 다르다. 전자는 직위 내지 자리이고 후자는 스스로에게 부여된 과업이다. ‘일자리’와 ‘일거리’가 한데 어우러진 개념이다. 일반인의 관심은 오로지 전자에만 맞춰져 있다.
하나님의 형상의 담지자인 아담은 소명이 주어진 자요 그의 일이 천직이었다. 아담에 에덴동산에서 초기 단계에서 제사장-왕으로 섬겼다. 땅 전체를 복종시켜야 할 자다(창 1:28). 땅 위에서 하나님의 부왕이었다. 왕권을 반영해야 했다. 그의 천직은 에덴의 경계를 확대시키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온 땅에 두루 반영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아담과 그의 후손들의 사명이며 의무다. 땅에 충만해야 한다. 땅을 다스려야 한다. 처음 아담과 연합적 아담이었던 이스라엘은 동일한 하나님의 사명을 수행하는 데 모두 실패했다. 그래서 시편 2:9에서 하나님은 마지막 아담인 메시야에게 권세를 주신다. 시편 2편에서 시인은 하나님의 아들에게 이방 나라를 유업으로 또는 소유로 주실 것을 노래했다. 아들이 만국을 다스릴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보호를 받을 것이다. 왕의 통치에 참여하게 된다.
첫 번째 약속은 시편 2편의 성취다. 메시야를 노래한 시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셨는가를 노래한다. 이 시편은 그리스도에 관한 사상에 있어서 중요한 부분을 나타내 주고 있다. 이 시는 하나님의 기름 부음 받은 자의 땅의 왕들에 대한 승리를 축하한다. 그들이 망하게 될 것이라는 경고로 끝을 맺는다. 시편 2:7은 초기 그리스도교에서 메시아 시편으로 해석되었다. 요한계시록 12:10에서는 메시야가 권세를 소유한 것으로 말한다. 메시야가 오셔서 온 세상의 왕노릇하실 때는 그의 백성들도 함께 참여하게 될 것이다.
이기는 자에게 주어지는 보상은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다. 이는 연약한 교회로부터 강력한 신앙이 예견됨을 뜻한다. 이기는 ‘그’는 모든 사람, 남성이나 여성이나 관계없음을 나타낸다. 이 말은 보상의 비유적 성격을 강조한다. 문자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승리한 그리스도인들 무리 전체가 집단으로 만국을 다스린다는 의미이다. 전제되는 왕권과 어울리지 않다. 끝까지 인내하면, 그리스도께서 그들로 하여금 시편 2편에 예언된 메시야의 나라에 참여하게 하실 것이다. 그는 다스리는 권세를 이미 받았다고 밝히신다. 그리스도는 두아디라 교회에 편지를 시작하시면서 자신을 시편 2편의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로 소개하셨다. 이 칭호는 그가 시편의 예언을 성취하기 시작하셨음을 천명한다. 시편 2편의 약속으로 두아디라 교회에게 보내는 편지를 마무리하는 것은 적합하다. 메시야의 권세는 그를 따르는 자, 즉 이기는 자에게 또는 그리스도의 일을 지키는 자에게로 확대된다. 다윗의 왕좌를 계승하는 자를 가리키는 ‘나는 그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나의 아들이 되리라’(삼하 7:14)는 약속이 모든 구원받은 자에게로 확대된다.
2. 그리스도와 함께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리라
신자들은 그리스도가 권세를 가지신 것과 마찬가지로 권세를 가지게 된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예수님의 호칭은 각각 구약의 아담과 이스라엘을 가리킨다. 아담과 이스라엘은 동전의 양면이다. 이스라엘과 이스라엘의 족장들은 아담이 받은 것과 똑같은 사명을 받았다(창 1:26-28). 땅을 다스리고 성전을 확장시킬 제사장 왕으로서의 아담의 사명이 족장들에게 이관된다(출 19:6). 첫 동산에서 첫 조상은 실패했다. 연합적 아담인 이스라엘 역시 하나님의 사명을 이행하는 데 실패했다. 하나님이 아들이신 예수님이 강림하신 것은 그들의 사명을 완수하기 위함이다. 빼앗긴 권세를 되찾아 주시기 위함이다.
그리스도는 시편 2:8의 이방 나라를 유업으로 주는 것과 그 소유가 땅 끝까지 이르는 것을 이기는 자에게 주어주는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라는 관념으로 바꾸신다. 핵심 진술이다. 이 권세는 만국에 대한 지배권인가. 아니면 만국을 멸망시킬 능력을 함축하고 있는가. 끝까지 이기는 자에게 두 가지 약속이 주어진다. 약속의 넓이와 함축된 의미가 놀랍다. 시편 2:8-9을 바꿔 설명하는 형태를 취하고 있다. 다스리는 권세를 이미 받았다고 밝히신다.
그리스도는 타협을 이기는 사람들이 그와 함께 그의 나라에서 다스릴 것이라고 약속한다. 이 약속은 그리스도와 동일시되고 연합한 자에게 주어진다. 만국을 다스릴 그리스도와 함께 행사할 권세다.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노릇할 것이다. 심지어 천사조차 판단할 것이다(고전 6:3).
예수님이 시편의 성취로서 다스리기를 시작하려고 받으신 권세는 왕이 그의 백성을 보호하고 원수들을 멸할 때 행사하는 권세로 이해해야 한다. 이 권세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성취되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신자들을 구원으로 인도하는 동시에 뱀의 후손을 심판한다는 이중적 의미가 있다.
높아지신 그리스도는 시편 기자의 ‘유업’을 이기는 자에게 주어지는 ‘만국’을 다스리는 새로운 권세 관념으로 바꾸신다. 만국에 대한 지배권 혹 만국을 멸망시킬 능력을 함축하고 있다.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최후 승리와 통치에 동참하게 된다. 승리하신 그리스도는 권력을 독점하거나 부패하는 일도 없다. 이기는 자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신다. 바울의 표현처럼 그리스도와 함께 왕노릇한다(딤후 2:12). 세상, 아니 심지어는 천사까지도 판단하게 될 것이다.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는 시편 2:7의 ‘다른 말로 바꾸어서 알기 쉽게 풀이한 것’, 즉 패러프레이즈(paraphrase)이다. 시편 2편에서 철장과 관련된 권세를 가지신 분은 메시야다. 시편 2:7은 초기 그리스도교에서 메시아 시편으로 해석되었다.
예수님은 로마 제국의 권력의 악순환을 멈추는 힘은 더 강력한 권력이 아니었다.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는 권세임을 선포하셨다. 예수님은 스스로 권력을 버리는 권세를 사용하심으로 우리가 하나님 자녀의 권세를 얻도록 하신다. 하나님과 단절된 인간의 내면에서 꿈틀거리기 시작한 욕망을 Friedrich W. Nietzsche는 ‘권력 의지’라고 불렀다. 타인을 지배하고 수단화히는 욕망, 인간을 자기 성취의 도구로 삼는 탐욕이다.
하나님의 통치 혹은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는 권세다. 그 통치를 거부하는 자는 멸망할 것이다. 받아들이는 자는 살 것이다. 메시야의 권세는 그를 따르는 자에게로 확대된다. 다윗의 계승자를 가리키는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니”는 약속이 모든 구원받는 자에게로 확대된다. 헌법 제1조 2항에서는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라고 하여, 국가의 주인이 국민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하늘에서 모든 권세는 그리스도로 말미암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