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이 교회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으라 이기는 그에게 감추었던 만나를 주리라

  • 입력 2021.08.31 12:32
  • 수정 2021.08.31 1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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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희 목사의 CDN 성경연구】 (126) 만나(Manna)

 

NC. Cumberland University(Ph.D.), LA. Fuller Theological Seminary(D.Min.Cand.) , 총신대학교 일반대학원(Th.M.), 고려신학대학원(M.Div.), 고신대학교 신학과(B.A.), 고신대학교 외래교수(2004-2011년), 현)한국실천신학원 교수(4년제 대학기관), 현)총회신학교 서울캠퍼스 교수, 현)서울성서대학 교수 현)대광교회 담임목사(서울서부노회, 금천구)
NC. Cumberland University(Ph.D.), LA. Fuller Theological Seminary(D.Min.Cand.) , 총신대학교 일반대학원(Th.M.), 고려신학대학원(M.Div.), 고신대학교 신학과(B.A.), 고신대학교 외래교수(2004-2011년), 현)한국실천신학원 교수(4년제 대학기관), 현)총회신학교 서울캠퍼스 교수, 현)서울성서대학 교수 현)대광교회 담임목사(서울서부노회, 금천구)

만나는 이슬같이 하늘에서 떨어졌다. 서리처럼 과립 형태로 되어 갓씨 모양을 닮았다. 맛은 꿀 섞은 맛이다. 매일 거두어야 한다. 만나는 갈은 후에 구워 먹을 수 있었다. 만나는 모세 시대에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가나안으로 여행하는 중에 광야에서 먹은 주된 음식이다(16:35). 초자연적으로 제공된 음식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신 광야에 도착했을 때 먹을 것이 없다고 불평하였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하늘에서 내려온 떡을 주었다. 그들의 불평에도 불구하고 가나안에 들어가서 그 땅의 음식을 먹을 때까지 그치지 않았다. 이 명칭에 대한 히브리어 어원은 백성들의 놀라움을 표현한 데 있다. 만나는 광야에서 유일한 음식원이 아니었다. 그들이 이집트에서 나올 때 가축 떼를 이끌고 나왔다. 오아시스에서 다른 음식을 발견했을 것이다(15:27). 적으로부터 전리품을 얻었다.

요한은 만나를 우상에게 바쳐진 것또는 우상 제물과 대조하려고 언급하였을 것이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의 제물에 참여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공급해 주신 하늘의 떡을 의존해야 한다. 교회도 이와 같다. 세상에 타협하지 않는다면 현세에서 하늘의 만나에 참여하기 시작할 것이다.

만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떡’, 혹은 힘센 자, 즉 천사들의 떡’, 간혹 생명의 떡으로 칭해진다. 요한에게서 만나는 아마도 특히 새 출애굽과 그리고 수고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유지하려는 것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상징할 것이다. 버가모 교인들이 하늘의 만나를 얻으려면 우상에게 주어진 고기를 피해야 한다.

에베소의 그리스도인들처럼 버가모의 그리스도인들은 죄를 이겨야한다. 그리스도는 상속을 약속한다. ‘들으라는 순종하라는 말이다. 실천에 대한 촉구다. 예언적 경고다. 말씀하시는 분은 성령이다. 청자는 교회다. 말씀을 무시하면 위험에 빠진다. 경청하면 회개하고 거짓 교사들과 그들을 따르는 자들을 저지해야 한다. 이스라엘은 우상의 식탁에 참여하기보다는 하나님이 주시는 하늘의 양식을 의존해야 한다. 교회가 동일하게 타협하지 않으면 하늘의 만나를 먹을 것이다. 버가모 교회는 발람의 교훈과 니골라당의 교훈을 따라 큰 타협의 잘못을 저질렀다. 발람은 발락 왕의 편에 서서 이방 여인들과 혼인하게 하고, 이스라엘이 우숭을 숭배하는 죄에 이르도록 영향을 끼쳤다. 이방 여인과의 혼인 문제는 늘 우상 숭배를 하게 되는 버가모에게 매우 심각했다. 대개 시장에 나와 있는 육류는 이미 우상에게 바쳐졌던 것이었다.

약속된 만나는 우상에게 바쳐진 음식과 대조를 보인다. 만나는 유대 문헌에서 종말론적 대망을 묘사하는 용어다. 그 약속은 종종 우상에게 경배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주시는 약속으로 표현되었다.

 

1. 감추인 만나는 그리스도 자신이다

버가모에서 당시 성행했던 황제숭배 의식은 교회에 가장 크고도 직접적인 위협이 되었을 것이다. 또한 만연했던 혼합주의 문화를 수용하라고 부추기는 거짓 교사들의 공격이 있었다. 오늘의 그리스도인들도 포스트모던니즘 시대에 살고 있다. 세속화된 사회에 살고 있다. 종교다원주의의 위협을 받고 있다. 무엇을 먹느냐, 잘 먹고 잘 사느냐, 나는 어떤 사람인가를 질문해야 한다. 나는 이기는 자인가를 되물어야 한다. 황제 숭배를 거부하고 거짓 교사들의 가르침을 거부하는 자가 이기는 자다. 우상제물을 거부하고 이기는 자에게 메시야 잔치에 초대받게 된다. 감추인 만나를 먹게 된다.

만나를 주신 목적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일생동안, 그리고 궁핍할 때 하나님과 그의 말씀에 의존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함이다. 능력 있는 하나님의 말씀에 의거할 때 살아남을 수 있다. 예수님은 마귀에게 시험을 받았을 때 신명기 8:3을 인용하신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늘의 양식을 먹어야 한다.

감추인 만나는 이 세상에서 필요한 음식이 아니다. 하늘 음식이다.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서 먹도록 되어 있는 음식이다. 그리스도와 교제를 상징한다. ‘우상제물을 먹지 말라는 말씀대로 순종한 자에게 주어진다. 타협하지 않는 자에게 주는 식사다. 이기는 자에게 주어지는 양식이다. ‘우상제물을 먹지 말라에서 강조는 무엇인가. ‘우상제물인가. ‘먹지 말라인가.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하지 않으면 선악과를 먹게 된다. 마귀의 꾐에 빠져 자신의 판단에 이끌리는 것이다. 인간이 누구인지를 잊게 된다. 자기 정체성을 상실하게 된다. 죄는 금단의 열매를 따서 먹는 불순종이다. 그 행동에 앞서서 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잊어버리는 게으름도 있다.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해야 하며 순종해야 하는 피조물이라는 것을 거부하는 것도 죄다. 하나님이 되려고 시도하는 것만이 죄가 아니다.

만나를 감추었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세상 끝날 때 그리고 어쩌면 죽을 때 하나님의 백성에게 계시되리라는 사실을 의미한다. 이기는 자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에게 소망을 두어야 한다. 우상에게 받쳐진 제물은 다 소비되고 사라질 것이다. 영원한 잔치에 배제될 것이다. ‘감추인 만나는 하늘로부터 내려온 떡이다. 신자들을 양육하고 건강하게 하는 보이지 않는 근본이신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예수님은 자신이 하늘에서 온 참 떡으로 바라보라고 말씀하신다.

2. 이기는 자에게 하나님이 감추인 만나를 주신다

이기는 자에게 세 가지 선물이 약속된다. 감추었던 만나와 흰 돌, 그리고 새 이름이다. 감추인 만나를 먹을 수 있는 자는 이기는 자다.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을 먹지 않고 거룩을 지킨 자이다. 비유적 묘사다. 마지막 때에 그리스도와 교제를 나눈다. 그리스도와 하나가 된다.

버가모 당국자들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동일하게 황제에게 영예를 돌리는 행위를 요구했다. 축제에 참석해서 황제숭배를 하는 것은 시민의 충성과 애국심과 연계시켰다. 참석하지 않는 자는 무신론자거나 파괴분자로 낙인을 찍었다. 살아 있는 황제를 숭배하지 않는 것은 정치적 충성을 보여주지 않는 것으로 여겼다. 신들에 대한 편협성을 보여준다는 이유로 미움의 표적이 되었다. 단순히 축제에 참여할 뿐만 아니라 식사도 식전에 포함되어 있었다. 축제에 참석하느냐, 참석해야 한다면 어느 선까지 인가. 식사 자리에 앉아 우상제물을 먹을 것인가. 이것은 무엇을 먹느냐 안 먹느냐가 아니다. 누구를 섬기느냐의 문제다. 먹는다고 죽는 것이 아니다. 안 먹는다고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다. 정체성의 문제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만 섬기는 자다. 황제를 신으로 떠받들 수 없다. 음식의 맛이나 종류의 문제가 아니다. 이긴 자는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참석한다. 감추인 만나를 먹는다. 이교 축제에 참여하기를 거절한 사람들이 받을 상이다.

다니엘과 세 친구처럼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인 산해진미로 자신을 더럽히지 않은 자들이다. 이긴 자들이다. 감추인 만나를 먹는 자들이다. 왕의 명령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더 의존한다. 다니엘과 세 친구는 먹음직스럽고 푸짐하고 기름진 우상제물이 있는 식탁이 아닌 영혼의 양식인 하나님의 말씀에 시선을 향한다. 다니엘과 세 친구는 결백증이 아닌 거룩한 자들이다. 그리스도로 흰 옷을 입은 자들은 시선이 다르다. 시선(視線)은 눈이 가는 길이다. 관심 있는 것에 계속 눈길이 간다. 눈길이 머무는 곳에 마음이 더해져 생각이 만들어진다. 보는 것이 생각을 자극한다. 감정을 움직이게 만든다. 시선엔 신비한 힘이 있어 삶의 방향도 바꾼다. 사탄이 하는 일은 하나님이 원하는 것을 우리가 보지 못하게 만든다. 하나님이 원하지 않는 것을 보게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다니엘과 세 친구는 마음과 생각을 하나님의 말씀에 뿌리를 내린다. 뜻을 정한다. 이렇게 해야 흔들리지 않는다. 열흘을 이겨낼 수 있다. 의지의 싸움이 아니다. 하나님의 의지하고 말씀에 이끌리는 것이다. 이기는 자는 나사로가 아브라함의 품에 안겨 하늘 잔치에 참여하는 것처럼 하늘 양식을 먹을 것이다.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즐기는 오는 시대의 생명으로 보상 받을 것이다.

유대 전승에 따르면, 언약궤는 B.C. 586년에 분실되었다. 그 안에 있던 만나는 그 전에 사라졌다. 솔로몬 성전이 파괴될 때 언약궤 안에 있던 만나 항아리를 예레미야가 느보산 지하에 감추었다고 한다. 메시야 재림 시에 그것이 다시 나타날 것이라는 것이 유대적 견해다. 감추인 만나를 준다는 것은 마지막 때에 메시야가 배설하는 잔치와 관련되어 있다. 하늘의 영원한 지복을 가리킨다. 생명의 떡 되시는 그리스도다.

예레미야는 최초의 법궤가 결코 회복되지 않을 것임을 분명히 선포하였다(3:16). 감추었던 만나를 준다는 것은 메시야가 베설하는 잔치와 관련되고, 하늘의 영원한 지복(beatitude)을 가리킨다. 초기 유대교의 종말론적 기대들 중의 하나다. 장차 구원의 때는 하나님이 다시 기적적으로 만나를 공급하실 것이다. 시간의 종말에 도달할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 때에 만나를 먹을 것을 기대했다.

요한계시록에서, 만나를 먹는 소망은 새 예루살렘에서 부활을 통해 생명으로 나아옴을 통해 실현될 것이다. 마지막 때다.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서다.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는 것을 의미하는 비유적 묘사다. 이교 축제에 참여하기를 거절한 사람이 받게 될 상이다. 황제 숭배는 참석이 아니라 참가다. 축제 참가를 거부하고 믿음으로 이긴 자들에게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참여할 수 있는 복을 받게 된다. 생명나무의 실과를 먹는 것처럼 만나를 먹는 것은 죽음을 이긴다. 새 창조 시에 부활을 통해 생명으로 가는 낙원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렇게 하는 것이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참여하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우상의 식탁에 참여하기보다는 삶을 유지하기 광야의 식탁에 참여해야 한다. 하나님이 주시는 만나를 먹어야 했다. 하늘의 양식에 의존해야 한다. 교회가 동일하게 타협하지 않으면 감추인 만나, 하늘의 만나를 먹을 것이다. 이스라엘이 육적인 양식 만나를 받았듯이 이기는 자는 영적인 양식을 받는다. 감추인 만나는 하나님이 주시는 영적 양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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