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신배 교수의 구약이야기 (284) - 구약성경과 선교이야기 (96)

박신배 교수 / 연세대 구약학 박사, 현 강서대 교수, 창조문학 편집위원, 한국 평화학회 전 부회장, 한국 구약학회 전 부회장, 강서대 전 총장
박신배 교수 / 연세대 구약학 박사, 현 강서대 교수, 창조문학 편집위원, 한국 평화학회 전 부회장, 한국 구약학회 전 부회장, 강서대 전 총장

내가 주께 감사하옴(오드카)은 나를 지으심이 심히 기묘하심(니프라임)이라 주께서 하시는 일이 기이함을 내 영혼이 잘 아나이다(웨나프쉬 요다아트 메오드)”(139:14).

사람이 산다는 것은 하나님을 인식하고 감사하며 찬양하는 것이 아닐까? 우리네 인생이 주님의 손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오늘 고백하지 않을 수 없는 현실이다. 현대를 살아가는 삶과 생활세계에서, 우리는 창조주 하나님 앞에서 이 사실을 시인하지 않을 수 없다. “주께서 내 내장을 지으시며(킬레오타이) 나의 모태에서(베베켄 이미) 나를 만드셨나이다”(139:13). “내가 은밀한 데서 지음을 받고 땅의 깊은 곳에서(베타흐티요트 아레츠) 기이하게 지음을 받은 때에 나의 형체가 주의 앞에 숨겨지지 못하였나이다(로 니크하드 아체미) 내 형질이 이루어지기 전에 주의 눈이 보셨으며 나를 위하여 정한 날이 하루도 되기 전에 주의 책에 다 기록이 되었나이다(웨알 시프레카 쿨람 이카테누 야밈)”(139:15-16). 우리의 인생의 태초, 처음부터 하나님의 손에서 만들어졌고, 우리의 인생의 정한 날들이 하나님의 책에 다 기록되었다는 사실을 시편기자는 노래하고 있다. , 우리 인생은 하나님의 섭리가운데 있구나!

하나님이여 나를 살피사(하크레니 엘) 내 마음을 아시며(웨다 레바비) 나를 시험하사 내 뜻을 아옵소서(웨다 사르아파이)”(139:23). 대적자의 공격과 원수들이 자신의 신앙구조와 종교적 행위 속에서 열심히 신을 구하고 있다. 또 헛되이 맹세하며 최선을 다하여 종교행위를 하는 모습이다(139:20). 하지만 시인은 이런 심각한 고난의 상황에서도 하나님 앞에서 경건한 자신의 신앙 상태를 점검하며 자신의 마음을 살피고 주의 도우심을 간구하고 있다. “내게 무슨 악한 행위가 있나 보시고(우레에 임 데레크 오체브 비) 나를 영원한 길로 인도하소서(우레헤니 베데레크 올람)”(139:24). 결국 경건한 시인은 자신의 인생의 문제가 악한 행위, 죄의 문제에 있다는 사실을 고백하며 겸손히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하고 있다.

여호와여 내가 주를 미워하는 자들을 미워하지 아니하오며(하로 메사네에카 아도나이 에세나)) 주를 치러 일어나는 자들을 미워하지 아니하나이까(에트코타트) 내가 그들을 심히 미워하니 그들은 나의 원수들이니이다(레오에빔 하유 리)”(139:21,22). 대적자이며, 원수들이 심히 의인인 시인을 괴롭히며 어렵게 하지만 결국 하나님의 심판은 준엄하여 죄인들의 종국의 상황이 된다고 고백한다. “하나님이여 주께서 반드시 악인을 죽이시리이다(임 티크톨 엘로아흐 라샤) 피를 흘리기를 즐기는 자들이(웨안쉐이 다밈)나를 떠날지어다(수루 메니)”(139:19). 예레미야나 욥이 고난을 당하는 상황에서 탄식하며 자신의 태어남을 한탄하던 모습과 흡사 유사하다. 하지만 하나님의 도우심과 인도하심이 결국에는 시인을 구원하며 하나님의 심판으로 말미암아 원수들이 사라지게 되리라고 노래한다.

이 시편은 왕정시편(3,5,7,11,26,27,36,52,54,57,62,64,71,77,86,140)으로서 이스라엘의 예배의 시편이다. 또 국가의 탄식시편으로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과 편재하심, 그 영원성을 보여준다. 우리의 모든 상황을 다 아시고 계시는 하나님께서 지혜를 가지고 우리를 보살피고 계심을 알게 하는 시편이다(139:1-9).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나이다(웨아치아 쉐올 힌네카)”(8). “주께서 나의 앞뒤를 둘러싸시고 내게 안수하셨나이다. 이 지식이 내게 너무 기이하니 높아서 내가 능히 미치지 못하나이다(니쉐게바 로 우칼 라흐)”(139:6). 지극한 사랑으로 우리를 보시는 주님은 우리를 통해 찬양의 노래를 받으시는 분이시다. 이러한 찬양의 사람은 누구인가? 삶의 탄식에서 감사와 찬양으로 이어지는 인생의 깊은 노래를 부르는 지혜를 가진 사람들이 누구인가? 신앙인들 중에 선교사는 깊은 탄식속에서도 찬양을 잘 하는 인생이라고 말할 수 있다.

맥큔(G. S. McCune, 1878-1941 윤산온)은 미주리주 파크 대학을 졸업하고 1905년 한국에 선교사로 온다. 그는 1909년 평북 선천의 신성학교 교장에 취임하여 학생들에게 민족 교육을 하며 3.1운동도 지지하였다. 1935년 평양의 숭실전문학교 교장이었을 때에 일제는 신사참배를 강요하였다. 일제 야스타케가 11월에 초등학교장 회의를 열어 신사참배를 요구할 때에 맥큔은 숭의여학교 교장 대리 정익성과 안식교의 순안 의명학교 교장 리(H. M. Lee)와 더불어 이를 거부하였다. 나중에는 안식교는 공식적으로 신사참배를 인정하였지만 맥큔과 숭의여학교 교장 스눅(V. L. Snook, 선우리)은 끝까지 신사참배를 거부하여 19361월에 교장직에서 파면된다.

국가보훈처 및 한국기독교박물관 자료 , 오른쪽은 숭실전문학교 당시 맥큔 선교사와 관현악단
국가보훈처 및 한국기독교박물관 자료 , 오른쪽은 숭실전문학교 당시 맥큔 선교사와 관현악단

맥큔은 신사참배 강요를 거부하였기 때문에 이듬해 총독부에 의해서 국외로 추방되었다. 그는 이전에도 한일합방(1910)에 반대하는 의견을 가진 총독부의 명단에 들어간다. 이길함, 마삼열, 소안륜, 방위량, 편하설, 윤산온, 우월씨 등이 그 반대자였다. 죠지 새년 맥큔은 1907년 평양 대부흥 운동을 경험하고 대학 교육을 위한 모금에, 800명의 교사건축 건립을 위한 편지를 쓴다. 한편 105인 사건에 신성학교 학생과 교사들을 구속하기 시작할 때, 맥큔은 이들의 석방과 공정한 재판을 위해 활동하였고 123명 중에 105인 유죄 판결을 받게 된다. 이 때에 양기탁, 윤치호, 이승훈을 비롯한 주모자 6명을 제외한 99명이 무죄선고를 받고 풀려났다. 맥큔은 이들이 무죄로 풀려나는 것을 보고 19133월 안식년으로 귀국하여 박사학위를 받고 다시 191411월 가족과 함께 선천으로 복귀한다.

그 후에도 맥큔은 3.1운동을 주도하는 집회와 주동자 이광수와 김원벽, 박치의 등을 돕는다. 이로 인해 일제 총독부에 극단적인 배일자로 지목당해 신성학교장 직에서 물러나고 감시를 받다가 1921222일 장남의 심장병 치료를 위해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돌아간다. 그러다가 다시 19285월 다시 내한하여 숭실전문학교와 숭실학교 교장직을 겸임하였다. 그 후 1936년 신사참배 거부하여 결국 파면 당한 후에 미국으로 돌아가 일제의 만행을 알리다가 194112월 서거한다. 정부는 이러한 그의 공훈을 기려서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여 이를 기념하게 된다. 시대의 다니엘은 이처럼 다시 선교사 맥큔에게 이어졌고 조선에서 다니엘로 나타나게 되었던 것이다.

관련기사

저작권자 © 본헤럴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