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데믹 코로나 19 전염병이 곧 잦아들 것 같다. 미국에서는 백신이 생산되어 어제부터 시민들에게 보급되어서 시민들이 주사를 맡는 장면이 방영되었다. 각 나라마다 예산을 확보하여 백신 예방 접종을 할 계획을 가지고 있다. 우리나라도 4400만 명의 시민들에게 백신을 확보하고 접종하려는 계획을 가진 것을 보았다. 현재까지 1년의 전염병 파급 후유증은 심각한 결과를 가져오고 있다. 교회 예산은 급격이 줄어들었고 자영업자들은 심각한 경영난에 빠지게 되어서 재난 지원금을 간절히 기대하는 상태가 되었다. 대학은 10만 명의 학생 부족으로 인해 여러 대학이 경영난이 심각한 상태가 되고 있다. 이러한 때에 욥기는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주고 있다.
“볼지어다 하나님께 징계받는 자에게는 복이 있나니 그런즉 너는 전능자의 징계를 업신여기지 말지니라”(욥 5:17). 과연 이 말씀이 우리에게 그대로 반영될 수 있고 우리의 믿음의 고백이 될 수 있을까? 전 세계가 고통을 받고 있고 우리나라가 또 고난의 현장의 한 복판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이 고통은 나의 문제와 이웃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고난의 문제가 여러 가지 원인으로 일어날 수 있지만 주님이 받으신 고난은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구속사적 고난이었다. 예수는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 유대 지도자와 로마 정부로부터 받은 조롱과 매 맞음과 고난은 컸다. 이는 상상을 초월하는 큰 고통이었다. 그 고통은 절정에 달했다. 그래서 예수는 마지막 십자가에 달리셔서 가상칠언(架上七言)을 하신다. 마지막 말은 ‘엘리엘리 라마 사닥다니’였다. 이 말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뜻이다(마태 27:46). 마지막 하신 이 말씀은 인간의 마지막 고통의 끝을 다 받으신 것을 보여준다. 주님이 끝까지 고난을 받으시며, 우리의 고통에도 동참하시며 함께 하신다는 의미일 것이다. 오늘의 고난의 현장에서 주님은 우리에 앞서서 그 고통을 받으셨던 것이다. 그래서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우리도 꿋꿋이 감내하며 주님의 섭리를 생각하며 선교현장으로 나가야 한다. 오늘날 선교사들도 이 펜데믹 상황에서 선교후원금이 줄어들어서 당하는 그 고난은 심각하다. 이 고난은 주님의 절규와 같은 소리와 유사하다. 그래서 이 절규를 외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초기 한국 선교사들도 이러한 욥의 고난과 같은 엄청난 고난을 당하며 우리 민족의 한(恨)의 역사 속에서 그들이 몸소 담당하며 한국의 근대사 속에 함께 하였다. 선교사 셔우드 홀은 해주에서 1927년 조선 최초의 결핵 요양소를 세우게 된다(닥터 홀의 조선 회상 책).
이 결핵요양소는 보배라는 이름의 한 상인의 13살 막내딸이 결혼을 앞두고 결핵으로 죽게 되자 이 소녀가 쓰러진 진달래꽃 언덕 위에 셔우드 홀이 조선 최초의 결핵 요양소를 세운 것이다. 당시 조선은 5명 중 한 명이 전염병 결핵으로 죽던 시절이었다.
셔우드 홀은 최초의 목사가 된 김창식의 아들, 김영진 의사와 같이 의료 활동을 한다. 그들은 핍박자 김영호와 그 가족 식구를 극적으로 간호해서 폐결핵에서 낫게 했다. 이 기적적인 치료를 통해 큰 후원을 받게 된다. 핍박하던 그들이 해주 의료 선교에 큰 후원자가 된 것이다. 1928년 4월 13일 결핵환자 위생학교 기공식은 이 핍박자의 변화와 그 기적적인 치유를 통해 이뤄진 것이었다. 고난과 핍박은 새 생명을 구원으로 이어지는 과정이 된다. 선교하며 당하는 고난과 핍박은 생명의 역사를 새롭게 일으키는 원동력이 되었던 것을 알게 된다. 셔우도 홀 선교사와 이 2대 가족은 이 의료선교를 통해 한국 복음화를 이루게 한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로마서 8: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