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위기 여파로 나락에 떨어지고 그늘진 삶의 아픔과 그 현장들-
요즈음, 일상의 분위기를 보면, 뭔가 모르게 안개가 뿌옇게 낀 상황 같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웃기보다 우울하고, 박진감 넘치기보다 움츠리고 있는 모습 같다. 장기간 팬더믹 이후, 침체되고 있는 경제 위기의 여파로 각자의 가정과 삶을 그늘지게 만든 탓 같다.
얼마 전, 전 국민과 언론의 관심을 모았던 10세 소녀 유나 양 가족의 실종 사건이 결국 비참하고 비극적인 죽음으로 끝난 전남 완도군 송곡선착장 모습이 그 대표적인 모습 중 하나일 것이다. 더욱이, 부모와 함께 한 달간 제주도로 현장학습을 떠난다고 들떠있었을 유나양의 마음을 생각하면 더욱 더 침통하고 가슴이 찡해진다.
불경기의 큰 파로의 여파로 밀려나는 조각배처럼, 생존 위기에 거센 물결에 발버둥 치다 점점 힘을 잃어가는 군중들의 모습을 볼 때, 안타까움을 더하며, 진실한 마음과 겸허한 마음으로 은혜의 보좌 앞에 엎드리게 된다.
이른 새벽 지난 원고를 정리하면서, 유다서 말씀으로 오늘의 실상에 대한 진단과 영적 치유책을 조명해 보았다.
유다서는 지금부터 2,000년인 1세기의 시대적, 영적 정황을 배경으로 삼고 있다. 영지주의 이으로 극심한 신앙의 위기 속에 있는 상황이었다. 사실, 물질적 위기보다, 영적 위기, 신앙적 위기가 더 절박하고 더 고통을 당할 때가 많다.
유다서의 핵심 말씀인 20절과 21절을 보면 그릇된 교리의 가르침을 받아 신앙적으로 탈선하며, 도덕적으로 방종 생활을 하는 당시의 삶에 대한 경고와 경종을 울리고 위기 상황을 극복할 신령한 영적 지침과 메시지를 전해 주고 있다. 그리고 그 지침과 원리, 메시지는 오늘날 우리가 처한 위기 상황을 극복해 줄 복음이 된다는 사실을 확신하게 된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는 너희의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자기를 건축하며 성령으로 기도하며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기를 지키며 영생에 이르도록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리라”
위 말씀은 코로나 시대, 불경기 시대뿐만 아니라 종말로 치닫고 있는 지금, 깊이 묵상하고 적용해야 할 말씀이기도 하다. 평신도뿐 아니라 목회자인 나 자신부터 먼저 깨우침을 받고 무장하고 선포해야 말씀이다.
-주님의 음성, “사랑하는 자들”에 큰 위로와 소망을 얻습니다.-
먼저, “사랑하는 자들이”란 말씀에 큰 위로를 얻게 된다. 1장밖에 안되는 본 성경에 3번씩이나 언급하면서(3절, 17절, 20절), 독자인 우리들의 귀를 기울이게 하고 살며시 마음을 활짝 열게 한다.
글을 쓰는 지금, 지난주에 첫돌을 지난 손자가 일어나자마자 엉금엉금 기어서 나에게 매에 달린다. 그 이유가 뭘까? 며칠 전에는 낮 가림을 하고 울던 아이가 그동안 한 집에 지내면서 같이 노래하고 웃고 놀았고 특히, 내가 많이 안아주었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어 따뜻한 사랑을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이처럼, 유다서는 각박한 영적 환란과 위기 상황 속에서 “사랑하는 자들” 이 한마디 표현보다 더 마음을 동하게 하는 단어와 행동이 있겠는가? 이 표현은 사랑의 사도인 요한뿐만 아니라 신약 서신서 저자들이 즐겨 사용하는 표현이다. 무엇보다도 사랑하시는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즐겨 사용하셨던 말씀이기도 하다.
특히, 그리스도인들은 사랑의 마음으로 사랑의 언어로 잘 말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유다서 말씀이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것은 “사랑하는 자”라는 사랑의 언어로 우리에게 메시지를 잘 전달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금 말세의 특징 중 하나가 사랑을 주기도, 사랑을 받기도 삭막한 시대에 살고 있다. 코로나 상황 이후, 사회적 거리 두기로 성도들을 물론, 직장이나 각종 사회적 관계와 교제가 힘든 시대에, 사랑의 소통과 표현이 막혀 버린 상황이다. 이때, 주님께서 고독과 외로움에 빠진 성도들에게 세미한 음성으로 “사랑하는 자들이” 그 목소리는 시원한 생수와 포근한 품과 같다.
코로나 상황 속에서 쇼설 미디어를 통하여 서로에게 안부를 전하고 각종 정보를 나누면서 서로를 생각하며, 가슴에 담고 있다는 표현이 중요하다.
어제 문득 생각나는 분이 계셨다. 작년에 아내를 사별한 얼마간 떨어져 사시는 은퇴 장로님이시다. 코로나 상황 속에 건강하게 잘 지내시는가? 안무를 전했을 때, 매우 반갑게 전화를 받으시는 음성을 들을 수 있었다. 전화 한 통화를 나누면서 서로가 가슴에 간직하고 서로를 사랑하고 있다는 표현은 참으로 소중하다.
-거룩한 믿음 위에 자신을 건축하라-
둘째로, “거룩한 믿음 위에 자신을 건축하라”고 말씀하셨다. “건축하라”는 말씀은 교회를 세울 때, 사도 바울이 많이 사용하는 말씀이다. 여기서는 이단의 유혹이 난무하는 시대에 “신앙의 무장을 하라”는 뜻이다.
코로나 시대에 신앙 성장의 기회가 될 수 있다는 생각과 결과는 멀게 느껴진다. 외출시간이 적어 성경 묵상과 경건 서적 읽기보다 더 많은 시간을 갖게 될 것이라는 것은 그저 생각뿐이다.
“거룩한 믿음 위에” 자신의 신앙을 바로 세워가는 노력이 요구된다. 여유있는 시간에 오히려 게을러지고 경건에 이르는 연습보다는 세상 소식, 건강 문제, 노후 문제에 관심을 더 가지게 되는 모순을 발견하게 된다.
믿음은 신앙의 기초와 토대이다. 믿음이 없이는 주님과 관계가 없고, 구원의 백성이 될수도 없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없기 때문이다. 히브리서 11장 6절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And without faith it is impossible to please God, because anyone who comes to Him must believe that He exists and He rewards those who earnestly seek Him).
인생의 목적과 가치가 돈, 명예, 권세, 세상 즐거움이 아니라 믿음이 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또한 주님께서 주신 육체, 시간, 재능, 물질 등으로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말씀이다.
그렇지 않은가? 정말 가장 귀한 인생의 건축 재료는 무엇인가? 믿음이다. 믿음으로 살아가는 모든 삶의 모습들이다. 이것만이 끝까지 영원히 우리의 영광과 승리를 보장한다. 세상에서도 참된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보장한다. 그러나 세상의 것은 아무리 귀한 것이라도 마지막 때는 다 불살라 없어진다(고전3:12~15절). 천국에 가져갈 수 없다. 공로나 업적이 될 수 없다.
-성령으로 기도하면서 하늘의 뜻을 땅에서 이루며 살라-
셋째로, “성령으로 기도하며”하고 권면하신다. 성령 안에서 기도하라는 말씀이다. 성령의 능력으로 기도하라는 말씀이다. 기도가 안 되는 것도 병이지만, 성령의 능력으로 기도하지 못하는 것은 더더욱 영혼을 무기력하게 만든다. 코로나 시대는 기도의 시간이다. 기도로 이겨야 할 시간이다. 기도로 코로나의 종식을 선포할 때이다. 코로나로부터 보호, 치유 그리고 종식을 위한 기도가 절실하다. 그러나 코로나 때문에, 코로나를 위하여 기도하기보다 하나님과 자신과의 본연의 관계를 더욱 돈독하기 위하여 성령의 도움을 얻기를 기도하고 성령의 도움으로 기도해야 할 때이다.
종교개혁자 존 칼빈은 다음과 같이 <하루를 시작하는 기도>를 드렸듯이 성령 안에서 주님의 뜻을 이 땅에 이루어 드리도록 기도하며 살아야 하겠다.
“저의 하나님이 되시고, 저의 아버지와 보호자가 되신 주님, 주님의 선하심이 지난 밤에 잠든 동안에도 저를 지켜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오늘 하루 동안 가장 거룩하신 주님을 온전히 예배하고 섬길 수 있도록 새날을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하루를 지나는 동안 주님을 섬기고 주님의 뜻에 복종하는 데에 거스르는 어떤 생각이나 말 그리고 행동을 하지 않도록 도와주소서. 저의 모든 행동이 오로지 주님의 영광과 이웃의 구원만을 향하게 하소서. 모든 이들에게 제가 주님을 섬기는 본보기가 되는 하루가 되게 하소서.
이 땅에 빛을 허락하시고 태양을 통하여 우리 삶이 유지하듯이, 성령의 역사가 제 마음 속에도 밝혀주시고 성령께서 주님의 의로운 뜻에 맞도록 저를 인도하여 주소서.
제가 마음에 어떤 목표를 갖든지 그것의 궁극적인 목적은 언제나 주님을 높이고 섬기는 것이 되게 하소서. 오로지 주님의 은혜와 선하심을 통해서만 제가 행복을 기대할 수 있게 하소서.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게 아니라면 어떤 일도 하지 말게 하소서.
육신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의식주를 위해 일하지만, 세상에서 일하는 동안에도 제가 주님께서 주의 자녀들에게 약속하신 저 천국의 생명의 복을 바라보며 살게 하소서.
제 몸과 영혼의 보호해 주시길 기뻐하는 주님이시여, 마귀의 모든 공격에 막을 수 있도록 저를 강하고 견고하게 하시고 이 세상에서 저를 괴롭히는 모든 위험으로부터 건져주소서.
주님, 간구하오니 오늘 하루 저의 인도자와 감독자가 되어 주실 뿐만 아니라 저의 삶이 다하는 그 날까지 저를 주께서 보호하여 주시고, 저의 모든 삶의 과정이 주님의 인도하심 가운데 이루어지게 하소서.
제가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갈 때마다 주의 은혜로 역사하여 주옵소서. 진정한 의의 태양되신 우리 주님께 전적으로 충성하는 그날까지 계속되게 하소서.
주님의 무한한 자비로 저의 죄악을 용서하여 주시고 믿음으로 주님을 찾는 모든 사람들에게 약속하신 그 은총을 베풀어 주소서.
이 아침에 주님의 음성을 듣게 하소서. 제 소망은 오로지 주님께만 있나이다. 제가 오늘 걸어갈 길을 보여 주시고, 오직 제 영혼이 주님만을 높이게 하소서, 적으로부터 저를 보호하여 주옵소서, 오 주여, 제가 주께 피하나이다. 주님의 뜻을 행하도록 가르쳐주소서, 주의 성령이 저를 정직한 자 가는 길로 인도하여 주옵소서.”
-하나님 사랑 안에서 자신을 지키며 살아야 한다-
넷째로,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신을 지키며” 살아야 한다. “지킨다”는 것은 “주의하다”, “보호하다”, “유의하다”는 뜻이다. 이것은 곧 경건의 삶을 살라는 말씀과 맥락을 같이 한다. 코로나 사태로 일차적으로 건강 문제, 경제 문제 등이 염두에 두어야 할 제일 순위이다. 그러나 그러한 육체적이고 물질적인 것도 지키고,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간과해서는 안될 일, 진정으로 우선되어야 할 일은 바로 자신을 지키는 것이다.
자신을 세상과 죄와 사탄으로부터 지키는 것이 더 중요하다. 이것이 바로 코로나 시대에 그리스도인의 경건 생활이다. 자신을 지키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이다. 코로나 상황 속에 하나님 품, 하나님의 사랑을 떠나 세상을 향하고, 정욕에 빠지고, 사탄의 유혹에 빠질 가능성이 열려 있다. 하나님 사랑 가운데 거함으로 자신을 세속과 죄악으로부터 지킬 수 있다.
딤전4:7-8에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오직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
경건이란 무엇인가? 경건이란 헬라어로 “유세베이아”(εὐσεβεία)이다. 이 말은 유(εὐ)라는 말과 세베이아(σεβεία)의 합성어이다. 유(εὐ)는 ‘좋다’는 의미, 세베이아(σεβεία)는 세보마이(σεβομαι)는 ‘두려움’의 의미이다. 그래서 “유세베이아”(εὐσεβεία)는 “좋은 두려움”, “바람직한 두려움”이란 뜻이다. 즉 경건이란 “바람직한 두려움” 즉, “마땅히 가져야 하는 두려움”이다.
칼빈은 경건을 그리스도인의 삶이 가지는 시작과 중간, 그리고 마지막이며, 경건이 완성된 곳에는 부족한 것이 없다고 할 정도로 경건을 강조하였다. 칼빈은 경건의 개념을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근본적인 어떤 것을 일컫는 포괄적 개념으로 보았고 경건은 사랑, 경외, 하나님에 대한 참된 지식, 그리고 경배의 원천이라고 인식하였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에 살면서, 특별히 종말의 위기 시대에 살면서 마땅히 가져야할, 바람직한 두려움은 바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지키며 이웃에게 복음적 삶, 선한 삶, 사랑의 삶을 사는 것이다.
-영생에 이르도록 주님의 긍휼을 기다리는 종말론적 삶을 살아야 한다-
끝으로, “영생에 이르도록 주님의 긍휼을 기다려야” 한다. 코로나 시대는 죽음의 위협을 느끼는 시대이다. 죽음의 파도가 가까이 넘실거리는 상황이다. 백신이 나오고, 치료제가 나온다 할찌라도 또 다른 죽음의 그늘은 늘 우리를 위협할 것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 그리스도인들은 늘 영생을 사모하며, 주님의 날, 종말의 날에 주님의 긍휼을 기다리고 바라보며 살아야 한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벧전 4:7)는 말씀과 일맥상통한다.
인간은 창조 주 하나님, 섭리 주 하나님, 심판 주 하나님의 손아래 있다. 하나님은 인간에 인간답게 살라고 생명, 사랑, 은사, 능력, 시간, 환경, 사람, 가정, 직장, 국가, 교회 등등을 다 주셨다. 부족함이 없게 감당하도록 주셨다. 단지 인간의 죄성과 상황에 따라 인간답게 살았는지 못살았는지 결과는 다양하다.
하나님은 거짓이 없는 분이시다. 하나님은 심은 대로 거두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은 그분의 말씀대로 반드시 옳고 그름, 선과 악에 대한 심판을 하신다. 알곡과 쭉정이, 양과 염소를 구분할 때가 반드시 온다.
기독교 역사관은 시작과 종말의 사관이다. 시작이 있기에 종말이 있다. 나 자신의 시작이 있기에 나 자신의 종말이 있다. 역사의 시작이 있기에 역사의 종말도 반드시 있다. 그렇다면 지금 내가 존재하는 것은 곧 내가 종말로 가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염세적 시간관이 철학사상이 아니다. 성경적 시간관과 역사관, 그리고 인생을 바로 직시하고 거기에 합당하게 사는 것이 인간답게 사는 것이다.
토마스 찰머스(Thomas Chalmers, 1780-1847) "다가올 영생에 대한 총체적 준비는 성경이 우리에게 전한 말씀으로 바로 믿고 성경이 우리에게 명령하는 것을 바로 행하는 것이다"라고 했다.
종말론적 삶이란 끝을 생각하며 사는 삶의 방식이다. 빈손으로 왔으니, 빈손으로 떠나야할 인생이다. 지나고 보면 모든 인생은 안개와 같다. 아침 이슬과 풀의 꽃과 같다. 시편 90편의 모세의 노래처럼 영원히 살 것처럼 유한하고 없어질 것들, 놓고 가야 할 것들에 지나치게 집착하지 말아야 하겠다.
종말론적 삶은 떠날 때, 즉 죽음을 기억하며 사는 것이다. 순례자로서 삶을 날마다 되새겨야 한다. 하늘의 생명, 영원한 생명, 영생을 열망하며 살아야 한다. 존 칼빈의 글 <미래의 삶에 대한 묵상>에 기록된 것처럼 영원에 대한 성찰, 묵상, 명상을 전인격적과 모든 삶을 전적으로 분투하며 살아야 한다.
칼빈은 <기독교 강요>를 쓰기 전 썼던 그의 첫 저서인 <프쉬코파니키아, 영혼수면설 논박>에서 “우리 지복은 오직 하나님의 영광이 최종적이면서 완전히 드러날 때에만 온전하게 될 것이다. 이 완성은 심판의 날에 이루어질 것이다. 그때에 [나는 나의 의로운 중에 주의 얼굴을 뵈오리니 깰 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시17:5)"라고 했다.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고후 4:18)."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 5:16~18)."
결론을 맺으며, 유다서의 말씀으로 위기 상황을 극복하길 소망한다. 경제 위기 여파로 나락에 떨어지고 그늘진 삶의 아픔과 그 현장들에 은혜의 역사가 일어나길 믿는다. 주님의 음성, “사랑하는 자들”에게 큰 위로와 소망을 주길 바란다. 거룩한 믿음 위에 자신을 건축하기를 기대한다. 성령으로 기도하면서 하늘의 뜻을 땅에서 이루며 살기를 권면하다. 하나님 사랑 안에서 자신을 지키며 살아야 한다. 영생에 이르도록 주님의 긍휼을 기다리는 종말론적 삶을 살아야 한다.
정준모 목사는 선교신학박사(D.Miss)와 철학박사(Ph. D)이다. 전 대한예수교 장로회 총회장, CTS 기독교 텔레비전 공동대표이사, GMS 총재, 총신대학교 개방, 교육 재단이사, 백석대학교대신대학교 교수 역임, GMS(세계선교이사회) 총재 등을 역임했다.
현재로는 현 GSM(선한목자 선교회) 고문, 콜로라도 말씀제일교회 담임, 국제개혁신학대학교 박사원 교수, 국제 성경통독아카데미 대표, 콜로라도 타임즈, 뉴스파워, 좋은신문, KCMUSA 칼럼리스트, 대표 저서, ≪칼빈의 교리교육론》, ≪개혁신학과 WCC 에큐메니즘》, 《장로교 정체성》 등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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