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사자: 욥이 받은 환란과 또한 그가 보여준 극기와 인내의 신앙에서 큰 은혜를 받고 미국 뉴져지 주 케이프 메이 태생의 청교도 후예인 에드가 페이지 스타이츠(E.P.Stites;1836-1921) 목사가 1876년 작사하였다. 남북전쟁 때에는 군에 입대하여 복무하였으며 제대 후 델라웨어강(Delaware River)에서 뱃사공의 일도 하였다. 후에 메이 감리교회 목사가 되어 60년 동안 목회를 하면서 감리교 선교 기관인 오션 그로브(Ocean Grove)의 정회원으로 활동했다.
작곡자: 미국 펜실베니아 주 에든버러(Edinburg) 출생으로 미국 남북전쟁 때 군종실에서 군목과 함께 찬송을 인도하다가 전쟁 후 YMCA에서 일하며 성악가로 활동하다가 부흥사 무디를 만나서 무디 전도단의 핵심 멤버로 찬송을 통해 성도들의 영적 부흥에 크게 기여한 아이라 데이빗 생키(I.D.Sankey;1840-1908)가 1876년 작곡하였다.
생키는 이 찬송 작곡의 배경을 이렇게 술회하였다. 『어느 목사가 나에게 이런 편지를 보내왔다. ― 재작년 어느 날 중한 병을 앓고 있는 한 여인이 육체적인 고통과 정신적인 좌절감으로 고생하다가 나를 찾아와 이렇게 말하였다. “목사님, 제게는 희망이 없습니다. 앞이 안 보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물었다. “당신이 하나님의 손안에 있음을 믿습니까?” “아뇨, 나를 돌볼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저는 외톨이에요.” 나는 그에게 찬송을 읽어주었다. “어려운 일 당할 때 나의 믿음 적으나, 의지하는 내 주를 더욱 의지합니다. 세월 지나갈수록 의지할 것뿐일세. 무슨 일을 만나도 예수 의지합니다.” 1절이 끝나자 그 여인이 말했다. “목사님, 주님을 의지합니다. 주님을 믿습니다.” 나는 그와 함께 찬송을 계속 불렀습니다. 찬송을 부르는 그 여인의 모습에는 기쁨이 넘쳐 보였다. 여인은 고통 속에서도 계속 이 찬송을 부르다가 세상을 떠났다. 의지하는 주님에게로….』 위 찬송 가사가 실린 신문스크랩이 1876년 무디 목사에게 전해졌다. 무디는 스크랩을 생키에게 건네주면서 작곡을 하라고 요청했다. 나는 무디 목사에게 교리적인 문제를 손보아 달라고 하였고 마침내 작곡을 완성하였다.
1절 어려운 일 당할 때 나의 믿음 적으나 의지하는 내 주를 더욱 의지합니다
세월 지나갈수록 의지할 것뿐일세. 무슨 일을 당해도 예수 의지합니다.
찬송가 543장 1절은 “어려운 일 당할수록 눈동자처럼 지키시고 돌보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의지하며 살아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어려운 일 당할 때 지켜야 할 것은 그 무엇보다 예수 신앙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그 어떤 어려움에서도 건져 주시며 인생에도 복을 주십니다.
다니엘서에는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던 다니엘과 세 친구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특별히 1장 8절에 다니엘은 환관장에게 나아가 “왕의 음식과 그가 마시는 포도주로 우리를 더럽히지 아니하게 해 주십시오!”며 청원을 하였습니다. 여러분 생각해보십시오! 왕이 특별히 배려해서 내린 음식을 향하여 “더럽히지 아니하게” 해달라고 말하고 있으니 얼마나 기가 막힌 일입니까? 환관장은 처음 자신의 귀를 의심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계속해서 강력하게 어필하는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를 보면서 “이런 막말과 행동을 하는 종교가 세상 어디에 있단 말인가? 이건 정말 고약한 종교이네!” 하면서 분노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환관장은 참으로 어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들을 조용히 타이르며 달랩니다. “애들아 나는 너희가 하고 싶은 대로 해주고 싶구나. 그러나 나는 왕의 신하다. 나는 왕이 두렵다. 왕께서 너희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지정하여 주신 것인데 너희 얼굴이 초췌하여 또래들만 못하게 되면 너희 때문에 내가 책임추궁을 당하게 될 것이고 내 목이 위태로워질까 염려가 된다”(10절). 다니엘과 세 친구는 자신들의 음식거절로 환관장이 죄없이 어려움 당하는 것만 처리하면 되겠구나 생각을 하고 환관장 밑에서 자신들을 감독하는 관리자에게 다시 요청했습니다. “환관장님에게 이렇게 말씀해 주십시오! 저희들에게 열흘만 말미를 주십시오. 열흘 동안 시험하여 왕의 음식을 먹은 사람들과 채식과 물만을 먹은 우리의 얼굴을 비교해 주십시오! 만일 우리의 얼굴이 또래들만 못하면 우리가 왕의 음식을 거절하지 않고 먹겠나이다.” 비록 조건부 응답이었지만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구하며 느부갓네살 왕을 섬기며 자신의 일을 묵묵히 감당하였던 4명의 얼굴이 열흘 후에 왕의 음식을 먹은 사람들과 비교하여 보니 살이 더욱 윤택하였고 아름다웠습니다. 그 결과 음식에서 조차 신앙의 도를 지킬 수 있었습니다.
오늘 글로벌 경제위기를 맞이하여 서울의 명문대학과 대학원을 나와 백수로 노는 마당에 좋은 직장에 면접을 갔다가 면접관이 “자네는 일요일 날 회사에 일이 있어서 출근하라면 <나는 성도라 주일을 지켜야 하므로 직장에 나오지 않고 교회로 가겠습니다.>라고 말하겠나? 아니면 교회를 포기하고 직장에 나오겠나?”하고 물어볼 때 과연 이 시대에 몇 명의 젊은이들이 “저는 신자라 교회에 나가 주일 성수하겠습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이런 어려움을 당할 때 무엇보다 믿음을 먼저 지켜야 합니다. 어려움은 다 당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백성들의 다른 점은 어려울 때 믿음을 더욱 지킨다는 점입니다.
어려울 때 더욱
믿음을 지키는 믿음의 사람들
제가 군대에서 생활할 때 선임상사를 비롯하여 선임자들이 교회 출석하는 병사들을 중심으로 점호를 취하고 어떡해서든 꼬투리를 잡아 각종 기합과 얼차려를 통해 핍박할 때에 많은 병사가 교회 출석을 포기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런 모진 고난과 구타를 이겨냈습니다. 그런 후에 저는 혼자서도 당당하게 교회를 출석하는 특권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많은 목회자와 성도들이 이런 고난과 아픔을 믿음으로 승리해본 경험이 없다 보니 쉽게 세상과 물질과 권력에 타협하는 모습들이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다니엘이 보여준 믿음의 투쟁이 필요합니다. 시대마다 순교자가 필요합니다. 물론 피를 흘리며 생명을 잃어버리는 순교는 아니라 할지라도 적어도 직장에서 술자리에서 오락장에서 “나는 크리스천이라 술은 먹지 않습니다. 대신 음료수를 나누면서 여러분과 함께 즐거운 자리를 마련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며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그런 젊은이들이 이 시대에도 나왔으면 합니다. 바울이 고백한 것처럼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롬 14:8)고 말할 수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정녕 찾아볼 수 없는 것인지요...
찬송가 1절에 기록된 것처럼 “어려운 일 당할 때 나의 믿음 적으나 의지하는 내 주를 더욱 의지합니다. 세월 지나 갈수록 의지할 것뿐일세. 무슨 일을 당해도 예수 의지합니다.”는 작사자의 고백이 공허한 메아리가 되지 않도록 지혜로운 성도로 각자의 현장에서 그리스도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며 살아갈 수 있기를 진심으로 소망합니다.
2절 성령께서 내 마음 밝히 비춰주시니 인도하심 따라서 주만 의지합니다
세월 지나갈수록 의지할 것뿐일세. 무슨 일을 당해도 예수 의지합니다.
2절에서는 욥이 값진 고난을 통해 승리를 이루었듯이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가라는 내용입니다. 팔레스타인 동방에 ‘우스’라는 마을에 ‘욥’이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일찍이 하나님을 잘 섬기는 사람으로 순전하고 정직했습니다. 얼마나 철저하게 신앙생활을 했는가 하면 열 명의 자녀들을 위해 매년 생일 때 마다 번제를 드릴 만큼 철저했습니다.
이렇게 철저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가정에 갑자기 큰 어려움이 생겼습니다. 바로 그렇게 잘되던 사업이 갑자기 어렵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부도가 나고 말았습니다. 또한 부도의 충격에서 벗어나기도 전에 열 명의 자녀들이 건물이 무너져서 한꺼번에 죽었다는 비보를 듣게 됩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자신의 몸에 생긴 피부병은 그를 완전히 망가지게 했습니다. 요즘 유행하는 아토피 피부병 이상으로 아무리 긁어도 시원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기왓조각으로 긁어도 피만 흐를 뿐 시원함을 얻을 수가 없었습니다.
지금 욥은 너무나 가혹한 시련을 겪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나님을 믿는 사람에게 이런 가혹한 시련이 닥칠 수 있습니까? 우리가 봐도 이해가 안 되는데 곁에서 지켜보는 아내가 어떻게 이해가 되겠습니까? 그래서 그의 아내가 이렇게 말을 합니다. “당신, 이런 꼴을 하고서도 하나님을 믿을 거예요. 지금 당장 하나님을 욕하고 차라리 죽어버리세요”(욥 2:9) 어려울 때 힘이 되어야 할 아내로부터 참담한 말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욥은 그 말을 듣고도 “여보, 지금까지 잘 참아 왔잖소. 조금만 더 참으시오. 우리가 그동안 많은 복을 받았잖소. 이제 재앙을 당하는 것도 당연하지 않소”(욥 2:10)하며 끝까지 입술로 범죄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다가 보면 어려움이 많습니다. 특별히 하나님을 잘 믿는 사람에게도 어려움이 피해 가지 않습니다. 우리가 어려움을 당할 때 어떻게 하면 이 사람과 같이 입술로 범죄 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욥이라는 사람은 도대체 어떤 믿음을 가졌기에 이런 어려움 속에서도 범죄 하지 않고 이길 수가 있었을까요?
욥은 어렵고 힘든 일 가운데서 주님을 보았습니다. 주님만 의지했습니다. 주님의 뜻이 분명히 있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끝까지 입술로 범죄 하지 않았습니다. 끝까지 주님을 찬양하고 감사했습니다. 그 결과 노후에 꼭 갑절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더 큰 복을 받아 누렸습니다. 그러므로 욥의 모습처럼 그리고 작사자 에드가 페이지 스타이츠가 찬송가 2절에 권면하였듯이 “성령께서 내 맘에 밝히 비춰주시고 인도하심 따라서 주만 의지하고 나가면...” 반드시 주님으로부터 회복과 치유하심의 역사가 여러분 속에 나타날 것입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믿으며
언행에 범죄하지 않으며
3절 밝을 때에 노래와 어둘 때에 기도로 위태할 때 도움을 주께 간구합니다
세월 지나갈수록 의지할 것뿐일세. 무슨 일을 당해도 예수 의지합니다.
3절, 기쁠 때는 노래와 어둘 때와 위험할 때에는 기도함으로 도움 의지합니다.
어느 집사님이 하던 사업이 망해서 알거지가 되었습니다. 좋은 집도 날아가고 자동차도 날아갔습니다. 겨우 셋방살이로 전전하니 그 처량함이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심지어 끼니를 거를 때가 많았습니다. 추수감사절 주일이 왔습니다. 온 가족이 교회에 나갔습니다. 사실은 그날 아침도 못 먹고 교회에 간 것입니다. 추수감사절주일이라 교회에서 시루떡을 했습니다. 김이 무럭무럭 나는 먹음직스러운 시루떡이 ‘친교실’에 가득 쌓여 있었습니다. "엄마, 이 떡 봐라. 맛있겠지?" 주일 예배를 드리는데 어린 막내가 떡을 들고 와서 자랑합니다. "너 그 떡 어디서 났니?" "저쪽 방에서…" "그 떡은 예배 후에 목사님이 축복기도 하신 후에 먹는 거야. 지금은 먹을 수 없어." 엄마의 말을 듣고 막내가 뜨끈뜨끈한 떡을 들고도 못 먹습니다. "엄마, 나 지금 먹고 싶은데…" "안돼." 엄마가 야단치니 어린 아들 눈에 눈물이 글썽거립니다. "엄마, 배고파." "안 된다니까." 아이가 떡을 들고 먹지도 못하고 웁니다. 그 모습을 본 집사의 마음은 찢어지는 듯이 아팠습니다. 목사님의 축복기도가 있기까지는 떡을 먹을 수 없다는 엄마의 명령에 떡을 들고도 못 먹는 아들을 보며 어머니가 기도합니다. "주여, 저 어린 것이 얼마나 배가 고프겠습니까? 주여, 축복하셔서 언젠가 우리 집에는 떡이 가득하고 아이들이 그 위에서 춤을 추게 하소서." 몇 년 후였습니다. 이 독실한 믿음의 집사님 가정은 모든 시련을 이겨내고 다시 일어섰습니다. 정말 하나님의 도우심과 축복과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정원이 있는 좋은 장막으로 이사한 날, 목사님을 모시고 성대한 예배를 드렸습니다. 떡을 한 가마 했습니다. 떡이 얼마나 지천인지 아이들이 뛰어다니는데 떡을 밟고, 야단입니다. 어떤 아이는 떡시루 위에서 노래까지 부르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의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왜 나에게는 그런 필요를 채워 주지 않습니까?' '왜 지금 당장 채워 주지 않는 것입니까?'
하나님은 우리에게 필요를 채워 주신다고 약속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필요를 50% 혹은 90%만 채우는 것이 아닙니다. 시 37편 4절에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저가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리로다"고 했습니다. 빌립보서 4장 19절에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고 했습니다. “하늘 문을 여시고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부어주시는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말 3:10).
우리의 필요를
채우시는 하나님
세계가 다 하나님의 것입니다(출 19:5,학 2:8). 한 번 약속한 것은 일점일획도 어김없이 지키시는 속성을 가지고 계시는 분입니다(마 5:18). 하나님은 성품상 거짓말은 하지 못합니다. 성경의 약속은 시대를 초월하여 오늘에도 적용되는 약속입니다(히 13:8). 그런데도 하나님은 왜 나의 필요를 채워 주지 아니하시는 것일까요? 그것은 우리 속에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확신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14장 1절에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말씀하셨으며, 마태복음 7장 7절에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요한복음 16장 24절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마가복음 11장 24절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그러면서 마태복음 6장 33절에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어떤 어려운 문제가 와도 그 문제에 사로잡히지 말고, 그 문제보다 크신 하나님을 믿고 의지해야 합니다(빌 4:19).
작사자 에드가 페이지 스타이츠가 찬송가 3절에 권면하였듯이 “밝은 때에 노래와 어둘 때에 기도로 위태할 때 도움을 주께 간구하며 ... 아무 일을 만나도 예수님만 의지하고 나가면” 반드시 귀한 응답의 역사, 회복의 역사, 치유의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이런 놀라운 은혜가 여러분 속에 넘쳐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4절 생명 있을 동안에 예수 의지합니다. 천국 올라가도록 의지할 것뿐일세.
세월 지나갈수록 의지할 것 뿐일세. 무슨 일을 당해도 예수 의지합니다.
많은 사람이 내일의 희망을 이야기합니다. 사람들이 세상에서 찾아내는 희망은 어떤 것들입니까? 세상의 물질, 세상의 권세, 세상의 인맥 그런 것들입니다. 물론 그런 것들이 살아가는 데 필요하죠. 하지만 그런 것들이 영원히 우리 인생을 보장해주는 것은 아닙니다. 만일 그런 것에 모든 희망을 걸면 언젠가 실망하게 됩니다.
다윗을 보세요! 누구에게 배반을 당했나요? 친아들입니다. 그리고 평소에 충신으로 행동했던 신하들과 백성들입니다. 그토록 대단해 보이던 왕권도 그 많던 재산도 위기 상황이 닥치니까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자신을 지탱해주고 붙잡아 줄 수 없었습니다. 이것을 깨달은 다윗은 시 118편 8~9절에 “여호와께 피하는 것이 사람을 신뢰하는 것보다 나으며 여호와께 피하는 것이 고관들을 신뢰하는 것보다 낫도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외에 인간의 미래를 보장해 줄 수 있는 존재는 아무것도,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씀합니다. 잠언 23장 5절 “네가 어찌 허무한 것에 주목하겠느냐 정녕히 재물은 스스로 날개를 내어 하늘을 나는 독수리처럼 날아가리라” 물질이 영원히 내 인생을 지켜주지 못한다는 겁니다. 마치 날개 달린 독수리처럼 있는가 싶었는데 잠시 후에 보면 다 사라지고 만다는 겁니다(고전 7:31). 그러니 이런 물질에 희망을 걸면 종내에는 실망하게 되고 맙니다.
세상은 실로 장망성(將亡城 City of Destruction)입니다. 장망성이란 말은 청교도 작가인 존 번연의 「천로역정」에 나오는 표현입니다. 장차 망할 세상이란 뜻입니다. 그런데도 당장 눈에 보이는 게 세상이니까 많은 사람이 세상 것에 희망을 겁니다. 혹시나 하는 막연한 기대를 가집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근거 없는 희망이요 실체 없는 희망입니다. 그래서 흔히 인생은 속아서 사는 것이라 말이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우리가 기댈 수 있는 희망은 과연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영원하신 하나님, 항상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께 있습니다. 하나님만이 유일하고 완전한 희망입니다.
다윗은 자신이 처한 참담한 상황 속에서 목숨조차 위태로운 상황 속에서 이렇게 부르짖으며 고백합니다. 시 71편 5-6절 “주 여호와여 주는 나의 소망(my hope)이시요 내가 어릴 때부터 신뢰한 이시라 내가 모태에서부터 주의 붙드신 바 되었으며 내 어미 배에서 주의 취하여 내신 바 되었사오니 나는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 오직 하나님만이 희망이라는 겁니다. 어려서부터 믿었지만 정말 그렇다는 사실을 새삼 절감했다는 고백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역시 우리의 희망입니다. 디모데전서 1장 1절에 보면 바울도 동일한 고백을 합니다. “우리 구주 하나님과 우리의 소망(our hope)이신 그리스도 예수” 예수님이 우리의 희망, 나의 희망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즐겨 부르는 복음송 중에 이런 곡이 있습니다.
“하나님 한 번도 나를 실망시키신 적 없으시고, 언제나 공평과 은혜로 나를 지키셨네. 오, 신실하신 주! 오, 신실하신 주! 내 너를 떠나지도 않으리라. 내 너를 버리지도 않으리라. 약속하셨던 주님. 그 약속을 지키사 이후로도 영원토록 나를 지키시리라 확신하네.”
그렇습니다! 세상은 때때로 우리를 실망하게 하고 속이지만 하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항상 내 곁에서 나를 지켜주시고 도와주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에게 희망이 됩니다. 아무리 어려운 상황이 와도, 그럴 때 사람들은 다 나를 외면하고 떠나갈 수 있지만 하나님은 나와 함께 하십니다. 심지어 죽음이 닥쳐와도 나를 영원한 천국으로 인도하시고 영원히 나와 함께 해 주십니다. 성도는 죽어도 천국입니다.
그러므로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우리가 힘써 해야 할 일은 시 56편 4절에 기록되어 있듯이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 말씀을 찬송 하올찌라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였은즉 두려워 아니하리니 혈육 있는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이까” 또한 오늘 본문 시 37편 5-6절에 있듯이 “나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는 것입니다. 저를 의지하며” 나가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저가 이루시고 네 의를 빛 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같이 하시기 때문입니다.”
※ 말씀 관주
1절
어려움 중에 주의지 *시 50:15,56:4,71:5-6,115:9,벧후 1:3,10-11
믿음이 적은 자 *마 6:30-31,8:26,14:31,눅 12:28
2절
성령께서 인도하심 *요 16:13,행 16:6-10,롬 8:27,갈 5:18
3절
밝은 때에 노래 *시 71:23,86:12,눅 19:37,골 3:16-17
어두울 때에 기도 *스 9:5-6,시 107:28,행 16:25,빌 4:6
위태할 때 간구 *시 56:9-10,102:2,마 6:6,막 14:32-36
4절
생명 있을 동안 주의지 *시 71:5,9,18,115:11,잠 3:5,28:25
천국 갈 때까지 주의지 *시 52:7-9,마 11:28-30,벧후 1:10-11
▶관련 찬송
내가 늘 의지하는 예수 86장
예수가 함께 계시니 325장
주 안에 있는 나에게 370장
눈을 들어 산을 보니 383장
주와 같이 길 가는 것 430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