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명철 목사】 들으면서 듣지 않는다

  • 입력 2021.10.28 1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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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사역자에게 고하는 말씀 (74)

한명철 목사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은혜와 평강교회를 담임하며 30권의 저술과 글쓰기를 통해 복음 사역에 애쓰는 목회자다.
한명철 목사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은혜와 평강교회를 담임하며 30권의 저술과 글쓰기를 통해 복음 사역에 애쓰는 목회자다.

 

들으면서 듣지 않는다

분봉 왕 헤롯은 세례요한의 불같은 말씀을 번민하면서도 달게 들었으나 결국 회개보다 선지자를 죽이는 쪽을 택했다. 유대인들은 스데반의 황금 같은 설교에 귀를 막았다. 더 이상 듣기 싫어하는 그들의 오만한 집착이 스데반을 죽였다. 오늘날 돌에 맞아 죽는 설교자가 없음은 다행이지만 혹 듣기 싫은 소리를 외치지 않았기 때문은 아닌지 사뭇 두렵다. 청중의 눈높이를 맞춘다는 미명하에 말씀의 원단을 제멋대로 재단한 것은 아닌지 걱정스럽다. 하나님 말씀의 맛깔스러움을 잃어버린 것은 아닌지 심히 저어된다.

 

여호와께서 각 선지자와 각 선견자를 통하여 이스라엘과 유다에게 지정하여 이르시기를 너희는 돌이켜 너희 악한 길에서 떠나 나의 명령과 율례를 지키되 내가 너희 조상들에게 명령하고 또 내 종 선지자들을 통하여 너희에게 전한 모든 율법대로 행하라 하셨으나 그들이 듣지 아니하고 그들의 목을 곧게 하기를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믿지 아니하던 그들 조상들의 목 같이 하여(왕하 17:13-14)

 

돌에 맞아 피투성이가 될지라도 그 입에 거룩한 분노의 말씀을 담은 대언자가 당신 주변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 당신 곁에 그런 대언자가 있다면 정말 축하받을 일이다. 말씀을 경홀히 여김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패역한 세대의 전형적인 특징이다. 말씀 자체이셨던 주님의 말씀조차도 홀대 당하지 않았던가! 사람들은 말씀 사역자의 전하는 말을 습관처럼 거부한다. 이는 정작 그에게 말씀을 주사 자신들에게 보내신 하나님을 거역함이다. 말씀의 사람을 거부하면 말씀을 거부함이요 이는 곧 말씀이신 하나님 자신을 거부함이다.

 

이스라엘 족속은 이마가 굳고 마음이 굳어 네 말을 듣고자 아니하리니 이는 내 말을 듣고자 아니함이니라(3:7)

 

이 말씀은 말씀을 거부당하는 사역자들에게 적잖은 위로가 된다. 사람들이 선지자의 말을 거부할 때 그것은 하나님을 거부하는 행위다. 선지자를 박해하는 것은 하나님을 박해하는 것이다. 자신의 말이 거부되거나 박해당한다면 억울할 수도 있다. 하나님의 말씀도 거부당하고 하나님도 박해 당하신다면 그에 비해 대언자가 당하는 고통은 지극히 작은 것이다. 그것이 싫다고 말씀의 내용을 부드럽게 꾸밀 수는 없다. 고통당할지라도 받은 대로 받은 만큼 전한다. 대언자가 진정 하나님의 말씀 전달자라면 틀림없는 사실이다.

길은 두 갈래뿐이다. 하나님의 귀를 즐겁게 하든지 사람의 귀를 즐겁게 하든지 둘 중의 하나이다. 갈림길을 동시에 갈 수는 없다. 인간 편을 선택하면 하나님 편이 멀어진다. 반대로 하나님 편을 가까이하면 인간 편이 멀어짐은 너무도 명약관화한 일이다. 바울은 이 점에 있어 분명한 태도를 취했다. 이 구절을 인용하는 것 자체를 싫어하고 못 견뎌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는 이 시대가 하나님의 말씀 듣기를 싫어한다는 확고한 반증이다.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1:10)

 

롯의 아내는 남편이 전하는 메시지를 마지못해 따랐으나 마지막 고개를 넘지 못해 멸망의 상징으로 후세에 남겨졌다. 소돔의 영화를 잊지 못해 고개 돌리는 순간 그녀는 소금 기둥으로 화해버리고 말았다. 들으면서 듣지 않으면 구원의 문턱에서 좌절되고 만다. 당신이 말씀을 듣고 따르면 지옥 불을 넘어서지만 듣고 거역하면 소금 기둥을 남긴다. 입으로는 순종을 외쳐도 삶이 말씀을 거스른다면 이는 명백한 불순종이다. 역사적으로 이스라엘 백성은 이 면에 있어 전형적인 불순종자의 모습을 확실히 보여주었다. 성경을 읽을 때마다 느끼는 그들의 뻔뻔스러움에 화가 치밀 정도다. 순종과 불순종의 시소를 타면서 하나님의 사랑과 인내를 얼마나 우롱했던가? 그런데 당신 역시 산 교훈을 받으면서도 그들의 악습을 반복하고 있지 않는가? 자신의 모습을 거울에 한번 비춰보라! 거울이 비쳐주는 모습 뒤에 감춰진 자신의 실상을 자세히 들여다보라! 순종하는 자녀의 부드러움인가? 아니면 불순종의 근육질로 단단해진 모습인가?

 

말씀사역자

하나님의 귀를 즐겁게 하든지

사람의 귀를 즐겁게 하든지

 

순히 듣는다

암흑의 시대에도 빛은 사라지지 않는다. 모두가 귀를 틀어막아도 귀 기울여 듣는 사람이 있다. 뒷걸음질 치는 비겁자들의 무리 가운데서도 목숨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사가 있다. 사방을 빙 둘러가며 진 칠지라도 들을 자는 듣는다. 진리의 말씀을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의의 백성들이 세상 곳곳에 퍼져있기 때문이다.

 

들을 자는 들을 것이요(3:27)

 

언제나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은 7천인은 숨어있다. 그들이 곧 남은 자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외치기만 하면 암혈과 토굴에 은신하고 있던 굶주린 영혼들이 말씀의 빛을 향해 모여든다. 세례요한이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 되어 울려 퍼질 때 그가 찾아가기 전에 많은 이들이 그에게로 몰려들었다. 자신들의 내면에서 서식한 죄의 독버섯으로 인해 더 이상 견디지 못했기에, 수백 년의 영적 암흑기에서 고통받아온 시대상황이 그들의 절박한 영혼을 찌르고 두들기는 말씀 곁으로 몰아갔다. ‘밤말은 쥐가 듣고 낮말은 새가 듣듯시대를 위한 진리의 말씀을 들을 줄 아는 시대의 아들딸들이 있다. 사람이 듣지 않으면 만물이 듣는다. 그날이 오면 작은 곤충 한 마리가 자신의 귓전을 때린 말씀 한 마디를 들려줄 것이다. 이름 모를 꽃잎 하나가 꽃술을 진동시켰던 말씀 한 마디를 들려줄 것이다. 모래알 속에 묻히고 허공을 배회하던 말씀의 파편들이 말씀의 종들 어깨를 토닥이며 모여들 것이다. 아무렇게나 자란 잡초더미가 전도자의 발에 밟히면서 들었던 말씀 한 마디를 건네줄 것이다.

흘러가는 시간에 하나님의 말씀이 묻어 있다. 그날이 오면 외로운 골짜기에서 불을 토했던 전도자의 증거가 시간에 묻은 흔적으로 주님 앞에 보일 것이다. 아무도 듣는 이 없었으나 말씀이신 하나님께서 선포된 그 말씀들을 자신 안으로 기쁘게 받아들이실 것이다. 산 자가 듣지 않으면 죽은 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 말씀은 생명이요 살리는 능력이기에 죽음조차 거부할 수 없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 무덤 속에 있던 자들 중에서 나사로가 이 생명의 말씀을 듣고 살아 일어났다. 나인 성 과부의 외아들이 관 속에서 이 생명의 말씀을 듣고 몸을 일으켰다. 회당장 야이로의 외동딸이 이 생명의 말씀을 듣고 자리를 털고 일어나 앉았다. 마지막 날에 자던 성도들이 이 생명의 말씀을 듣고 영광스러운 몸으로 다시 일으킴 받을 것이다. 학창 시절 무덤으로 즐비했던 공동묘지를 찾아 그들에게 복음의 메시지를 뜨겁게 외쳤던 일이 아직도 기억에 새로워 그날이 오면 누군가 복음을 들었었노라고 혹 얘기할는지도 모른다.

말씀 안에 있는 생명은 고여 있는 물이 아니라 흘러넘치는 강물처럼 생기로 충만하다. 폭발적인 힘으로 만물을 소성시키고 죽음을 죽인다. 주님의 입에서 선포된 말씀의 소리는 사람들이 귀를 틀어막아도 우주 끝까지 퍼져가며 생명 운동을 지속한다. 당신이 말씀을 거역하거나 외면하는 무리에 속하지 않고 말씀을 듣는 부류에 속함은 놀라운 특권이다. 말씀을 들음이 은혜요 축복이다. 듣는 자는 누구든지 살아 일어난다. 듣고 순종하는 자는 대언자의 기쁨이다. 롯이 소돔의 멸망을 전했을 때 식구들은 따랐지만 사위들은 농담으로 여겼다.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들은 적극적으로 반박하지는 않았으나 하늘의 메시지를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못함으로 경청에 실패했다. 그 결과는 돌이킬 수 없는 비극이었다. 바울은 그가 전한 복음을 받아들이고 믿음으로 주님의 길을 걷는 자들을 아끼고 사랑했다. 바울은 동역자들과 함께 이 기쁨을 고백했다.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가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살전 2:19)

 

불신과 배역의 시대에도 순종의 자녀들은 복음을 소중하게 간직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곧이곧대로 전하는 대언의 사람들을 존귀하게 여긴다. 복음의 내용보다 복음의 원천이 누구인가? 에 관심을 두고 복음의 전달자보다 복음 자체에 가치를 두는 사람들이 있다. 순히 듣는 경청자는 우선적으로 말씀에 자신을 비춘다. 말씀의 저울에 자신의 행위를 달아보고 말씀의 자에 경건의 척도를 재어본다. 말씀이 때리면 순히 맞는다. 말씀이 책망하면 달게 듣는다. 쓴 말씀을 삼켜야 영혼에 양약이 되고 속에서 달다. 맞아야 아픔을 느껴 더 맞기 전에 돌이킨다. 말씀이 무서워서 복종함이 아니다. 말씀의 영적 권위를 인정하면 그 소리에 부복함은 당연하다. 말씀의 권위는 그것이 하나님께로부터 나왔다는 사실과 더불어 말씀이 곧 하나님이시라는 인식 때문이다. 왕을 섬기는 자는 왕명을 두려워한다. 도를 배반하면 엄한 징계를 받는다.

당신이 의의 말씀을 경험한 말씀의 종으로 남아 있다면, 도도히 흐르는 시대적 조류에 휩쓸리거나 폭풍 같은 대세의 몰아침에 함몰되지 않고 제 자리를 지켜 원초적 복음 메시지의 고고한 울림을 붙들고 있는 한, 진리에 굶주린 영혼들은 언젠가 몰려든다. 누가는 주님을 따르던 무리들 중에서 고침 받은 이들에 대해 중요한 설명을 가했다. “무리가 알고 따라왔거늘 예수께서 그들을 영접하사 하나님 나라의 일을 이야기하시며 병 고칠 자들은 고치시더라.”(9:11) 그렇다! 모두 고침 받는 것이 아니라 고칠 자들만 고침 받는다. 구원받을 자들만 구원 받는다. 이것이 택정의 원리이다. 청함을 받은 자는 많아도 택함을 받은 이는 적다. 진리의 말씀을 들어 구원에 이를 자들은 아무리 패역한 시대라 할지라도, 바른 말씀이 꽁꽁 숨어버려 또 다른 봄을 맞이할 수 없을 극한지의 정황이라 할지라도 생명의 말씀 있는 곳을 찾아 기필코 생명의 싹을 틔운다.

들을 자들만 듣고

병 고칠 자들만 고침받고

구원받을 자들만 구원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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