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신배 교수의 구약이야기 (272) - 구약성경과 선교이야기 (84)

박신배 교수 / 연세대 구약학 박사, 현 강서대 교수, 창조문학 편집위원, 한국 평화학회 전 부회장, 한국 구약학회 전 부회장, 강서대 전 총장
박신배 교수 / 연세대 구약학 박사, 현 강서대 교수, 창조문학 편집위원, 한국 평화학회 전 부회장, 한국 구약학회 전 부회장, 강서대 전 총장

멸망할 땅 바벨론아 네가 우리에게 행한 대로 네게 갚는 자가 복이 있으리로다”(137:8).

세상은 유가가 오르고 물가가 오르면서 한국은행은 빅스텝(기준 금리 0.50% 인상)이라는 정책으로 물가를 잡으려고 한다. 하지만 전세가 오르면서 서민 경제는 더욱 어려워지는 형편이 되었다. 세상이 어려워지면 어려워질수록 사람들은 무엇인가 위로가 되는 것을 찾으려고 한다. 마치 사랑하는 사람이 자신이 준 사랑에 대하여 보상을 받고자 하는 심리를 가지는 것처럼, 곧 그 보상심리를 가지고 무엇인가 받으려고 한다. 하지만 여의치 않으면 회의감을 갖고 포기하거나 아니면 돌변 폭력성으로 변하여 파멸로 치닫는 경우를 보게 된다. 최근의 뉴스를 통해 한 여대생의 비극적 죽음을 보게 된다. 이런 비극의 어려운 시절을 살아가면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주목하며 하나님께 소망을 두지 않을 수 없다.

오늘 시편 137편은 탄식 시편(공동체 탄식시편, 국가 탄식 시편)에 속한 시편으로 에돔을 저주하는 시편을 보게 된다. “네 어린 것들을(오라라이크) 바위에(하사라) 메어치는 자는(쉐요헤즈 웨니페츠) 복이 있으리로다(아스레)”(137:9). 아이를 내 팽개치며 죽이는 사람이 복이 있다니? 이 말이 무슨 말인가. 비인권적인 행위로 유아 폭력, 유아 살해를 교사(敎唆)하는 시편 137편이다. 어찌 이러한 비인륜적인 말로 결론을 맺고 있는가? 이 탄식 시편은 탄식의 강도가 깊고 어려운 상태에 이르러 탄식이 변하여 저주로 변하는 모습을 본다. 탄식이 반복되고 탄식이 정기적으로 되풀이 되는 경우에 이르러 이방 나라의 공격이 단순한 공격이 아닌 심한 공격을 하는 상태가 된다. 외국이나 외국의 통치자에 대한 불평이 심화되면서 이러한 탄식, 저주 시편이 발생하게 된다(12; 14; 58; 82; 90편 등). “이는 우리를 사로잡은 자가(쇼베누) 거기서 우리에게 노래를 청하며(디브레 쉬르) 우리를 황폐하게 한 자(토랄레누)가 기쁨을 청하고(심하) 자기들을 위하여 시온의 노래 중 하나를(미쉬르 찌온) 노래하라 함이로다”(137:3).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삶속에 당한 고난이 크고 심각하여 불행의 탄식을 되풀이 하면서 그 탄식을 깊게 하다보면 불행을 준 상대를 저주하게 되는 상태에 이른다. “여호와여 예루살렘이 멸망하던 날을(욤 에루샤람) 기억하시고(제코르) 에돔 자손을(리브네 에돔) 치소서 그들의 말이 헐어 버리라(아루) 헐어 버리라(아루) 그 기초까지(아드 하에소드) 헐어 버리라 하였나이다”(137:7). 우리 민족을 핍박하고 정복하고 강제점령 통치하던 일본에 대한 우리의 숙원(宿怨)은 이와 같은 경우가 될 것이다. 이 시편을 읽고 노래하면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운명의 전환을 간구하였다. 에돔에 대한 원수 갚음을 소원하며 가을 축제 때나 신년 축제 때에 이스라엘의 회복과 구원을 간구하였던 것이다. 공동체 탄식에서 미래의 희망을 보며 고통과 환난이 종식을 바라면서 공동체 회복을 기대하였던 것이다.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에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137:1). 우리가 일제시대에 가장 열독하며 부르던 시편이 바로 이 시편 137편이다. 이는 우리 민족이 광복이 될 것이라는 소망을 가지고 자기 정화(카타르시스)를 하던 말씀이 아니던가!

오늘 우리에게도 이러한 탄식에 상황에 놓일 때 우리는 또 이 노래를 부르며 하나님의 구원을 바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내가 예루살렘을 기억하지 아니하거나(로 에즈케레키) 내가 가장 즐거워하는 것보다 더 즐거워하지 아니할진대(이 로 아아레 에트 예루샤람 알 로쉬 심하티) 내 혀가 내 입천장에(레쇼니 레히키) 붙을 지로다(티드바크)”(6). 우리나라에 진정한 광명을 전해 주었던 선교사들은 바로 이러한 환난 때에 위로자가 되었다. 그 들 중에 한 분이 소다 가이치(1867-1962)이다.

소다 가이치는 비록 일본인이었지만 한국의 고아들을 위해 헌신한 선교사였다. 그는 1905YMCA에 일본어 선생으로 취직하여 일본어를 가르치던 중에 이상재 선생에게 크게 감명을 받고 기독교인 된다. 그는 41세 때 독실한 신앙인인 30세의 우에노 다키와 결혼을 한다. 소다는 105인 사건(1911)으로 동료들이 감옥에서 고문을 당하자 일제 만행을 공격하면서 동료들의 석방을 위해 노력한다. 그는 어려운 상황에서도 굴하지 않고 천 명 이상의 고아들을 돌보며 일본에 돌아가 한 손에는 세계 평화, 한 손에는 성격을 들고 복음 전도를 하며 일본의 회개를 촉구하였다. 그가 이렇게 일본인임에도 불구하고 한국 선교를 하게 된 것은 젊은 시절 방랑하면서 술에 만취하여 길거리에서 죽게 되었는데 구원받은 까닭이다. 어느 선한 사마리아와 같은 한국인이 자신을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치료를 해주고 밥값도 내주어서 생명을 구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 후에 한국에 은혜를 갚으려고 6년 후 한국에 들어와서 선교 활동을 하게 된 것이다.

소다 가이치는 양화진에 묻힌 유일한 일본인으로서 한국 정부로부터 문화 훈장을 처음으로 받은 일본인이기도 하다. 이는 그가 한국의 고아들을 위해 삶을 바친 십자가 사랑을 한 까닭이다. 그는 노년에 한경직 목사의 부름을 받고 94세에 한국에 돌아와 영락 보린원에서 1년간 고아들과 함께 생활하다가 소천하게 된다. 영원한 하늘나라에서는 모든 나라, 원수의 나라 사람들도 한 아름다운 시민이 되는 경우를 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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