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신배 박사】 한국의 고아들을 위해 다시 한국으로 온 위도선 선교사

  • 입력 2022.08.12 1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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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신배 교수의 구약이야기 (274) - 구약성경과 선교이야기 (86)

박신배 교수 / 연세대 구약학 박사, 현 강서대 교수, 창조문학 편집위원, 한국 평화학회 전 부회장, 한국 구약학회 전 부회장, 강서대 전 총장
박신배 교수 / 연세대 구약학 박사, 현 강서대 교수, 창조문학 편집위원, 한국 평화학회 전 부회장, 한국 구약학회 전 부회장, 강서대 전 총장

내 평생(콜 예메 하야이)에 선하심(토브)과 인자하심(와 헤세드)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베베트 아도나이)에 영원히(레오레크 야밈) 살리로다”(23:6).

오늘을 사는 우리들은 마치 안개 속에 살아가는 것처럼 한 치 앞을 보지 못하고 살아가는 삶이다. 이처럼 우리는 불확실성의 시대를 살아간다. 전염병은 기승을 부리고 날씨는 덥고 물가를 오르고 있어서 사람들이 살아가기 힘들다고 아우성이다. 이러한 때에 우리는 목자의 시편, 시편 23편에서 위로를 받을 수 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로이)시니 내게 부족함(에흐사르)이 전혀 없으리로다()”(23:1). 이처럼 이 시편은 심오한 단순성과 비교할 수 없는 아름다운 운율로 시편을 접하는 신앙의 사람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은 최고의 시편이다.

이 시에 흐르는 시의 음조는 깊은 곳으로부터하나님께 드리는 확신에 찬 기도를 강력한 표현으로서 목자와 양과의 관계에서 인생 전반을 읊조리는 아름다운 시이다. 어린 아이들의 마음속에 암송하여 외우고, 어른들의 인생의 난국에 처했을 때 극복하도록 하였고, 임종을 맞이하는 사람들의 입술에도 평화의 축도가 되었던 시편의 정수를 보여주는 시이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빈오트 데쉐)에 누이시며(야르비체니) 쉴 만한 물가(알 메 메누호트)로 인도하시는도다(예나하레니)”(2). 먹을 것과 편하게 누을 곳, 바로 안식처로 이끄는 하나님의 모습을 보여준다. 어린 양들이 아름다운 초장에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는 목자의 평화로운 모습을 노래한다. 이는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질풍노도(疾風怒濤)의 시대에 필요한 쉼과 안식의 터전을 말하고 있다.

이 시편은 신뢰와 명상의 시편으로 시편 4, 27, 63, 125편 등이 해당된다. 이 신뢰 시편은 희생의 제물과 제의적인 행위가 언급되고 여호와 앞에서 노래하고 춤추며 여호와의 장막에서 거주하는 것을 표현한다(27:4-6). 시편 23편도 마지막 구에서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고 고백한다.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을 신뢰하고 따를 때 풍요로운 초장과 쉴만한 푸른 물가로 인도하신다는 사실이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예소베브) 자기 이름(쉐모)을 위하여 의의 길(베마아겔레 체데크)로 인도하시는도다”(3). 인생의 파란만장(波瀾萬丈)한 일들 속에서도 하나님이 인도하시고 소생시키는 놀라운 은혜를 고백하게 된다. 이는 깊은 신뢰 속에서 하나님께 다가갈 때 이뤄지는 현상이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베게 찰마웨트)로 다닐지라도(키 에레크) 해를 전혀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로 이라 라)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아타 이마디)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쉬브테카 우 미쉬안테카)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예나하무니)”(4). 사망과 죽음의 그늘이 드리어지고 죽음의 덫과 그물이 매일 도사리고 있는 삶의 현장에서 우리는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우리를 보호하시고 계시는 깊은 신뢰를 가지게 되며 결국 원수의 목전에서 상(술한)을 베푸시는 주인이신 하나님, 왕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5). 그래서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시니 내 잔(코시)이 넘치는 사건을 맞고 또 그러한 고백을 하게 된다(5절 후반). 시인은 원수들에게 극적으로 대환영을 받고 역전되는 상황을 맞게 된다. 하나님의 영광이 시편기자에게 경험되고 체험되는 놀라운 순간을 맞이하게 된다. 이러한 인생을 살았던 한국의 선교사들이 있다.

그 중에 위더슨(Mary Ann Widdowson 1898-1956)을 들 수 있다. 그녀는 본명이 매리 코울이다.

그녀는 스코틀랜드 출신으로 부모와 함께 남아프리카 케이프 타운에서 자랐다. 그녀는 17세에 부모와 함께 참여한 구세군 집회에서 감명을 받고 1925년 요하네스 버그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구세군 사관으로 사역을 한다. 그 후에 한국 선교의 비전을 품은 크리스 위더슨과 약혼을 하고 1927년 부산을 거처 서울에 도착한 후 선교를 위해 위도선(魏道善)이라는 이름으로 활동을 했다.

그녀는 남편과 보육원을 운영하며 고아들을 돌보았다. 어려운 상황에서 전염병의 위험에 노출되며 발진티푸스의 병에 걸려 의식을 잃고 쓰러지는 위기도 겪었다. 그녀는 7년의 사역을 마치고 아프리카 케냐로 선교지를 옮겨 사역하다가 다시 한 번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한국 전쟁 막바지인 1953년 추운 1월에 한국 땅에 도착한다. 피난 수도 부산에서 남편과 더불어 고아원 원장을 하며 불쌍한 고아들을 돌보다가 위암에 걸려 1956년 세상을 떠난다.

그녀의 묘비에는 이런 글귀가 새겨져 있다. “나는 고국으로 돌아가기를 원치 않는다. 한국에서도 하나님 나라로 갈 수 있다.” 남편은 그녀의 묘지 옆에 두 그루 단풍나무를 심은 뒤 이듬해 사령관직을 사임하고 한국을 떠났다. 한 선교지를 품고 선교하다가 그 나라에서 부름을 받는 것이,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죽음과 같을까. 아름다운 생애의 한 이야기를 우리는 시편 23편과 함께 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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