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신배 교수의 구약이야기 (211) - 구약성경과 선교이야기(23)

박신배 교수 / 연세대 구약학 박사, 현 그리스도대 구약교수, 창조문학 편집위원, 한국 평화학회 전 부회장, 한국 구약학회 전 부회장, KC대 전 총장
박신배 교수 / 연세대 구약학 박사, 현 그리스도대 구약교수, 창조문학 편집위원, 한국 평화학회 전 부회장, 한국 구약학회 전 부회장, KC대 전 총장

이제 아스트라제네카 백신이 도착하여 내일부터 접종에 들어간다. 이제 안정적인 상황이 전개되겠지만 경제적인 공황이 커지고 있고 아직도 인심은 흉흉하다. 이 어려운 시대에 하나님 신앙은 더 간절하며 그 기도는 절실하다. 이 종말적인 시대는 미혹하는 사람들이 많이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때는 종말론적인 기현상이 많이 일어난다. “아이들아 지금은 마지막 때라 적그리스도가 오리라는 말을 너희가 들은 것과 같이 지금도 많은 적그리스도가 일어났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마지막 때인 줄 아노라”(요한일서2:18). 그래서 이러한 때는 고난을 이겨내는 신앙이 필요하다. 요한계시록의 재앙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 바로 오늘의 종말론적인 현상이며 오늘날 일어나는 팬데믹 현상이 이와 유사하다. “그러므로 하루 동안에 그 재앙들이 이르리니 곧 사망과 애통함과 흉년이라 그가 또한 불에 살라지리니 그를 심판하시는 주 하나님은 강하신 자이심이라 그와 함께 음행하고 사치하던 땅의 왕들이 그가 불타는 연기를 보고 위하여 울고 가슴을 치며 그의 고통을 무서워하며 멀리 서서 이르되 화있도다 화있도다 큰 성, 견고한 성 바벨론이여 한 시간에 네 심판이 이르렀다 하리로다”(18:8-10).

욥기는 까닭모를 고통과 고난 속에서 탄식하며 그 재앙의 현실을 욥은 원망하고 있다. “내가 오늘도 혹독히 원망하니 받는 재앙이 탄식보다 중함이니라”(23:2). 요즈음 매스 미디어의 발달로 인해 통제가 심해서 사람들의 활동이 자유롭지 못한 현실이다. 하지만 케이 방역이 효율적으로 이뤄지고 있다. 사람들의 움직임이 적고 모이지 못하는 상태가 장기화 되면서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는 사업들이 어려움을 당하고 있다. 이러한 고통은 사회 활동 금지와 집합의 제한적 조치로 인한 경제 활동의 위축됨으로 온다. 그래서 새로운 형태의 무형 공간과 가상공간이 형성되면서 거짓과 환상의 세계를 혼동하는 현실이 되고 있다. 그리하여 새로운 현실 속에서 자신의 고통을 크게 겪으며 그 어려움은 가중되고 있다. “그가 땅을 그 자리에서 움직이시니 그 기둥들이 흔들리로다...그가 내 앞으로 지나시나 내가 보지 못하며 그가 내 앞에서 움직이시나 내가 깨닫지 못하느니라”(9:6, 11).

이제 우리의 삶의 근거와 터전이 흔들렸으며 기존의 생존 방식으로는 살 수 없는 현실이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고난과 재앙 속에서 우리는 더욱 절실히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의 임재를 발견해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이를 깨달을 수 없고 보지도 못한다고 한다. “일이 다 같은 것이라 그러므로 나는 말하기를 하나님이 온전한 자나 악한 자나 멸망시키신다 하나니 갑자기 재난이 닥쳐 죽을지라도 무죄한 자의 절망도 그가 비웃으시리라”(9:22-23). 이 코로나 19 전염병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재앙으로 다가오고 있다. 이는 욥의 고백과 유사하지만 다른 차원이 있다. 그것은 공동체와 집단을 향한 재앙의 모습이 있는 것이 그것이다. “주께서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을 학대하시며 멸시하시고 악인의 꾀에 빛을 비추시기를 선히 여기시나이까”(10:3).

욥은 개인의 차원에서 고난이지만 공동체의 영향과 고난의 문제를 제기한다. 선교사는 이처럼 개인의 죄와 공동체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의지를 가지고 선교지에서 희생하는 존재들이다.

1939년 평양외국인학교를 졸업한 쇼(왼쪽)가 미국 유학에 앞서 아버지 서위렴과 찍은 사진.
1939년 평양외국인학교를 졸업한 쇼(왼쪽)가 미국 유학에 앞서 아버지 서위렴과 찍은 사진.

윌리암 쇼(서위렴, 1890-1967)4대에 이르기까지 한국을 사랑한 선교사였다. 그는 해주를 중심으로 감리교 선교를 하였고, 1921년부터 1941년까지 평양, 영변, 해주 지역에서 선교활동을 한다. 잠시 귀국해서 다시 1947년 한국에 돌아오기 전까지 모교인 웨슬리안 대학교에서 신학부장으로 교수 활동을 한다. 선교지 한국에 와서 군목활동하며 1951년 육군에 군목 제도가 창설되는데 기여한다. 그는 외아들 쇼(윌리엄 해밀턴)대위가 전쟁 참전 중에 목숨을 잃어버린다. 어려움을 당하였지만 쇼 선교사는 1961년 선교사직에서 은퇴하여 돌아가실 때까지 사역을 감당하며 격변의 한국근대사에 횃불이 되었고, 빛과 소금으로 그 역할을 하였다. 쇼 선교사 가정은 4대를 한국에 바친 고귀한 빛의 사자들이다. 어려운 어둠의 시대일수록 빛은 찬란하다.

자기 친구들을 위해 자기 생명을 내놓은 것, 이것보다 큰 사랑은 없나니”(1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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