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신배 교수의 구약이야기 (271) - 구약성경과 선교이야기 (83)

박신배 교수 / 연세대 구약학 박사, 현 강서대 교수, 창조문학 편집위원, 한국 평화학회 전 부회장, 한국 구약학회 전 부회장, 강서대 전 총장
박신배 교수 / 연세대 구약학 박사, 현 강서대 교수, 창조문학 편집위원, 한국 평화학회 전 부회장, 한국 구약학회 전 부회장, 강서대 전 총장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27:1).

세상은 다시 폭염주의와 더불어 여름 휴가철 대유행 경보가 발표되고 있다. 코로나19 전염병이 2주째 갑절로 늘어나고(더블링) 빠르게 확산되고 있어서, 한 달 뒤 하루 25만 명으로 늘어날 전망을 하고 있다. 이러한 재앙의 반복이 일어나는 때에 우리는 주위 사람들과 함께 탄식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 영적으로 힘든 원수와 대적자의 공격이 있고 군대가 대적하여 서는 상태가 있게 된다. “악인들이 내 살(베사리)을 먹으려고 내게로 왔으나 나의 대적들, 나의 원수들인(오예바이) 그들은 실족하여 넘어졌도다 군대(타하네)가 나를 대적하여 진 칠지라도 내 마음이 두렵지 아니하며(로 위라) 전쟁이 일어나 나를 치려할지라도 나는 여전히 태연하리로다(보테아흐, 확신이 있다)”(27:2-3).

시편은 탄식시편과 감사 시편으로 크게 나눌 수 있는데, 이 시편은 다시 개인 탄식시(I-Form)와 공동체 탄식시(We-Form), 또 개인 감사시와 공동체 감사시로 나뉜다. 시편 27편은 확신의 시편으로서 개인 탄식시(I-Form)안에서 민족(국가)시편 사이에 발견된다. 이스라엘 왕으로서 야웨 즉위시의 아들로서 나타나며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사이의 친밀한 관계나 영원한 다윗과 그의 후손에 대한 신실한 약속에 의지할 수 있다. 시편 27편은 시편 40편과 더불어 찬양의 감사 이전에 시편의 기도자가 특히 뜨거운 개인의 확신을 가진 것을 두드러지게 볼 수 있다.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샤알티)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콜 예메 하야이)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쉬브티) 여호와의 아름다움을(베노암)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베헤칼로) 사모하는(레바퀘르) 그것이라”(27:4). 이 사모하는 것은 축제 희생제사와 연관되어 의식적 행사와 관련있다(모빙켈). “여호와께서 환난 날에(베욤 라아) 나를 그의 초막 속에(베숙코) 비밀히 지키시고 그의 장막(오홀로) 은밀한 곳에(베세테르) 나를 숨기시며 높은 바위 위에(베쭈르) 두시리로다”(5).

개인 탄식시 안에 공동체 탄식시로서 시편 27편은 성전시이다. 이 시는 여호와 신앙 안에서 하나님의 현현(顯現)이 성전에서 개인적인 체험으로 축제(절기)때에 나타난다. 이는 영적인 은혜의 체험이며 여호와 하나님의 자비로운 나타나심으로 축제의 기쁨으로 나타난다. “이제 내 머리가 나를 둘러싼 내 원수 위에 들리리니 내가 그의 장막에서(베오홀로) 즐거운 제사를(지브헤 테루아) 드리겠고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아자메라)”(6). “주의 얼굴을(파네이카) 내게서 숨기지 마시고 주의 종을 노하여(베아프) 버리지 마소서 주는 나의 도움이 되셨나이다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시여(엘로헤 이쉬에) 나를 버리지 마시고 떠나지 마소서”(9). 이러한 환난의 때, 대적이 군대처럼 진을 치고 위협을 하는 때에 우리는 강한 확신을 가지고 주께 나갈 수 있다. “너는 여호와를 기다릴지어다(콰웨) 강하고(하자크) 담대하며(야아메츠 리베카) 여호와를 기다릴지어다”(14). 한국의 초기 선교사들은 이러한 담대한 신앙으로 환난과 핍박을 이겨냈던 선구자였다.

유진벨 선교사 가족은 전라도 지역에 복음의 초석을 놓았다. 벨 선교사 부부는 1895년 남장로교 선교사로 한국에 들어와서 1892년 파견된 7인의 선교사에 이어 두 번째로 한국에 들어온 미 남장로교 선교사였다. 벨 선교사 부부는 1897년 전남 나주에서 첫 사역을 시작하였다. 18985월 목포 최초의 개신교회인 양동 교회를 설립하였고 전라도 지역에서 교육과 의료 사역을 중심으로 선교하였고, 목포 영흥학교, 광주 기독병원, 수피아 여고, 숭일학교 등을 설립하였다. 또 광주 제일교회, 양림동 교회 등 10여개 교회를 개척하며 전라도 사역의 선교 초석을 놓았다. 유진 벨(배유지, 1868-1925) 선교사는 1901년 아내 로테 벨 선교사를 병으로 잃고 1919년 재혼한 아내 마가렛 선교사마저 그 해에 교통사로 잃고 큰 아픔을 당하지만 선교의 끈을 놓지 않고 소천할 때 까지 선교 사명을 감당한다. 벨 선교사의 선교 사역은 후손들이 계승하여 큰 딸과 그의 남편 윌리암 린튼이 1940년까지 부부 선교사로 일하다가 추방당한 후에 해방 후에 다시 돌아와 1960년까지 선교를 하였다. 그 후에 샬롯 벨과 린튼의 아들 휴 린튼과 드와이트 린튼도 한국에서 사역을 하였다.

▶왼쪽 위 : 유진벨선교사와 첫 번 째 부인 로티 위더스픈(1867-1901)과 자녀 헨리와 샬롯벨▶왼쪽 아래 : 유진 벨 선교사 딸 샬롯 벨의 남편 윌리엄 린튼 (유진벨 선교사와 함께)▶오른 쪽 : 린튼 가문과 한국 활동
▶왼쪽 위 : 유진벨선교사와 첫 번 째 부인 로티 위더스픈(1867-1901)과 자녀 헨리와 샬롯벨▶왼쪽 아래 : 유진 벨 선교사 딸 샬롯 벨의 남편 윌리엄 린튼 (유진벨 선교사와 함께)▶오른 쪽 : 린튼 가문과 한국 활동

양화진에는 유진벨이 아내 로테 벨이 최초의 남장로교의 선교사로 묻혀있다. 5대손이 126년간의 선교를 하며 한국 선교의 대를 이어 봉사한 신앙의 명문가문이다. 독립 유공자 후손으로 귀화한 데이비드 린튼(인대위) 변호사는 학교와 병원을 설립한 유진벨(1), 만세 시위운동을 지도한 윌리암 린튼(2), 미해군 대위로 인천 상륙작전에 참전한 휴 린튼(3), 한국형 엠블러스를 개발한 존 린튼 에이어(4)를 뒤이어 린튼가의 5대손이다. 한 나라를 사랑하고 한 민족을 사랑한다는 것은 이 린튼가의 갈릴리 사랑을 말하는 것이리라.

관련기사

저작권자 © 본헤럴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