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윗은 사울왕의 시기와 질투으로 인해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도망쳤다. 사울왕을 피해 광야를 방황하는 떠돌이 신세가 된다. 사울왕은 포기하지 않고 다윗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군사를 데리가서 다윗을 죽이려고 했다. 그때마다 다윗은 사울왕을 죽일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있지만 자신의 힘을 사용하지 않았다. 오히려 하나님으로부터 기름부음 받은 종의 옷자락을 베었음을 회개했다. 삼상26장에 보면 다윗이 하갈라 산에 숨어 있었다. 다윗을 죽이려고 사울은 3천명의 군사를 이끌고 진을 쳤다. 그 밤에 하나님이 모든 군사들을 다 잠들게 하셨다. 다윗은 진지 가운데서 잠하고 있는 사울의 창과 물병만 가지고 왔다. 다윗은 한방에 사울왕의 숨통을 끊고 이스라엘의 왕이 되는 절호의 찬스였다. 그 기회를 포기했다. 그리고 ‘여호와의 기름부음을 받는자를 치면 죄가 없겠느냐“, 사울왕의 생명을 여호와 하나님께 맡겼다.
간밤에 있었던 사실을 사울왕이 알고 다윗에게 “내가 범죄하였다...내가 어리석은 일을 하였다”(삼상26:21)고 고백했다.
다윗을 죽이려고 3천명의 군사를 이끌고 온 사울왕의 입에서 나온 말이다. 다윗의 모습에서 기독인의 진정성이 담겨져 있다. 신실한 삶을 끝까지 포기하지 말라. 그러면 반전의 감동이 있다. 이것이 기독인다운 삶이다.
오늘날 목회자나 현대 그리스도인들이 많이 잃어가고 있는 신앙의 가치가 있다. 신실함이다. 신실함을 잃어 가면 평가절하 받는다. 이것이 한국교회가 많은 일을 하고 세상으로부터 대접받지 못하는 경우에 해당된다.
그리고 우리들은 고민을 한다. 교회가 얼마나 유익하고, 국가가 못하는 사각지대에 있는 분들을 섬기고 헌신하는데 우리사회가 확증편향이 강해서 그렇다고 무시해버린다. 이것도 일리가 있다. 그럼에도불구하고 교회는 끝까지 자신의 위치를 지켜야하고 지켜내야 한다.
도대체 기독인다운 삶이란 무엇인가? 한마디로 요약하면 다윗처럼 사는 것이다.
(1)끝까지 신실한 마음을 유지하라_겉과속이 같은 한결같음이 성숙함이다.
나를 해치고자하는 사람들, 나를 향해 돌팔매질을 하는 사람들을 향해 한결같은 마음을 가지라. 그러면 반전의 감동을 경험한다.
하나님앞에서 신실하고 사람앞에서 신실하고 교회앞에서 신실하라. 신실함은 믿는자들이 평생지켜야할 거룩한 가치이다. 신실함은 곧 성숙함이다. 예수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성장하는 사람은 한결 같이 신실하다.
교회를 섬길 때 신실하게 하라. 신실함은 마음을 다해서 한결같이 정직하게 행동하고 말한다는 뜻이다. 신실함은 일구이언하지 않는다. 신실함은 속과 겉이 일치한다는 말이다. 환경에 따라 생각과 말이 달라지는 카멜레온이 아니라 언제나 항상 동일하다는 말이다.
(2)성령으로 시작했다가 육체로 마치지 말라. 가장 어리석은 사람이다.
왜 거룩하게 시작했다가 육체로 마무리하는가? 하늘나라보다는 이땅에 가치를 두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내 마음에 주님의 공간이 작아져버렸기 때문이다. 내 마음의 공간에 날마다 주님을 사랑하고 경외하는 믿음의 공간을 키우라. 그러면 육체로 마치지 않는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믿음생활을 시작했다면 끝까지 믿음생활을 지키라. 손해가 나도 이것이 주님의 나라를 세우기 위한 길이라면 손해를 감수하더라도 믿음을 지켜라. 중간에 포기하면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된다. 후회만 남는 인생으로 전락한다.
(3)예배생활을 성실하게 하라_예배인도자가 되지말고 예배자로 서라
모이는 예배가 있고 흩어지는 예배가 있다. 모이는 예배는 주일예배 교회공예배이다. 공예배에 ‘예배인도자’가 되지 말고, 먼저 ‘예배자’가 되라.
예배인도자는 누구인가? 자기가 맡은 것만 예배 중 최선을 다하고 자기 순서가 끝나면 예배를 드리지 않는다. 생각도 출장가 버렸다. 예배자가 되라.
하나님은 예배자가 아니라 예배인도자로 자기 순서만 하고 나면 딴생각하고 자리를 이탈하고 예배드리는 모습이 흐트러져 있는 성도들에게 복을 주시겠는가? 그들을 통해서 어떤 은혜를 성도들이 받겠는가? 예배생활을 성실하게 하라. 예배인도자가 되기 전에 예배자가 되라.
흩어지는 예배를 성실하게 하라. 일터와 가정은 예배의 공간이다.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거룩한 공간이다. 일터가 단순한 밥벌이 공간만으로만 활용한다면 하나님 나라를 세우기 어렵다. 일터를 하나님이 마음껏 쓰실 수 있도록 내어드리고 헌신하라. 일터가 곧 예배의 거룩한 처소이다. 가정이 예배의 처소이다. 예배를 드리면 그 공간은 단순한 일터 공간이 아니라 하나님이 지배하시는 거룩한 성소이다. 그 성소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다. 나는 그분의 자녀이다. 예배에 신실함을 회복하라
(4)헌금생활 철저하라_축복의 씨앗을 심어라
지갑을 지배하는 자가 하나님 나라에 크게 쓰임 받는다. 물질도 지배하지 못하면서 물질의 노예가 되어 질질 끌려가는 성도들에게 하나님이 큰 비즈니스를 맡기지 않는다.
큰 부자가 되려면 물질에 청지기 정신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것은 구분하고 살라. 그리고 이웃을 위해 함께 나누며 살라. 하나님이 주신 축복의 씨앗을 다 먹어버리지 말라.
하나님이 주신 물질을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가가? 그 사람의 삶의 질이다.
주신 물질을 가지고 첫째로 가정생활을 하는데 사용해야 한다. 생계유지, 자녀양욱, 미래를 위한 저축, 보험, 교육 등으로 규격있게 사용하라
그리고 축복의 씨앗을 저축하라. 축복의 씨앗은 십일조, 이웃을 위한 도네이션이다. 축복의 씨앗도 모두 먹어버리면 복을 받을 수 없다. 어떤 농부도 춘궁기가 왔다고 해서 봄에 뿌릴 씨앗을 다 먹어치는 농부는 없다. 씨앗은 가을에 가장 좋은 것을 선별하여 보관하여 이듬해 봄에 파종한다. 하나님이 주신 축복의 씨앗까지 다 먹어 치우는 어리석은 성도가 되지 말라. 그러면 미래가 없다. 하나님이 하늘 문을 열어주셔야지만 재물도 넉넉하게 유지되고 쌓여 가는 것이다.
(5)말을 줄이고 어디서든 섬기는 일에 앞장서라_영향력이 생긴다
기독인들이 말을 줄이고 몸으로 섬기는 일을 더 먼저 하라. 그러면 기독인답다는 거룩한 칭호를 받는다. 말씀을 삶으로 살아내라. 앵무새가 되지 말라. 많은 정보 공해속에서 현대인들은 말에 지쳐있다. 말은 줄이고 한마디 말씀이라도 삶으로 몸으로 증명해내라. 자신이 한 말은 반드시 지켜라.
대접받는 자리만 좋아하면 그 사람은 곧 사람들로부터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고 따돌림을 당한다. 대접받는 곳만 따라다니면 지도자가 되기는 아예 틀렸다. 거꾸로 대접하고 섬기는 일에 앞장서라. 인생의 영향력이 점점 더 깊어지고 넓어진다.
(6)떠돌이 신앙생활을 중단하라_깊이 우물을 파라
떠돌이는 떠돌이뿐이다. 한곳에서 깊이 우물을 파라. 대가를 지불하지 않는 곳에서는 내 자리가 없다. 현대신앙인들이 3무가 있다. 내교회가 없다. 내목사가 없다. 내성경이 없다. 한마디로 소속을 싫어하고 깊이 빠지는 신앙생활을 거부한다.
이런 모습으로 세상 단체에서 활동한다면 아무도 그를 주목하지 않는다. 모든 공동체에서 따돌림을 당하고 존재감이 없는 사람으로 취급받는다.
내가 땀을 흘리고 눈물을 흘리고 시간을 드리고 헌신을 받칠 때 그 삶의 자리에서 축복의 통로 역할을 하게 되고 소중한 사람으로 기억되며 자리가 주어지는 것이다.
이런 사실을 다 알고 있다. 그런데 교회 신앙생활을 하면서는 적용을 하지 않는다. 결국에는 두 길 밖에 없다. 하나의 길은 교회를 떠돌다가 잊혀지는 존재로 살다가 혼자 이 땅을 떠난다. 또 한길은 존경받는 사람으로 영적 영향을 후세에게 남기며 모든 사람들이 축복하는 가운데 주님나라에 입성한다.
나이 60정도 살아보니 별거 없다. 오십보백보 차이다. 모든 교회는 다 소중하다. 소중하게 여기지 않는 현대인들의 세상적 가치가 문제이다. 목사도 마찬가지이다. 제법 안정된 교회, 편안한 교회만 좋아한다. 은퇴를 하면서 알게 된다. 큰 것이 다 내 것이 아니였다는 것을 아는데 그리 오래 걸리지 않는다. 그때 생각한다. 진짜 살아있는 교회 공동체를 세웠어야하는데 후회하지만 이미 기차는 멀리 떠났다.
목사든 성도이든 교회에 소속감을 가져라. 나에게 삶의 자리로 주신 영적 공동체를 세상의 가치로 평가하지 말라. 소중하게 여기라 그리고 그 곳에서 신실하게 땀을 흘려라. 그러면 하나님의 인생을 책임져주시고 피할 길을 주시고 하늘의 문을 열어주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