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신배 교수의 구약이야기 (268) - 구약성경과 선교이야기 (80)

박신배 교수 / 연세대 구약학 박사, 현 KC대 교수, 창조문학 편집위원, 한국 평화학회 전 부회장, 한국 구약학회 전 부회장, KC대 전 총장
박신배 교수 / 연세대 구약학 박사, 현 KC대 교수, 창조문학 편집위원, 한국 평화학회 전 부회장, 한국 구약학회 전 부회장, KC대 전 총장

주를 찾는 자는 다 주 안에서 즐거워하고(야시슈) 기뻐하게 하시며(위시메후) 주의 구원을(테슈아테카) 사랑하는 자(오하베)는 항상 말하기를 여호와는 위대하시다(익달) 하게 하소서”(40:16).

전염병의 재앙! 이 재앙의 시대를 넘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원하시는가? 우리는 그 뜻을 물으면서 현재 일어나고 있는 많은 재앙의 현상을 살펴보고 있다. “수많은 재앙이(라오트) 나를 둘러싸고 나의 죄악(아오노타이)이 나를 덮치므로 우러러볼 수도 없으며 죄가 나의 머리털보다(미사 아로트 로쉬) 많으므로 내가 낙심하였음이니이다(아자바니)”(40:12). 시편 40편 기자는 현재 일어나고 있는 재앙과 자신의 죄악을 살펴보고 있다. 이 재앙은 자신의 죄와 무관하지 않다고 보는 있는 것이다. 현명한 사람은 재앙을 보면서 이 시편 기자처럼 자신의 죄과를 살펴보는 사람이다.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미보르)와 수렁(샤온)에서 끌어올리시고 내 발을 반석 위에(세라) 두사 내 걸음을 견고하게(코넨) 하셨도다”(40:2).

현재 당하는 고난에서 벗어나는 길이 바로 기도하고 부르짖음에 있으며, 새 노래로 부르는 찬송과 주의 법(토라)이며, 공의와 인자와 진리라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3, 7, 8, 10, 11).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 주의 법이(토라트카) 나의 심중에 있나이다(베토크 메아이) 하였나이다”(8), “그 때에 내가 말하기를 내가 왔나이다(바티)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이 두루마리 책(비메길라트 세펠 카투브)에 있나이다”(7). 이 책은 제사에 대한 다른 요소들의 평가에 있어서 변화를 가진 대면적 예배로 해석되며, 희생제사에 대한 영적 재해석을 가르키는 것으로 보인다(모빙켈). 이 시편 40편은 바로 감사 시편으로 제사나 공중적인 예배보다는 경건함과 정의에 있음을 말하고 있다. 우리 주위의 현실은 너무나 힘들고 어려운 모습들이다. “내 생명을 찾아 멸하려 하는 자는 다 수치(에보슈)와 낭패를 당하게 하시며(야흐페루) 나의 해를 기뻐하는 자는 다 물러가(아호르) 욕을 당하게 하소서(이카레무) 나를 향하여 하하(헤아흐) 하하(헤아흐) 하며 조소하는 자들이 자기 수치로(바샤탐) 말미암아 놀라게 하소서(야쇼무)”(14-15). 어려운 상황은 하나님을 찾고 기다리는 간절한 기도를 요구하고 우리는 신앙으로 믿음의 반석이신 하나님을 찾는 지혜를 가지게 된다(1).

여호와여 은총을 베푸사(레쩨) 나를 구원하소서 여호와여 속히(후샤) 나를 도우소서(레에즈라티)”(13). “나는 가난하고(아니) 궁핍하오나(에브욘) 주께서는 나를 생각하시오니(야하샤브) 주는 나의 도움이시오(에즈라티) 나를 건지시는 이시라 나의 하나님이여 지체하지 마소서(알 테아하르)”(17).

인생은 환난과 고난을 어떻게 대처하며 극복하는가 하는 점에서 성공적인 인생을 사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차이가 있게 된다. 선교사들은 믿음으로 어려움을 극복하며 고난 극복을 신앙 안에서 이룬 사람들이다. 외국인 선교사와 그 가족들이 145명 양화진 선교사 묘원에 묻혀 있다.

헐버트(H.B, 1863-1949)웨스트민스터 성당보다 한국에 묻히고 싶다고 했다. 그는 미국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서 1886년 설립된 육영 공원에 영어교사로 내한한다. 그는 학생들을 위해 <사민필지> 지리 교과서를 저작하고 1903년 창설된 한국 YMCA에 초대 회장을 역임하였다. 그는 1907년 고종이 헤이그 만국평화 회의에 밀사를 파견하도록 권고하였고, 자신도 직접 헤이그로 들어가서 한국 독립의 정당성을 알리는 노력을 하였다. 특히 고종의 친서를 들고 미국 대통령을 만나러 갔을 때 일본과 이미 가쓰라 테프트 밀약을 맺은 상태라 만나주지 않았다. 이를 뒤늦게 알았을 때 그는 실망감이 컸을 것이다.

아울러 엘버트 테일러는 3.1운동을 알리며 독립 선언서를 첫아이가 태어난 날, 요람에서 발견하고 미국으로 보냈다고 한다. 그는 제암리 학살 사건도 보도를 해서 해외에 알렸다. 그는 독립 운동을 도왔다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6개월 수감되기도 하면서, 지금도 현존하는 빨간 벽돌의 가옥, 딜큐샤를 바라보기도 하였다고 한다.

Albert Taylor was 42 years old and his wife Mary Taylor was 28 years old when they first came to Korea in 1917.
Albert Taylor was 42 years old and his wife Mary Taylor was 28 years old when they first came to Korea in 1917.

선교를 위해 오래전 한국에 온 선교사들의 모습을 보면서 오늘 우리는 또 다시 선교지를 향한 그 분들의 마음을 가진다. 갈릴리 땅 끝을 향해 복음의 마음을 가지고 살았던 예수님처럼 십자가 사랑을 가지고 그 사랑을 전할 생각을 하게 된다.

내가 많은 회중 가운데에서 의의 기쁜 소식을 전하였나이다 여호와여 내가 내 입술을 닫지 아니할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4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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