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신배 교수의 구약이야기 (264) - 구약성경과 선교이야기 (76)

박신배 교수 / 연세대 구약학 박사, 현 KC대 교수, 창조문학 편집위원, 한국 평화학회 전 부회장, 한국 구약학회 전 부회장, KC대 전 총장
박신배 교수 / 연세대 구약학 박사, 현 KC대 교수, 창조문학 편집위원, 한국 평화학회 전 부회장, 한국 구약학회 전 부회장, KC대 전 총장

나의 생전(베하야이)에 여호와를 찬양하며 나의 평생(베오디)에 내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아자메라)”(146:2).

세상은 아직도 팬데믹의 전염병이 도사리고 있어서 불안한 날들이다. 사회는 팬데믹의 영향으로 많은 변화가 있다. 우리는 이 남은 팬데믹에서 이제 전염병에서 해방되었을 것이라고 안심하기 쉽다. 그래서 안도의 숨을 쉬고 안이한 마음을 먹다가 어려움을 겪게 되는 경우가 있다. 이는 남은 여진(餘震)에 화를 당하는 경우가 비슷하다. 오늘도 하나님 앞에서(코람 데오) 정직하게 살며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아가는 날이 되어야 할 것이다. 시편말씀에 주목하고 있는데 우리는 시편기자와 똑같은 삶의 현실과 삶의 자리에 있기 때문이다. “억눌린 사람들을(라아슈킴) 위해 정의로 심판하시며(오세 미쉐파트) 주린 자들에게(라레에빔) 먹을 것을(레헴, ) 주시는 이시로다 여호와께서는 갇힌 자들에게(아수림) 자유(마티르)를 주시는도다”(7). 어려운 현실이 계속 우리를 짓눌리는 삶은 저절로 탄식의 소리가 나오며 어쩔 수 없이 마지못해 살아가는 사람들의 무리에 섞여 있는 형편이다.

귀인(비네디빔)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로 테슈아) 인생도(베벤 아담) 의지하지 말지니 그의 호흡이 끊어지면(테체 루호) 흙으로(레아드마토) 돌아가서 그 날에 그의 생각이(에쉐토노타이오) 소멸하리로다”(3,4). 인생은 오직 하나님만 의지할 존재가 인간(인간의 아들, 인자)이라는 사실을 146편은 말한다. 시편 146편은 뒤의 147-150편의 시편과 더불어 할렐루야 시편으로서 시편 세계의 완성과 결론을 말한다. 또 시편 알파벳 시, 145편과 짝을 이루어 순례시편으로서, 영원한 왕국(나라, 145:13)의 사상으로 영원한 현재, 영원한 소망을 말하고 있다. “여호와는 천지와 바다와 그 중의 만물을 지으시며 영원히 진실함(에메트 레올람)을 지키시며”(6). “시온아 여호와는 영원히 다스리시고(이메로트 아도나이 레올람) 네 하나님은 대대로(레도르 와도르) 통치하시리로다 할렐루야”(10). 왕 즉위 시편, 축제 시편으로서 다윗의 시편(145)의 찬양 후렴구와 같은 역할을 한다.

이 시편 146편을 통해 하나님은 영원한 나라를 위해, 억눌린 자, 주린 자, 갇힌 자, 맹인들, 비굴한 자들, 의인들, 나그네들, 고아와 과부들과 함께 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7-9). 따라서 우리 주님이 희년의 주인공으로서 자유를 선포하시려 오신 것과 동일한 의미를 가진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누가4:18-19). 따라서 우리는 오직 주님을 바라며 살아가는 삶을 살아가야 하리라. “야곱의 하나님(쉐엘 야아곱)을 자기의 도움으로(베에제로)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자기의 소망(시브로)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아쉐레)”(5).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며 선교지에서 하나님의 선교를 하시는 분들이 바로 선교사들이다. 윌리엄 해밀턴 쇼(1922-1950, 서위렴, 해군 대위)은 그의 부모와 함께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에 묻혀있다. 이 양화진에는 417명의 선교사들이 묻혀 있는데 그 중에 선교사 가족은 145명이라 한다. 윌리암 해밀턴 쇼는 한국전에서 전사하여 녹번동 부근의 은평 평화공원에 동상이 세워졌다. 그의 부모 쇼 선교사 부부는 일제 치하에서 1921년 함께 내한해서 학교 교사로 선교 활동을 하였다. 그러다가 1941년 일제에 의해 강제로 추방당하였다. 그런데 해방이 되어 부친 윌리암 얼 쇼(William Earl Shaw) 선교사는 한국으로 다시 돌아와서 한국 전쟁에는 군목으로 참전하여 한국 군목 제도 창설을 주도한다. 1954년 대전신학교(현 목원대)에 교수로 재직하며 목회자 양성에 전력을 기울였다.

윌리엄쇼 동상과 1956년 목원대 신학관 준공 당시 모습(윌리엄쇼는 1954년 부터 재직)
윌리엄쇼 동상과 1956년 목원대 신학관 준공 당시 모습(윌리엄쇼는 1954년 부터 재직)

그는 아들이 한국 전쟁에서 잃는 아픔을 겪으면서도 한국 선교의 씨앗을 뿌렸고 그 결과 오늘의 한국의 교회와 근대화, 세계 10대 강국에 들어가는 기초를 놓게 한 것이다.

윌리암 쇼 대위의 친구들인 이동국, 이완용은 해군 사관학교 2기생으로서 동료이다. 하지만 또 그들은 제자이자 친구인 쇼 대위를 위해 검은 대리석 비를 녹번 평화 공원에 세워주었다. “쇼 선생이 숭고한 한국 사랑과 거룩한 희생을 추모하며 이 좌대석을 바칩니다”(2001.10.20.)그 동상에는 웃고 있는 모습으로 한국 발전에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다. 선교는 그 민족과 나라를 위해 생명을 바치는 것인가? 윌리암 쇼 부자는 2대에 걸쳐 이것을 보여주고 있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1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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