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신배 박사】 아내와 자녀들 모두 한국 선교사로 이끈 아펜젤러 선교사

  • 입력 2024.08.08 0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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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신배 교수의 구약 이야기 (377) - 구약성경과 선교이야기 (189)

박신배 교수 / 연세대 구약학 박사, 현 강서대 교수, 창조문학 편집위원, 한국 평화학회 전 부회장, 한국 구약학회 전 부회장, 강서대 전 총장
박신배 교수 / 연세대 구약학 박사, 현 강서대 교수, 창조문학 편집위원, 한국 평화학회 전 부회장, 한국 구약학회 전 부회장, 강서대 전 총장

나를 눈동자같이 지키시고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 감추사(샤메레니 케이숀 바트 아인 베쩰 케나페이카 타세티레니) 내 앞에서 나를 압제하는 악인들과 나의 목숨을 노리는 원수들에게서 벗어나게 하소서”(17:8-9).

세상은 파리 올림픽 방송으로 온통 스포츠 금메달 소식들이다. 이에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하고 있다. 우리도 선수들이 스포츠 경기하는 장면을 보면서 이 세상의 근심 걱정을 잠시 잊고 거기에서 재미를 느끼며 시름을 잊는다. 그러나 잠시 잠간의 쾌락이 우리의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이제 우리가 걸어가는 것을 그들이 에워싸서 노려보고(아슈레누 아타 세바부누 에이네헴 야쉬투) 땅에 넘어뜨리려 하나이다”(17:11). 대적자들이 한시도 쉬지 않고 그들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공격과 위협을 늦추지 않고 시인을 넘어뜨리려 한다. “그는 그 움킨 것을 찢으려 하는 사자 같으며 (디메요노 케아르예 이크소프 리테로프) 은밀한 곳에 엎드린 젊은 사자 같으니이다” (17:12).

시편 17편은 일인칭 국가 탄식시편으로서 시편 16:10; 17:15; 49:16; 73:23이하 등에서 경건한 자를 도우시는 여호와를 말하며 하나님은 치명적인 위험에서 구하시며 악인과 갑작스런 죽음의 위기에서 구원하신다. “여호와여 일어나 그를 대항하여 넘어뜨리시고(쿠마 아도나이 콰드마 파나이오 헤케리에후) 주의 칼로 악인에게서 나의 영혼을 구원하소서”(17:13). 이 개인 탄식시에서 의인과 악인의 삶의 모습이 대조적으로 나타난다. “여호와여 이 세상에 살아 있는 동안 그들의 분깃을 받은 사람들에게서 주의 손으로 나를 구하소서 그들은 주의 재물로 배를 채우고 자녀로 만족하고 그들의 남은 산업을 그들의 어린아이들에게 물려 주는 자니이다(웨힌네후 이트람 레올레헴)”(17:14). 기름에 잠긴 마음과 교만하게 말하는 사람, 의인을 노리는 원수들은 주의 재물로 축적하며 재산을 자녀들에게 물려주는 자들이라고 말한다(17:10; 14). 이 시편 17편의 세계관은 하나님의 것으로 살아가는 사람들과 자녀 중심으로 살아가는 인생이 대조되어 비교되고 있음을 보인다. 결국 시인은 의롭게 살며 하나님의 형상, 하나님을 보며 살아가는 인생으로 만족한 삶을 고백한다. “나는 의로운 중에 주의 얼굴을 뵈오리니(아니 베체데크 에헤제 파네이카) 깰 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에세베아 베하키츠 테무나테카)”(17:15).

이 탄식 시편 17편은 나의 판단을 주 앞에서 내시며라고 시작하며, 이는 법적 소송 양식으로 시편의 서두를 시작한다. “다윗의 기도, 여호와여 의의 호소를 들으소서 나의 울부짖음에 주의하소서(테필라 레다윗 쉬므아 아도나이 쩨데크 하크쉬바 린나티) 거짓되지 아니한 입술에서 나오는 나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소서”(17:1). 이 시편은 이렇게 삶의 처절한 형편과 그 자리에서 이 탄식의 소리를 발하며 의로운 하나님의 도우심을 말한다. 시인의 이러한 어려움과 고충은 바로 깊은 죄의식에서 나온다. 이 어려움과 고난은 바로 하나님의 은혜에서 그 구원의 시작이 되고 있음을 알고, 참회하며 주께 도움을 요청한다. “주께서 나를 판단하시며 주의 눈으로 공평함을 살피소서(밀파네이카 미쉬파티 예쩨 에이네이카 테헤제나 메샤림) 주께서 내 마음을 시험하시고 밤에 내게 오시어서 나를 감찰하셨으나 흠을 찾지 못하셨사오니 내가 결심하고 입으로 범죄하지 아니하리이다”(17:2-3). 이 탄식의 원인인 죄와 불의와 부정한 삶에서 벗어나려는 시인의 몸부림이 있다. 또 하나님께 탄식의 기도, 탄원을 볼 수 있다. “나의 걸음이 주의 길을 굳게 지키고 실족하지 아니하였나이다(타모크 아슈라이 베마에게로테이카 발 나모투 페아마이) 하나님이여 내게 응답하시겠으므로 내가 불렀사오니 내게 귀를 기울여 내 말을 들으소서”(17:5-6).

고난과 시험, 기도 응답과 구원이 바로 시편 17편 기자의 깊은 기도 제목이며 이 시 내용의 중심이다. “주께 피하는 자들을 그 일어나 치는 자들에게서(하레레 하사데이카 모쉬아 호심 밈미트코메밈) 오른손으로 구원하시는 주여 주의 기이한 사랑을 나타내소서”(17:7). 이 놀라운 사랑, 기이한 사랑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며 이 사랑으로 당신의 백성, 당신의 자녀를 구원하신다는 사실을 바로 시인은 잘 알고 있으며 이렇게 간구하고 있다. 따라서 의로운 삶과 의인의 윤리를 언급하여 주의 길을 따르려 한다. 시인은 이에 바른 생활하기를 고백하고 결단하며 살아가려 한다. 시인 다윗은 바로 다윗의 기도를 통해 그의 파란만장한 인생의 구원의 시작이 바로 이러한 의로운 삶과 하나님의 얼굴 보는 삶, 예배하는 삶인 것을 노래하고 있다. “사람의 행사로 논하면 나는 주의 입술의 말씀을 따라 스스로 삼가서(리페우로트 아담 비레바르 세파테이카 아니 샤마르티) 포악한 자의 길을 가지 아니하였사오며(아르호트 파리쯔)”(17:4). 이러한 구원의 삶, 바른 인생길은 바로 다윗에게서 볼 수 있으며 이는 오늘 기도의 응답을 받는 형통한 인생이 바로 이 시편 17편의 삶인 것을 알게 된다. 이러한 인생을 살아간 선교사가 있다.

엘라 닷지 아펜젤러(Ella Dodge Appenzeller, 1854-1915)는 아펜젤러의 부인으로서 40대 후반에 홀로 된다. 그녀는 1902년부터 과부로 살면서 외로운 여성 선교사, 선교 후원과 동원자로서 힘들게 사역을 한다. 엘라 아펜젤러는 뉴욕 주의 벌린(Berlin)에서 출생하여 성장하여 트로이에 있는 엠마 윌리아드 여학교에서 졸업하였다. 엘라는 신문 잡지업에 관련되는 알바니 저널 스쿨을 졸업했다. 엘라는 부친 조지 워싱턴 닷지와 모친 드보라 엘리자베스 그리스월드 사이에 태워나, 남매로 자라며 일찍 모친을 16세 나이에 잃게 된다. 아버지는 그 때 68에이커의 농장을 처분하고 코르크(Cork)회사을 설립한다. 아버지가 사업을 하면서 9년 쯤 지난 1879년에 회사를 뉴욕 주 벌린에서 펜실베니아 주 랭카스터로 옮긴다. 거기서 살며 엘라는 랭카스터 제일 감리교회를 출석하게 된다. 아펜젤라와 닷지는 18841217일 이 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린다. 그리고 신혼부부 아펜젤러 내외는 1885719일부터 서울의 서대문구 정동에 거주하며 선교 사역을 펼치게 된다.

왼쪽부터 차녀 아이다, 장녀 엘리스, 헨리 G. 아펜젤러, 장남 헨리 닷지, 엘라 제인 닷지 아펜젤러, 3녀 메리, 이미지 출처 : https://www.findagrave.com/memorial/112528747/ella-jane-appenzeller#view-photo=237233226
왼쪽부터 차녀 아이다, 장녀 엘리스, 헨리 G. 아펜젤러, 장남 헨리 닷지, 엘라 제인 닷지 아펜젤러, 3녀 메리, 이미지 출처 : https://www.findagrave.com/memorial/112528747/ella-jane-appenzeller#view-photo=237233226

아펜젤러 선교사는 한국에서 선교 사역을 하면서 그 영향력을 크게 가진다. 자녀들은 넷으로서 앨리스 레베카(1885-1950)가 장녀로 태어나고, 그 다음 장남 헨리 닷지(188911.6)가 태어나고, 차녀 아이다 한나는 189110월에 태어난다, 그 후에 막내 딸 메리 엘라는 부모가 안식년 휴가로 미국 랭카스타에 갔을 때 태어난다(189348). 엘라 닷지 아펜젤러는 남편이 성서 번역회 위원들(제임스 게일, 네이놀즈, 존즈, 스크랜턴) 모임이 열리는 목포로 가다가, 군산 앞바다 어청도(오세이도 섬)에서 일본 선박과 부닥치면서 소천하게 된다. 그 후에 44명의 배탄 사람 중에 21명이 살고 나머지가 죽었을 때 그 때에 고종 황제의 총애를 받는 아펜젤러가 일등석에 타고 있어서 가만히 있었으면 살 수 있었다 그런데 그만 조사 조성규(조한규)를 살리려고 그를 부르며 미스터 조를 외치면서 내려갔다가 아펜젤러는 이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유명을 달리한 남편 아펜젤러를 보내고 엘라는 막막한 조선의 땅에서 선교를 계속하며 남편의 몫까지 선교하며 자녀 넷을 키워야 했다. 남편이 2차 안식년 때 가족들을 랭카스타에 남겨 두고 한국에 갔다가 홀로 순교를 한 것이다.

엘라 선교사는 먼저 아버지 회사 코르크에서 일하면서 랭카스터 감리교회를 섬기며 자녀들을 키웠던 것이다. 그녀는 자녀들을 모두 고등 교육을 시키면서 남편의 후계자들로 선교사들이 된 것을 기쁘게 바라보면서 191561세 나이로 소천하게 된다. 특히, 장녀 엘리스 아펜젤러는 이화여자대학교의 2대 총장이 되어 이대를 설립하여 교육하여 발전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녀는 뒤이어 후계자, 3대 총장으로 김활란 박사를 세우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앨리스 아펜젤러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조선의 선교사로 자원한다. 조선의 첫 감리교 선교사인 아버지 선교사가 1885년 부활주일에 조선에 도착한다. 엘리스 아펜젤러의 친구 엘리자벳 리(Miss Elizabeth M. Lee, 이화 국제재판 이사장, 1966년 이화대 명예박사)가 증언하기를 엘라 선교사는 하늘에 머리를 둔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리스도인의 삶, 신자의 삶이 무엇인지 자신에게 알게 하였고, 이 랭카스터 교회 청년회 사역을 하도록 인도하였다고 한다.

엘라 아펜젤러는 이 엘리자벳 리에게 감동을 주어 엘라의 딸, 앨리스 아펜젤러를 돕은 후원자로서 함께 조선에 갈 수 있도록 인도하였다. “기독교인의 봉사를 위해 당신의 삶을 바칠 생각을 해 본 일이 있나요? 하나님은 당신에게 너무나 많은 은총을 베푸셨어요. 왜 당신은 앨리스와 함께 자원봉사가가 되어 동양(한국)으로 나아가지 않나요? 가지 못할 이유가 없어요”(앨리자벳 리). 엘리스 아펜젤러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1914년 조선의 선교사로 나간다. 뒤에는 이처럼 엘라 아펜젤러의 기도가 있었던 것이다. 36년간의 엘리스 선교사의 사역은 이대를 세우며 첫 여자 대학을 세우는 일을 하였던 것이다. 엘리스는 순교한 아버지의 훌륭한 신앙을 배워서 선교하며 이화의 제자들이 민주주의와 조선의 독립을 위해 순교적 삶을 살도록 가르치고 2차 세계대전을 통하여 조선의 독립하도록 이끄는 자유의 가르침을 실천하였다. 조한규(조성규) 조사를 살리려는 아펜젤러의 사랑, 친구의 사랑은 바로 딸 엘리스에게 이어졌고, 조선의 독립과 건국을 보게 되었던 것이다. 앨리스의 다정한 친구가 한국의 초대 대통령이었고 아버지 아펜젤러가 개종시켰던 인물이었던 것을 기뻐했다. 엘리스 선교사의 선교 정책을 보여준 성탄절 편지의 내용은 바로 부모와 함께 선교사로서 삶의 단면을 보여준다.

하나님이 지으신 진로를 따라가는 대의는 결코 상실되거나 멈춰질 수 없다. 그 대의(大義)는 방벽과 성채를 염두에 두지 않고 씨앗에서 꽃으로 서서히 자라고 있다. 비록 그 나무가 권력에 의해 산산이 부서지더라도 수천의 씨앗들이 대의를 뿌린다면 충분히 발육한 씨앗들이 보증이 되기 때문에 더 이상 태풍으로 인하여 실망하지 않는다”(앨리스 R. 아펜젤러). 아버지의 뒤를 이은 이 엘리스 레베카 아펜젤러는 아버지의 몫까지 다하며 조선말을 조선 사람처럼 하고 조선 백성을 사랑하며 멀리 내다보고 창의력이 있으며 두려움 없이 웨슬리 대학 출신답게 뛰어난 지도력과 높은 영성, 폭넓는 문화, 굉장한 매력을 지닌 위대한 여성이었다. 엘리스 아펜젤러 선교사는 조선 선교사이며, 그녀는 아펜젤러의 딸로서 이화여대 설립과 조선 선교의 금자탑을 쌓았던 것이다. 아직도 순교한 그 배는 어청도에서 인양될 날만 기다리고 있다(100, 아펜젤러 영화). 선교의 씨앗은 반드시 그 결실을 이룬다는 사실을 군산 앞바다에서 보여주었다. 하나님의 선교, 그 진리는 오늘도 우리에게 이를 가르쳐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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