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요한서신의 저자, 내용 및 주제
신약성경에는 요한 문헌에 속하는 다섯 책이 있다(요한복음, 요한 1,2,3서, 요한계시록). 이번호에서는 요한서신(1,2,3서)를 다루고자 한다. 요한서신은 요한계시록보다는 요한복음에 가깝다. 그 까닭은 서로 사랑하는 것, 진리를 아는 것, 그리고 요한서신이 제시한 쟁점들이 요한복음의 상황과 청중에 걸맞기 때문이다. 요한복음과 요한서신은 각각 복음서와 서신이라는 다른 장르의 작품이지만, 용어와 신학을 공유하여 ‘요한문헌’(Johannine literature)이라는 이름으로 하나로 묶일 수 있다. 따라서 먼저 요한복음과 요한서신과의 관계를 살펴보자.
요한서신(1,2,3서)에는 저자의 이름이 구체적으로 밝혀져 있지 않다. 요한일서의 저자는 익명으로 남아 있고, 요한이서와 요한삼서는 저자가 자신을 ‘장로’라고 말한다. 그러나 전통적으로 요한복음과 요한계시록을 기록한 사도 요한이 요한서신의 저자라는 견해가 받아들여져 왔다. 그 까닭은 요한서신과 요한복음은 서로 언어적으로나 신학적으로 밀접한 관계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사도 요한이 요한서신의 저자임을 내적인 증거에 의해서 찾아보면 다음과 같다.
(1) 저자가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일에 대해 목격한 사실을 언급한 것(요일 1:1-4)은, 그가 그리스도의 활동 초기부터 그를 따라다녔던 제자였음을 말해 준다. (2) 서신 전체에 흐르는 권위 있는 말투는 사도의 직책에 있는 사람만이 사용할 수 있다(예. 명령-2:15,24; 4:1; 5:21; 확고한 주장-2:6; 3:14; 4:12, 잘못의 분명한 지적-1:6,8; 2:4,22). (3) 요한복음과 요한일서의 표현 방식이 매우 유사한데, 이것은 양서(兩書)의 저자가 같은 인물임을 말해 준다(예. 빛과 어둠, 생명과 죽음, 진리와 거짓, 사랑과 미움의 예리한 대조). (4) 아래의 구절들에서 발견되는 유사성은 요한서신이 서로 언어적으로나 신학적으로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오늘날 대부분의 학자들은 요한서신들의 단어, 문체, 사상 모두가 복음서 저자가 쓴 것이 아님을 드러낸다는 데 동의한다. 무디 스미스(D. Moody Smith)는 복음서와 서신서는 독자와 상황이 분명히 다르다고 전제한다. 그러면서 복음서는 기독교 외적인 문제, 즉 예수의 제자들과 유대인들 간의 거친 적대감을 배경으로 전개되는 반면, 서신서는 유대인들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으며, 이슈와 논란이 되는 내용들 또한 전적으로 기독교 내적인 것들이며, 사실상 서신서에는 구약을 전혀 인용하고 있지 않다며 두 문서 간의 저자는 다르다고 주장한다.
요한 1서 2:19은 요한공동체가 갈라진 사실을 말해준다. 훌덴(J.L.Houlden)과 브라운(R.E.Brown) 등은 서신이 복음서 이후에 쓰였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요한 1서에 나타난 분파는 복음서에 대한 해석의 차이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필자는 양서의 저자를 동일 인물로 보기 어렵다는 입장을 취한다. 그 까닭은 이렇다.
첫째, 요한서신은 기본적으로 사도 요한이 쓴 요한복음이 출판되어 나온 이후(약 10년 이내) 요한의 일부 추종자들인 ‘장로’라고 이름하는 사람에 의해 나온 작품으로 보인다. 요한서신은 기록과 편집에 있어서 요한복음의 전통과 신학에 근거하여, 영감 받아 나온 작품이기에 요한복음의 빛에서 연구되어야 한다.
둘째, 요한서신과 요한복음의 관계는 한편으로는 언어나 사상에 있어서 계시록보다 더욱 밀접히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는 요한복음이 철저히 묵시문학적 문서라는 필자의 견해로 본다면 장르상 묵시문학적 성격이 별로 눈에 띄지 않는 요한서신보다는 묵시문서인 계시록이 요한복음에 보다 가깝다는 반론도 제기할 수 있다.
셋째, 요한복음이 나온 이후 요한공동체(요한의 교회)는 기독론의 문제를 놓고 크게 세 그룹으로 분열되었다. 요한의 균형 잡힌 기독론(예수의 신성과 인성)을 긴장관계 속에서 받아들인 정통그룹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못한 다른 두 이단 그룹이 있었다. 그 하나는 ‘에비온파(Ebionites)’라고 알려진 ‘유대 크리스천’ 그룹으로, 신학적으로는 예수의 인성(참 사람)을 강조하는 ‘저(低) 기독론(Low Christology)’ 주의자들이다. 이들은 예수의 메시아성(性)을 받아들이는 것을 어려워했다. 이들은 윤리적으로는 율법이 필수불가결하다는 강조한 그룹이다. 또 하나의 그룹은 ‘헬라 크리스천’ 그룹으로, 신학적으로는 예수의 신성(참 하나님)을 강조하는 ‘고(高) 기독론(High-Christology)’ 주의자들이다. 가현설(假現說, Docetism)주의자들로 알려진 이들은 예수의 완전한 인성을 받아들이는 것을 어려워했다. 이들의 신학을 ‘영지주의’(Gnosticism)라고 한다. 이들은 윤리적으로는 의를 중요시하지 않고, 육체를 악으로 간주한 그룹이다.
넷째, 이 두 이단 그룹 가운데 요한공동체가 발전해 감에 따라 유대 크리스천 그룹은 물밑으로 잠식한 반면, 헬라 크리스천 그룹인 영지주의자들은 전면에 부각됨으로써 요한공동체의 심각한 분열을 야기하였다. 따라서 요한서신의 기록 목적은 요한의 교회의 분열을 야기한 기독론적이고 윤리적인 쟁점을 요한복음의 가르침에 기초하여 바르게 정립하고자 하는 데 있었다.
한편, 초대교회가 직면했던 이단들 중에서 가장 위험한 사상인 ‘영지주의’에 대해 살펴보자. 영지주의의 중심 사상은 영혼은 절대적으로 선하고, 육체는 절대적으로 악하다는 이원론적 사상이다. 이와 같은 비성경적 이원론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중요한 오류들이 발생했다.
(1) 인간의 육체는 물질이기 때문에 악하다. 따라서 인간의 육체는 순수한 영이자 선하신 하나님과 상반된다.
(2) 구원은 육체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이것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는 것이 아니라 특별한 지식 - 헬라어로 ‘지식’을 뜻하는 말은 ‘그노시스’(Gnosis)이며, 여기서 ‘그노시스주의’ 또는 ‘영지주의’(靈知主義)라는 말이 나왔음 - 을 통해 얻을 수 있다.
(3) 두 가지 방법으로 그리스도의 참된 인성(人性)을 부인한다. 첫째, 그리스도는 육체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였을 뿐이다(도케티즘[Docetism, 假顯說: 헬라어로 ‘……처럼 보이다’라는 뜻의 ‘도케오(δοκέω)에서 유래함). 둘째, 하늘의 그리스도는 인간 예수가 세례를 받을 때 그와 결합하였다가, 십자가에서 죽을 때 다시 떠나갔다(케린투스[Kerintus]가 대표적인 인물이었으므로 ‘케린투스주의’라고도 함). 이에 대한 비판이 요한일서 저작의 동기가 되었다(1:1; 2:22; 4:2-3 참조).
(4) 육체는 악하므로 가혹하게 다루어야 한다. 이 같은 사상에 대한 비판이 골로새서를 저작하는 동기가 되기도 했다(골 2:21-23 참조).
(5) 영혼과 육체의 이원론은 도덕적 타락을 야기시켰다. 곧 육체는 악하므로 육체를 통해서 하나님의 계명을 어긴다고 하더라도 아무 상관이 없다고 생각했다. 신약성경에서 취급된 영지주의는 초기 형태의 것으로써, 이 이단 사상이 완전한 체계를 갖춘 것은 주후 2-3세기 무렵이다.
영지주의의 사상이 갖는 치명적 오류들
2. 요한서신의 구조와 내용
1) 요한 1서 : 수신자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이 없는 요한 1서는 소아시아 지역의 여러 교회에 흩어져 있던 그리스도인들에게 보내진 ‘회람서신(回覽書信)’일 가능성이 많다. 요한 1서의 저자가 이 서신을 쓴 목적은 ‘영지주의’의 그릇된 가르침을 논박하기 이해서이며(2:26), 또한 믿는 이들에게 구원의 확신을 심어주기 위해서였다(5:13). 그는 이단을 논박함에 있어서 특별히 그들의 부도덕성을 지적했으며(3:8-10), 그리스도를 친히 목격했다는 사실을 강조함으로써 성육신에 대한 믿음을 확증시켰다.
본서의 핵심 주제는 ‘그리스도인의 확신’이다. 이것은 저자 스스로가 밝히고 있는 서신의 기록 목적에서도 분명히 나타나 있다(5:13). 무엇으로 참 신자(참 그리스도인)와 참 신앙임을 ‘알(확신할)’ 수 있는가? 그것은 의로우신 하나님과 사랑이신 하나님을 본받아 의로움과 사랑을 실천하며 계명을 지키며 살아가는 삶, 이것이 참 신자의 결정적인 표지이다. 이 ‘행함’을 기준으로 우리의 신앙을 검증하고 판단하여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가라는 것이 본서의 핵심 교훈이다. 요한은 하나님을 안다고 하면서도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않는 자는 ‘거짓말쟁이’라고 한다. 본서는 신자의 가장 중요한 표지는 ‘의로움’과 ‘사랑’이라고 결론짓고 있다. 하나님의 자녀에 걸맞은, 믿음에 걸맞은 ‘행함이 있는 삶’이 본서가 말하려는 핵심이다.
본서는 신약 서신의 일반적인 특징(저자와 수신자에 대한 언급, 감사, 작별 인사, 축복 등)이 나타나지 않는다. 본서의 구조는 일목요연하게 정리된 체계로 이루어진 요한복음과는 달리 일련의 소문단의 결합으로 이루어져 있다. 장르상 요한 2,3서는 서신의 성격이 강한 반면에, 요한 1서는 논쟁적인 논문의 성격을 띠고 있다.
2) 요한 2서: 장로 요한은 “택하심을 입은 부녀와 그 자녀”(1절)에게 이 편지를 썼다. 여기서 말하는 ‘부녀와 그 자녀’란 구체적인 인물들일 수도 있으나 교회를 그리스도의 신부(엡 5:32)라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교회와 그 교인들을 상징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기독교회의 초창기인 주후 1-2세기경에는 순회 전도자들이 있었다. 이들은 이곳저곳을 여행하면서 복음을 전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들을 집으로 맞아들여 가르침을 받았으며, 그 감사로 그들을 잘 대접하고, 또한 그들이 떠날 때는 여행을 위한 여비를 마련해 주었다. 그런데 영지주의 이단의 교사들도 이와 같은 방법으로 그들의 사상을 전하였다.
따라서 본서는 그리스도인들이 잘 모르는 가운데 이단사상에 빠지거나 그들에게 협조하는 일이 없도록 이단 전도자들을 잘 분별하라고 권면하기 위해 기록되었다. 요한일서가 실제 편지라기보다는 편지와 비슷한 형태의 설교문이라면. 요한 2서와 요한 3서는 형식과 길이 면에서 고대의 전형적인 실제 편지라고 할 수 있다. 요한이서와 삼서는 길이에서도 파피루스 한 장 분량으로 거의 같다.
3) 요한 3서: 장로 요한은 순회 전도자(방랑 선교사)인 데메드리오(Demetrius)의 보고를 받은 후 가이오를 칭찬하고, 디오드레베(Diotrephes)를 책망하기 위해 이 서신을 기록하였다. 디오드레베는 으뜸되기를 좋아한 교만한 사람으로, 나그네인 순회 전도자들을 잘 대접하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그들을 대접하는 교인들까지도 쫓아내는 무례한 짓을 서슴지 않았다. 이와는 달리 나그네를 잘 대접하라는 계명처럼 가이오는 겸손하게 순회 전도자들을 극진히 잘 대접했다. 이는 진리 안에서 진리를 행하는 아름다운 모습으로 장로 요한은 이를 크게 기뻐했고, 그를 칭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면서 서신을 통해 가이오에게 세 가지 축복의 간구를 하였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2절). 이 구절은 세 가지 관계, 즉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영혼의 잘됨), 사람과의 바른 관계(범사의 형통) 및 자신과의 바른 관계(육체적 건강)를 말하는 동시에, 순서의 중요성-하나님, 타인, 자기 순-을 말하고 있다.
3. 요한서신의 신학적 주제
1) 호칭과 관련된 용어들
(1) 하나님의 자녀: 요한 1서에 나타난 여러 표현들 중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자녀’(요일 3:1,2,10; 5:2)다. 신앙공동체로서의 ‘하나님의 자녀’ 모티프는 요한복음에서도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요 1:12-13; 11:52). 요한복음에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문구가 두 번밖에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이 문구가 요한복음 프롤로그(1:1-18)에서 중심 주제로 등장할 뿐만 아니라(요 1:12) 예수의 십자가 지심의 의미를 해석하는 중요한 부분에 다시 나타난다(요 11:52)는 것은 이 어구의 중요성을 대변해 준다.
사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상은 구약(신 14:1; 호 2:1 참조)과 고대 유대교(집 36:17; 제4에스라 5:28 참조)에 이미 존재하는 사상이다. 이것과 연관되어 신자의 하나님 자녀 됨은 약간씩 다른 표현으로 공관복음서와 바울서신에도 나타난다(마 3:9; 5:9; 눅 20:36; 롬 8:16 이하). 요한은 전통적인 용어를 사용해 신자의 특색을 설명하고 있다. 요한복음은 예수를 영접한 자는 ‘하나님 자녀’가 되는 권세, 즉 신분이 달라졌다고 말씀하고 있다(요 1:12). 그러면서 ‘하나님의 자녀’란 ‘하나님께로부터(하늘로부터) 온 자들’, 즉 ‘신의 자녀’라고 말씀하고 있다(요 1:13). 이 말씀의 의미와 중요성을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그 당시 자신들이 세계 최고라고 자랑하던 세 민족이 있었다. 유대인, 로마인, 헬라인이 그들이다. 선민이라는 혈통을 자랑했던 유대인들, 그들은 헤브라이즘(Hebraism)이라는 위대한 종교를 이룩했다. 군사적 힘이라는 인간적 육정을 자랑했던 로마인들, 그들은 거대한 로마제국(Pax Romana)이라는 위대한 정치를 이룩했다. 인간의 이성이라는 사람의 뜻을 자랑했던 헬라인들, 그들은 헬레니즘(Hellenism)이라는 위대한 문화를 이룩했다. 그런데 그들이 이룩한 그 엄청난 업적은 다 땅에 속한 것들이요 사람으로부터 온 것들이다. 즉 땅의 차원이요 사람의 차원이다.
이에 반해 예수를 믿는 신앙(요 1:12)은 하늘에 속한 것이요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다(요 1:13). 즉 하늘의 차원이요 하나님의 차원이다. 그런 의미에서 위의 것들과 비교가 안 되는, 차원이 다른 세계에 속한다. 그리스도인, 즉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은 이 땅 어딘가에서 태어나 때가 되면 죽어 땅에 묻히는 존재가 아니라, 예수처럼 하늘로부터 왔다가 이 세상에서 사명을 완수한 후 위에서 부르시면 다시 고향인 하늘로 돌아가는 존재이다(요 16:28).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고향은 이 땅 어디가 아닌 저 하늘이요, 땅의 시민권이 아닌 하늘의 시민권을 갖고 사는, 차원이 다른 존재들이다(빌 3:20).
이는 세상적인 모든 것을 전복하는 최고의 혁명적인 사상으로, 그리스도인은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람들’(히 11:38)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여기에 예수의 정체성과 더불어 예수를 믿는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이 있다. 온 세상을 이기는 믿음이 ‘하나님의 자녀됨’이라는 이 말 속에 담겨 있다(요일 5:4). 이 세상에서 이보다 더 혁명적인 선언이 없다는 점에서 요한문서는 최고로 위험한 불온 문서이며, 그래서 감춰두어야 할 비밀문서적 성격을 지닌다.
요한서신에서 ‘하나님의 자녀’됨의 특권으로서 중요하게 취급되는 것이 ‘사귐’(κοινωνία)이다(요일 1:1-10). 사귐의 종류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눠지는데, 하나는 하나님과 하나님 자녀 간의 수직적 사귐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 자녀 간의 수평적 사귐이다. 후자의 사귐 중에는 ‘우리’로 대표되는 1세대 신자와 ‘너희’로 대표되는 2세대 신자 간의 사귐도 포함된다. 요한서신에서 사귐은 ‘하나님의 자녀’ 사이에만 가능하다. 잘못된 교리를 가르치는,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 사람과는 교제의 악수를 나누면 안 된다(요이 1:10-11). 그러나 선교의 문을 통해서 외부자가 하나님의 아들됨을 통해 내부자와 교제하는 것은 가능하다.
요약하면, 요한서신에서 신자는 ‘마귀의 자녀’와 대비되는 ‘하나님의 자녀’며,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과 그리고 신자 상호 간에 ‘사귐’을 나누는 자들이다. 요한서신은 남과 나를 철저하게 구별한다. ‘나’는 ‘우리’(요일 1:1-10) 또는 ‘너희’(요일 2:18-29)로 표현되고, ‘남’은 ‘저희’ 또는 ‘그들’(요일 2:19)이다. 여기서 ‘우리’ 또는 ‘너희’는 참 그리스도인 또는 참교회이고, ‘저희’는 그 반대 세력이다. ‘그들’은 ‘적그리스도’(요일 2:22)다. 달리 말하면 전자는 ‘하나님의 자녀’인 데 반해, 후자는 ‘마귀의 자녀’(요일 3:10)다. 전자는 그 출처가 하나님이고, 후자는 세상이다. 이 양자 사이의 중간 그룹은 있을 수 없다.
(2) 자녀: 요한서신에서 신자를 지칭하는 어구로 ‘하나님의 씨’와 ‘자녀’(τέκνα), ‘작은 자녀’(τεκνία), ‘아이’(παιδία) 등이 있다. 또한 요한 1서에서는 회중 전체를 아이들/아비들/청년들이라는 한 조의 말로 표현하기도 한다(요일 2:12-14). ‘씨’라는 단어는 요한복음에서 ‘다윗의 씨’(요 7:42) 또는 ‘아브라함의 씨’(요 8:33,57)라는 표현으로 신자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는데, 서신에서도 ‘하나님의 씨’(요일 3:9)라는 말로 이를 표현한다. 요한 1서에서는 ‘작은 자녀들’은 저자가 독자를 부르는 호칭으로, 즉 저자의 영적 자녀들(요일 2:1,12,28; 3:7,18; 4:4; 5:21)을 지칭하는 경우에만 쓰였다. ‘아이들’은 예수가 제자에 대한 호칭으로 사용한 말로서(요 21:5), 요한 1서는 저자가 독자를 부를 때 사용한다(요일 2:14,18). 요한 2서에서는 부인으로 인격화된 교회의 구성원들을 ‘자녀’라고 한다(요이 1:1,4,13).
요한 1서 2:12-14에 있는 아이들/아비들/자녀들(청년들)은 한 조를 이루는 신자를 지칭한다. 신자들은 첫째, 예수를 통하여 죄를 용서받았다(요일 1:12). 둘째, 신자들은 하나님(또는 그리스도)과 인격적 교제를 나누고 있다(요일 2:13a,14b). 셋째, 신자들은 악한 자와 싸워 이미 승리했다(요일 2:13b,14c). 요한서신은 신자를 집단적 개념이 강한 ‘성도’, ‘이스라엘’, ‘하나님의 백성’보다 가족적 친밀함이 강조된 자녀/작은 자녀/아이/하나님의 씨/아이-아비-청년으로 호칭한다. 이러한 것들은 모두 ‘하나님의 자녀’라는 어구와 개념에서 비롯된 것들로서 하나님과 신자 간의 부자 관계 또는 신자 상호 간의 가족 관계를 전제로 형성된 어구들이다.
(3) 사랑하는 자들: 요한서신은 신자를 한 동아리의 구성원 또는 가족 구성원으로 취급한다. 이러한 용어들로는 ‘사랑하는 자들’, ‘형제들’, ‘친구들’이 있다. 요한서신에 신자를 호칭하는 단어로써 자주 등장하는 것이 ‘사랑하는 자들’ 또는 ‘사랑하는 자’다. ‘아가페토스’(ἀγαπητός)라는 형용사는 ‘사랑하다’라는 동사의 수동형에서 파생된 단어로써 그 뜻은 ‘사랑받는’이다. 요한 1서에서는 모두 복수로 신앙공동체를 지칭할 때 사용되었고(요일 3:2,21; 4:1,7,11), 요한 3서에서는 개인을 호칭할 때 단수로 사용되었다(요삼 1:1,2,5,11). ‘사랑하는 자’라는 말은 초대교회에서 설교를 듣는 청자를 호칭할 때 자주 사용되었다. 요한 1서의 ‘사랑 받(하)는 자들’은 요한복음에 사용된 ‘예수의 사랑하는 제자’(요 13:23)에 그 신학적 기초를 두고 있다. ‘사랑받는 자들’은 사랑하는 제자를 모델로 한 하나님의 사랑받는 제자공동체를 의미한다.
(4) 형제들: 형제 어휘는 요한복음에 14회 나오는데, 대부분 피를 나눈 형제를 가리킨다. 이 단어가 복수로써 신앙공동체를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된 경우가 2회 있다(요 20:11-18; 21:23). 이러한 용법은 요한서신에도 계속된다(요일 3:13; 요삼 1:3,5 참조). 요한서신의 ‘형제’ 이해에서 독특한 것은 요한서신에서는 각 신자가 하나님께로부터 자녀로 태어났기 때문에 그 결과 신자 상호 간에 서로 형제가 된다는 사상이 그 배경에 깊이 깔려 있다.
(5) 친구들: 요한복음과 요한서신에서 형제들의 또 다른 이름은 ‘친구들’이다. 요한 3서는 형제들이라고 호칭했던 독자들을(요삼 1:3,5) ‘친구들’이라 부른다(요삼 1:15). 친구들이 ‘신앙공동체’라는 의미로 사용된 것은 예수와 바울이 각각 그의 제자들을 ‘친구들’이라고 부른 데 나타난다(눅 12:4; 행 27:3). 예수는 ‘형제들’과 비슷한 의미로 제자들을 ‘친구들’이라고 부른다(요 15:13-14). 요한 3서는 수신자 그룹과 발신자 그룹을 모두 ‘친구’라고 부른다(요삼 1:15).
2) 하나님과 신자의 관계를 표현한 용어들
(1) 거하다: 헬라어 동사 ‘거하다’(μένω)는 처음에는 어느 고정된 장소에, 특정한 시간에 머물러 있다는 의미로 쓰이다가 후에는 인격체 상호 간의 ‘유대를 끊지 않고 지속하다’라는 의미로까지 확대되었다. 이 단어는 전형적인 요한적 어휘로써 요한문서에서 전치사 ‘엔(ἐν)과 결합하여 특정한 신학적 의미를 띤다. 복음서와 서신에서 이 구절은 하나님(예수)-신자 간의 내재를 표현하는 중요한 어구다(요 15:4 이하; 요일 2:24,28).
이 어구는 요한서신에서 하나님과 신자 관계의 친밀성을 나타내는 최고의 표현 중의 하나다. 그런데 이 어구를 신비주의적 연합으로 보는 것은 잘못인데, 그 까닭은 이 어구가 ‘형제 사랑’ 또는 ‘계명을 지키는 것’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요 15:10,12,17; 요일 3:16 참조). ‘거하다’라는 문구는 하나님과 신자의 내재적 친밀성을 나타나는 요한의 독특한 신학이다.
(2) 알다: 요한서신에서 ‘알다’(γινώσκω) 동사는 어떤 사물에 대한 정보를 갖고 있다는 뜻보다는 신학적인 의미로 인격체 상호 간의 친밀한 유대관계를 나타내는 말이다(요일 2:3b; 2:4,13,14). 이는 전형적으로 요한적인 것이다. 인간 편에서 보면 ‘하나님(예수)을 안다’는 것은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 것, 즉 하나님을 믿는다는 말이 된다(요일 4:16). 하나님(예수) 편에서 보면 하나님이 사람을 안다는 것은 하나님이 신자와 깊은 사귐을 나눈다는 뜻이다.
요한서신에서 ‘알다’(γινώσκω) 동사는 헬라적 의미에서의 머리로 아는 것, 또는 지적으로 아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 말은 히브리어 ‘야다(ע)’에 해당하는 말로 지적으로만 아는 것이 아니라 체험과 경험을 통해 아는 것, 또는 관계와 교제를 통해 아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를 통해 사귐을 나누는 세계요 그러한 삶이 바로 영생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용어를 소위 ‘요한의 영지주의’(Johannine Gnosticism)라고 말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
하나님을 아는 자는 그에 따른 윤리적 행동이 나온다. 그의 계명을 지키고(요일 2:3-4), 하나님과 형제를 사랑한다(요일 4:7).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윤리를 행치 않는 자(요일 3:6), 사랑하지 않는 자(요일 4:8)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다. 한 가지 주의해서 볼 점은 요한복음과 요한서신에는 ‘기노스코’ 동사는 56회 사용된 데 반해, ‘그노시스’(γνῷσις)’ 명사는 전혀 사용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이는 요한문서 저자가 영지주의적인 용어인 ‘영지’(그노시스)를 배격한 데서 기인한 것 같다.
(3) 빛 안에서 행하다: 영지주의는 ‘빛’(φῷς)과 ‘어두움’(σκοτία) 비유를 많이 사용한다. ‘빛의 종교’라고 할 수 있는 영지주의는 빛과 어두움이 같은 힘으로 서로 대립하는 것으로 나타나는 반면, 구약과 쿰란문서에서 이 비유는 윤리적인 행동에 관계되어 사용된다. 전자가 형이상학적 이원론을 바탕으로 한다면, 후자는 윤리적 이원론에 근거하고 있다. 요한문서도 빛과 어두움의 이원론 구조를 사용하는데, 그 배경으로서 가장 가까운 것은 구약과 쿰란문서다. 구약에서는 어두움이 거짓과 악을 상징한다면, 빛은 진리 또는 의를 나타낸다(창 1:3-5; 시 119:130; 사 5:20; 미 7:8b). 쿰란문서는 하나님을 ‘완전한 빛’으로 표현하며, ‘빛의 자녀들’과 ‘어두움의 자식들’ 용어를 사용하여 각각 선과 악을 행하는 원천으로 묘사한다.
이와 같은 배경 아래에서 요한서신은 빛과 어두움의 상반되는 개념을 통해 하나님과 예수의 본질을 설명한다. 하나님은 ‘빛’이시다(요일 1:5). ‘참 빛’(곧 예수; 요 1:9; 8:12)이 벌써 비추고 있다(요일 2:8). 요한서신에는 쿰란문서와 같이 ‘빛의 아들들’ 또는 ‘어두움의 자식들’ 용어는 나오지 않지만 ‘하나님의 자녀’와 ‘마귀의 자녀’라는 표현이 같은 의미를 지닌다(요일 3:10).
한 걸음 더 나아가 요한서신은 다음과 같은 빛과 어두움의 비유를 윤리적 행동과 연관시키고 있다. ‘빛 안에서 행하다’(요일 1:7), ‘빛 안에 거하다’(요일 2:10), ‘빛 안에 있다’(요일 2:9), ‘어두움 안에 있다’(요일 2:9,11), ‘어두움 속에서 행하다’(요일 2:11). 요한서신은 이러한 빛의 비유를 윤리적 삶과 상관없는, 어떤 사람을 득도의 길로 이끄는 신자 안에 있는 내적 빛이란 의미로 사용하지 않는다. 요한은 ‘빛 안에서 행한다’ 문구를 하나님으로부터 태어난 하나님의 자녀의 행동이고 그것을 형제사랑과 연결시켜 사용한다.
(4) 진리 안에서 행하다: ‘진리’ 어휘는 신약에 109회 나온다. 그 중 절반이 요한문서에 나온다. 이 어휘가 요한복음에서는 기독론적 칭호(요 14:6)로도 쓰이고, 특히 서신에서는 복음서의 내용을 전제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또는 그를 통하여 계시된 진리을 의미한다(요일 1:8; 2:4,21; 요이 1:1-2). 요한서신에서는 여기서 파생된 것으로 ‘진리를 행하다’(요일 1:6) 또는 ‘진리 안에서 행하다’(요이 1:4; 요삼 1:3-4)라는 숙어가 나오는데, 이것은 진리의 내적 원리에서 흘러나오는 행동을 말하며, 위에서 언급한 ‘빛 안에서 행하다’와 비슷한 의미로 쓰였다.
3) 기독론적 칭호들: 요한 1서의 중요한 목적은 우리가 성부 및 성자 하나님과 교제(사귐)하고 생명을 갖게 함에 있다. 이 짧은 서신에도 예수님에 대한 여러 칭호들이 나타난다. 가장 많이 나오는 칭호는 ‘하나님 아들’(요일 3:8; 4:15; 5:5,10,12,13,20)이다. 다음으로, ‘말씀’ 칭호이다. 예수님은 ‘생명의 말씀’(요일 1:1)이다. 거짓을 행하는 자는 ‘말씀이 없다’(1:10). 즉 그리스도가 없다는 말이다. ‘독생자’(요일 4:9) 칭호는 오직 요한의 저작에만 나타난다(요 1:14,18; 3:16,18). 이 칭호는 성자 예수님과 성부 하나님과의 독특한 관계를 드러낸다. 성부께서 이런 아들을 오직 우리를 향한 사랑의 연고로 우리를 위하여 세상에 보내셨음을 강조한다.
또한 ‘대언자’ 칭호는 요한복음(14:16,26; 15:26; 16:7)에서 성령님을 지칭하는데, 요한 1서’(2:1)에서 단 한 번 나타난다. ‘그리스도’(메시아) 칭호는 ‘예수’와 더불어 나타나거나(1:3; 2:1,23; 4:2; 5:6, 20) 또는 독자적으로 나타난다(2:22; 5:1). 그런데 독자적으로 나타나는 경우 ‘예수는 그리스도다’라는 고백적 문구 속에서 나타난다. 또한 예수는 ‘구주’(요일 4:14; 요 4:42)시다. 요한 당시에는 로마 황제도 이 이름으로 불렸다. 그러나 이런 이방적 배경에서 예수를 구주로 부른 것은 아니다. 구약에서 이스라엘을 대적의 손에서 해방시킨 사사(삿 3:9,15)나 하나님이 구원자로 불렸다. 마지막으로 예수는 하나님이시다(요일 5:20). 이는 요한복음 말미에서 도마가 한 고백을 연상시킨다(요 20:28). 예수는 하나님의 완전한 계시 곧 하나님이시다. 요한 1서는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요, 하나님의 말씀이며, 세상의 구주로서 하나님이심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한편, 우리의 대언자인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물’(ἱλασμος, 요일 2:2; 4:10)이시다. 이 표현은 오직 요한 1서에만 나타난다(롬 3:25[ἱλαστήριος]의 화목제물은 동일한 헬라어가 아님). 이는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신다는 뜻이다(요일 1:7). 구약의 속죄 제사에서 연유한 이 용어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세상을 위한 제사장으로서 당신 자신을 속죄의 제물로 바쳤다는 말이다.
4) 적그리스도: 요한서신에는 이후 교회사에서 큰 역할을 하게 될 용어가 나온다. 이 용어는 예수의 칭호가 아니라, 그를 부인하는 자들에게 붙여진 칭호, 즉 ‘적그리스도’(요일 2:18,22; 4:3; 요이 1:7)다.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부인하는 자는 ‘적그리스도’다. 이 적그리스도들(복수, 요일 2:18)은 교회로부터 나간 자들이다(요일 2:19). 이들은 예수께서 그리스도임을 부인하는 자요, 이로 인하여 아버지와 아들을 부인하는 거짓말쟁이들이다(요일 2:22). 즉 예수를 시인하지 않는 영 곧 예수가 육으로 오신 것을 시인하지 않는 영은 적그리스도의 영이다(요일 4:2-3). 적그리스도에게는 하나님 아버지가 없다. 이들에게는 성부와 사귐이 없으며(요일 1:6), 어두움 가운데 행하고 거짓말을 하며 진리를 행치 않았다. 이 모든 거짓은 진리에서 나지 않는다.
요한 1서에 나타나 있는 적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은 다음과 같다. (1) 사랑을 행하지 않는다(2:9-11; 4:20-21). (2) 그리스도의 인성을 부인한다(2:22; 4:2-3; 5:5-6). (3) 교회의 신앙과 다른 신앙을 가지고 갈등을 일으키는 세력들과 연대한다(2:15-16; 4:5-6). (4) 악의 무리며(3:8), 심지어 말세의 적그리스도다(2:18-23). 왜냐하면 그들은 모교회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기 때문이다(4:6). (5) 하나님을 알고 사랑한다고 주장하며 신앙을 실천한다고 주장하지만, 사실상 그렇게 하지 않는다(1:6; 2:9). (6) 사망에 이르는 죄를 범했으며(5:16), 그럼에도 그들은 죄로부터 해방되었다고 주장한다(1:6-10; 3:3-6). (7) 도덕적 제한 없이 부도덕한 삶을 산다(3:4-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