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가 사는 인천 계양 동양동 일대에는 두 개의 강이 흐른다. 하나는 부평 들녘을 이리저리 휘돌아 한강으로 나가는 굴포천이 있고, 또 하나는 이름 모를 작은 샛강이 있다. 샛강 옆 농수로 변에는 벚나무, 느티나무, 능수버들 등 여러 종류의 나무들이 조성돼 있어 따가운 해를 가려주니 산책하기에 안성맞춤이다. 물안개가 자욱한 샛강에는 이른 아침부터 두루미, 백로, 물오리 등이 먹기 찾기에 여념이 없다. 비를 맞으면서도, 사위(四圍)를 살피면서도 새들은 자리를 뜨지 않는다. 날 것들의 먹이 사냥도 결코 쉽지 않은 모양이다.
취재를 위해 4월 중순, 동인천 광장에서 권지연 동문을 태우고는 자유공원 양지바른 찻집에 둥지를 틀었다. 그녀는 가난한 사람, 나그네, 한부모들(싱글맘, 대디), 사회적 약자를 바라보는 안목이 탁월하다. 누구든 권지연 동문을 만나면 무장해제당한다. 자신들의 지나온 삶, 고백하기 어려운 이야기들을 말하게 하는 능력이 있다. 래포(rapport)를 이끌어내는 데 명수라 할까?
어린 시절의 꿈
어떻게 해서 사회복지를 공부하게 됐느냐고 물으니 희한한 답이 돌아온다.
-어린 시절 할머니 : “너는 이다음에 자라나 무엇이 될래?”
-권지연 어린이 : “응~, 보육원 원장님이요”
권지연은 자기도 모르게 보육원 원장이란 대답을 했다고 한다. 어린 시절에 무엇을 안다고 그런 대답을 했을까? 유년기부터 다니기 시작한 인천교회를 통해 성장하면서 믿음에 눈을 뜨고 은혜받고 말씀을 읽으며 ‘사회적 약자’에 대한 마음이 싹트기 시작했다. 자연스레 사회복지(학)의 길에 들어섰다. 지금은 청운대학교를 비롯하여 초중고 특별수업 등 바쁜 일상에서도 기도하기를 게을리하지 않는다. 금요일 저녁에 전화했더니 심야기도회에 가야한다면서 전화를 끊는다. “힘 있을 때 시간 내어 기도로 저축해 놓아야죠.”
서울신학대학교 시절의 여학생회장
“약력에 보니 서울신학대학 시절 여학생회장도 지냈던데...제법 유명 인사였군요.”
“네, 제가 18살에 서울신학대학교 사회사업학과(당시 명칭)에 입학했으니, 얼마나 귀엽고 신기했겠어요(하하). 학교 연감이 있던 시절, 어린 여자후배를 궁금해 하며 수업시간에 신학과 선배들 중에 사사과 권지연이 누구냐고 보러오기도 했죠. 그러니 자연스레 선배들을 많이 따르게 되었는데 우연히 양순철 선배(현, 부산 동광교회 장로)가 총학생회장에 출마하면서 러닝메이트로 지명하여 함께 당선돼 잠시나마 학생운동 일선에 앞장서기도 했습니다.”
“그런 일이 있었군요.”
필자가 대학원을 다니던 80년대 중반, 참으로 오래전의 일인데도 기억에 생생하다. 여학생회장 후보 권지연의 홍보 포스터가 나붙었을 때 그 앞에서 학력을 읽어나가는데 그때 나의 초등학교 동문 후배인 것을 알았다.
“요즘 일하고 있는 사역 중심으로 자신을 소개해 주시죠.”
“네, 우선은 청운대학교 인천 캠퍼스 사회복지상담학과의 외래교수로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있습니다. 젊은 청년들과의 만남은 내 인생의 보람이죠. 수강생 중에는 재기 또는 이직을 준비하는 중년의 여성들, 공무원 등 다양합니다.”
“이왕 말이 나온 김에 그 외의 하는 일, 해왔던 일도 소개해주시죠.”
“네, MBTI 학교심리전문 강사, 어세스타 초중고대학 진로인성특강 강사, 한국사이버대학 평생교육원 강사, MBC 아카데미 전문 강사, 해피 요양보호사교육원 강사, 장애인활동지원사 과정 전임강사 등 다양한 분야를 뛰고 있습니다.”
"이 중에 제일로 보람 있는 분야는 어떤 것이며, 재미있는 사례가 생각나면 그것도 소개해주시죠."
“그 중 싱글맘들을 위한 집단 치유 프로그램으로 자서전 쓰는 프로젝트 강사로 활동하며 가장 보람을 느낍니다.”
청운대학교 사회복지상담학과 객원교수
“이력을 보니 매우 화려하네요. 재능대학교, 부천대학교, 서울신학대학교, 수원과학대학교, 수원 장안대학교, 협성대학교, 강서대학교 등에서 겸임교수로 활동했던데, 아는 사람이 많아 소개로 된 건가요?”
“아닙니다. 저는 어디에 강사 이력서 한 장 내 본 적이 없어요. 다 우연한 기회에 소개로 연결이 되거나, 대학에서 펑크 난 자리가 계기가 되어 강단에 서기 시작했어요. 소문이 났는지 하나둘 강의 이력이 붙기 시작했죠. 늘 현직에서 오랫동안 사회복지 전문인의 일을 하면서 강의를 병행해 왔기에 시간강사나 객원교수로 강의한 것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남편을 잃고 전문인의 길에 서다
“88년도에 숭실대학교 대학원 석사과정이나 그 후 백석대에서 박사과정을 공부하기가 쉽지 않았을 법한데 힘들지는 않았나요?”
“서울신학대학교를 다닐 때였어요. 그때 캠퍼스커플로 황〇〇씨와 결혼을 하고 목회 전선에 뛰어들었지요. 그런데 남편이 베체트병에 걸리고 오랜 투병 끝에 어린 남매를 두고 먼저 하늘나라 여행에 올랐어요. 너무나 갑작스럽게 닥친 이별에 앞이 캄캄했지요”
“모든 게 무너진 듯했어요. 후임 목회자를 모시는 과정에서의 아픔 더 컸어요. 성경에서 남편을 잃은 룻이 시모 나오미를 모시고 고향으로 돌아오는 초라한 경험처럼 친정으로 어린 남매를 안고 돌아올 수밖에 없었잖아요. 가슴에 응어리를 안은 채. 저도 그대로 주저앉을 수는 없었어요. 어린 애들을 키워야 했고 재기도 필요했지요. 그래서 이를 앙다물고 일했던 것 같아요”
권지연 박사의 과거 경력과 공부한 것이 자산이었는지 뜻하지 않은 곳에서 풀렸다. 미추홀구의 한 복지관 부장에 이어, 인천시 동구노인복지회관 관장의 일까지 감당하며 여기까지 달려왔다.
전문인 사회복지사로서의 길
“그럼, 자신만의 전문인 사회복지사로서의 특기와 장점을 어필해본다면 어떤 것이 있을까?”
“저는 MBTI(성격검사), 인지행동 분야와 한부모들을 가르치고 돌보는 자서전 쓰기 활동에는 많은 경험과 노하우가 있습니다.”
“나만의 특별한 경험을 강의와 활동에 적용하기도 한다면서요?”
“제가 젊은 날에 남편을 잃은 싱글맘이잖아요? 그것은 큰 아픔이지만 이제는 오히려 장점이 돼 상처받은 치유자로 한부모들을 상대할 때는 저들의 마음 문을 여는 실마리가 되죠. 복지관 근무할 때 한글학교를 열어 무학자 할머니들에게 한글을 깨치게 한다든지, <자서전 쓰기반>을 개설하여 노령의 어르신들에게 글쓰기를 통하여 자신의 지난 삶을 통합하고 관조하게 할 때가 있었어요. 그랬더니, 이 어르신들이 남은 생애를 의미 있게 살아보겠다고 눈물을 흘리며 동료들 앞에서 회고하고 소통하지 못하던 자녀들과 못다 한 이야기들을 주고받으며 노년의 삶에 가치를 부여하고 자존감을 회복하며 행복을 일군 이야기 등 많은 경험이 쌓여 노하우가 되었답니다.”
외기러기의 힘찬 날갯짓
“요즘에 자녀 교육이 제일 큰 문제인데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사실, 경제문제는 무엇이든 알바를 해서라도 벌면 되고 부족하면 절약하면 되는데요. 자녀 교육의 문제는 정말 감당하기 어렵죠. 딸아이가 사춘기에 접어들자, 대뜸 그러는거예요. “난 왜! 아빠가 없느냐”라고. ‘올 게 왔구나...’ 제가 그랬죠. “넌 아빠만 없지, 엄마는 부모님 다 잃고, 남편도 없어! 그랬더니 무슨 생각을 했는지 조용해지는 거예요”
“자녀 교육은 지혜 교육이라고 봐요. 지혜롭게 처신해야 하고요. 나의 세상 지식이나 짧은 지혜로는 한계가 너무나도 분명하죠. 자녀들을 가르침에는 하나님께 하늘의 지혜를 구해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이야기지만, 남편을 떠나보내는 사별의 경험은 엄청난 충격 자체였을 법한데 어찌 이겨냈는가?”
“하나님 앞에 서면 제일 먼저 하나님께 묻고 싶은 질문이 있어요. 남편에 대한 이야기에요.”
“하나님께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요?”
“네, 하나님! 꼭 그렇게 해야만 했나요?” 병마와 투병하던 중이었지만 낫는 방법도 있을 법한데 꼭 그렇게 이른 나이인 30대에 불러 가셔야만 했느냐는 말이다. 얼마나 힘들고 서운했으면 나중에라도 하나님께 꼭 질문하겠다고 한다. 이 말을 하는 그녀의 입술이 조용히 떨린다.
아마도 그랬을 게다. 너무 이른 나이에 다가온 너무 큰 이별의 아픔이 그녀를 자신에게는 더욱 강하게 그리고 세상에는 더욱 너그럽게 만들지 않았나 싶다. 아픔은 외기러기인 그녀를 선두에 선 기러기로 끌어 올렸다. 그리고 그녀의 힘찬 날갯짓은 많은 이들에게 때로는 위로고, 때로는 희망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