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은 사람이 변화되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나를 포함한 이야기다, 또한 이것은 구원을 받은 그리스도인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문제다.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삶을 변화시키는 것은 창세기 3장 이후에 계속 반복되는 성경의 핵심 주제다. 문제는 죄를 지은 인간의 강퍅함이 더해지면서 인간의 변화가 결코 쉽지 않다는데 우리의 딜레마가 있다. 선지자들이 그렇게 회개와 변화를 외쳐도 돌아오지 않고 제 갈길로 가는 인간의 모습을 성경을 통해서 수없이 본다. 그래서 혹자는 인간은 거의 변화되기 어렵다고 말한다.
이런 소리를 들으면 목회자들에게는 절망감이 다가 온다. 듣지 않아도. 비록 당장 변화되지 않아도 계속 외쳐야 하는 것이 우리의 일이다. 그것은 사람은 할 수 없지만 하나님은 할 수 있음을 믿기에......
사람의 변화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다. 이것을 잘못 오해하여 자칫 인간의 의무를 포기하고 하나님의 소관이라 맡기고 인간은 손을 놓을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악함이요 무지에서 오는 게으름이다. 하나님이 하실 줄 믿고 인내를 갖고 실천하는 사람을 통하여 하나님은 자신의 일을 이루신다. 말씀으로 변화될 줄 믿고 전하는 한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은 변화를 이루신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이스라엘 백성은 유월절과 출애굽의 구원을 경험하고 만나와 메추라기와 광야에서 물을 먹는 체험을 했음에도 여전히 강퍅한 인간의 모습을 본다. 그런 이스라엘 백성을 변화시키기 위해서 제시한 변화 매뉴얼은 시내산에서 제시한 율법과 성막이다. 성막은 지성소-성소-지성소의 과정을 거쳐서 하나님을 만나는 구조로 되었다. 이것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손수 알려주신 사람의 변화의 방법의 모델이다. 그런데 구약에서 제시된 이 성막 모델은 그리스도를 통해 완성되었기에 이것을 필자는 재해석해서 지성소-성소-뜰로 순서를 거꾸로 적용했다. 뜰-성소-지성소는 구약의 율법을 지키는 과정으로 대제사장만 지성소에 들어가는 자기를 죽이는 먼 여정길이지만 지성소-성소-뜰은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께서 모든 것을 이루신 십자가의 모델로 적용한 것이다.
그리스도를 통해 완성된
지성소-성소-뜰의 과정
이미 구원 받은 우리는 지성소가 성령으로 우리 중심에 들어와 있다. 구원의 확신과 의미를 얼마나 아느냐가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는 동인이 된다. 나의 노력으로 지성소에 이르는 것이 아닌 이제는 이미 지성소 되신 주님이 내안에 계심으로 그분을 믿음으로 실천이 가능하게 되었다. 모든 삶의 변화의 힘은 내안에 있는 예수님과 성령님이시다. 얼마나 그분에게 집중하느냐가 우리의 삶의 변화가 결정된다. 물론 여기서 나는 이미 십자가에서 주님과 함께 죽은 존재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고 오직 내안에 계신 성령님이 행하는 대로 따라가면 된다. 내가 할 수 있는 길은 순종하는 일이다. 그러면 그분이 나를 통하여 하나님의 일을 이루신다.
하나님을 향해 “왜?”를 질문하라
1517년 루터가 로마교황에게 제시한 95개조 항목은 지금 로마교황청이 행하고 있는 베드로 성장 건축공사와 그것을 위해 생각해 낸 면죄부와 그것을 위해 설득하는 설교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을 제시한 것이다. 왜 그렇게 해야 하는가? 에 대한 것을 공개 토론하자는 것이 루터의 제안이다. 그러나 로마 교황은 그것을 거부했다. 로마 교회가 타락의 이유는 ‘왜?’ 에 대한 질문이 없었다. 모든 것은 “왜” 에서 출발해야 하는데 그들은 자기 욕심에서 출발했다. 그러니 겨우 생각해 낸 방법도 세상을 닮을 수밖에 없다. 이것은 지금도 우리에게도 계속 되고 있는 문제이지만..
중요한 핵심은 ‘왜?’가 없으면 방법도 없다는 점이다. 설사 그럴싸한 내용과 방법을 제시한다고 해도 ‘왜?’ 에서 나오지 않는 것은 갈수록 위험하다. ‘왜?’ 질문에는 인간의 숨은 동기와 목적을 파헤치는 작업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에 집중하는데 있다.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왜 하필 제가 십자가를 져야 합니까?” 의 질문으로 밤을 지새우고 답을 얻어 담대하게 “일어나자 함께 가자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다”고 말씀하시면서 홀로 십자가의 길을 가신 것처럼 우리도 겟세마네 기도에서 “왜” 에 대한 질문을 심각하게 던지면서 거기서 문제 해결을 찾아야 한다.
하나님을 향해 “왜?” 라는
질문을 하라
필자는 이런 측면에서 지금 우리가 당연시 생각하고 있는 신앙과 교회의 이야기의 근원적인 질문을 던지면서 거기서 해결 방안을 찾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 생각한다. 그것은 맨 처음으로 돌아가는 것이요 결국은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것이다, 모든 문제의 답은 이미 그리스도 안에 있는데 우리가 본질을 보지 못하고 잘못된 방향으로 나가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대한 깊은 질문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핵심은 우리에게서가 아닌 하나님에게서 출발하자는 뜻이다. 이것이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이다.
가장 변화되기 어려운 사람의 특징은 “왜?“ 라는 질문을 하지 않는다. 하나님에 대한 질문이 없고 오직 기존의 자기 방식대로 고집한다. 이런 사람이 가장 위험한 사람이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신앙의 전반을 ”왜?“ 라는 질문으로 다시 던져 볼 때 갱신이 일어난다. 그러면 주님이 그것에 대한 답을 해주실 것이다.
이것을 설교와 가르침에서 필자가 제시한 변화의 시스템을 적용하면 좋으리라 본다. <왜(지성소)-무엇을(성소)-어떻게(뜰)>로 질문을 던지면서 그것을 생각해 보고 답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찾아가는 시간이 된다면 한국교회와 가정과 개인의 삶이 많이 달라질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요한계시록 2:4-5)
오직 말씀만이 사람을 변화 시킨다.
“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너는 네가 누구에게서 배운 것을 알며 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 (딤후 3:14-17)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된 영적인 책이다. 일반 책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하지만 성경책을 대하면 지루하다는 이야기를 많이 듣는다. 당연히 책으로만 보면 어려운 책이고 재미가 없을 수 있다. 특히 종교를 가지지 않는 사람에게는 모르는 단어가 너무 많다. 읽어도 무슨 뜻인지 알 수 없다. 영이 죽은 상태에서는 성경은 읽어도 무슨 뜻인지 알 수 없다. 하지만 성령을 받고 성경을 읽으면 성경보다 재미있고 감동적인 책이 없다. 한글을 깨우치지 못한 할머니가 성경을 즐겁게 읽는 것을 본적이 있다. 무식한 할머니지만 시간만 나면 성경을 읽고 시간을 보낸다. 그리고 은혜를 받는다. 하지만 세상 학문을 많이 공부한 박사는 할머니 보다 성경을 어려워한다. 왜 그럴까? 그것은 성령을 받지 못한 상태로 성경을 읽다 보니 오히려 걸림돌이 되고 모순을 느끼게 된다.
성경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다. 성경은 예수를 만나는 책이다. 예수님의 인격을 담은 책이다. 성경을 읽고 공부하며 연구하면 성경 안에 있는 생명이신 예수를 만나게 된다. 예수를 만나면서 구원을 받고 드디어 온전한 사람으로 변화된다. 예수님을 닮은 사람이 된다. 지금 우리 곁에 눈에 보이는 예수님을 만나기 어렵다. 그러나 인격이신 예수님을 성경을 통해서 만날 수 있다. 매일 매순간 예수님을 만나는 것은 말씀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이 말씀은 예수님의 인격과 삶이다. 예수님 자체다.
성경을 읽고 연구하는 것은
지식의 습득이 아닌
생명이신 예수님을 만나는 삶
이런 구조로 삶의 변화를 이해한다면 가장 중요한 변화의 시작은 하나님이 누구이신가? 왜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셨는가? 왜 성령님이 우리에게 오셨는가? 하는 근원적인 본질의 질문을 할 때 깨달음이 오면서 성령이 나를 사로잡게 된다. 모든 문제를 나에게서 출발하지 말고 하나님의 질문에서 출발하면 변화는 이루어진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방법이 누구에게서 왔는지를 살피는 것이 변화의 핵심이다. 나에게서 왔는지. 세상에게서 왔는지. 아니면 하나님의 뜻에서 왔는지를 살피는 것이 가장 우선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