섹션01 설교갱신_ 설교자에서 복음증언자로

  • 입력 2024.09.24 17:31
글자 크기
프린트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507주년 종교개혁 특집-위기의 한국교회를 살리는 갱신 매뉴얼 (2)

교회와 목회자의 한 가지 소망

모든 목회자의 소망은 설교를 잘하는 일이다. 하지만 그 설교가 우리의 의지대로 되는 것은 아니다, 설교에 목숨을 걸라고 말하지만 어떻게 하는 것이 설교에 목숨을 거는 것인지 잘 모르는 사람이 많다. 각 교회마다 설교를 잘하는 목회자를 청빙하려고 한다. 청빙 조건 중에 가장 중요한 경우가 설교다. 교인들과 당회원의 마음에 드는 설교를 찾지만 그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어떤 것이 잘하는 설교인지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말을 잘하는 사람인지? 성경을 잘 풀어서 설명하는 사람인지? 우리의 마음에 드는 설교를 하는 것인지? 그 기준이 애매하다. 성경적인 설교의 정의조차 내리지 못하는 상황에서 설교자를 청빙한다는 것도 자칫 어불성설이 될 수 있다. 서로가 정의조차 정리가 안 되는 상황에서 성도가 설교자를 선택한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는 일이다. 정말 그가 하나님이 보내신 종인가? 그것을 판단하는 것은 언제나 힘든 일이다. 물론 공동체를 통하여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공동체가 기도하면서 결정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그 결정을 하나님이 선택하는 것으로 빋고 그대로 따르는 것이 현재 속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이다.

 

말을 잘 하는 사람인가?

성경을 잘 전하는 사람인가?

한 신부의 탁월한 설교

한국교회가 위기라고 말한다. 하지만 한국교회 위기는 약 30년 전인 1990년대부터 시작되었다. 그 이후로 한국교회는 내리막길을 향해 가고 있었다.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사용했지만 내리막길을 막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흔히 종교개혁의 정신으로 돌아가라고 외친다. 회개하여 성령충만을 받으라고 제안한다. 물론 이 말은 맞는 말이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무엇을 회개해야 하는가? 질문하면 답을 잘 못한다. 회개를 하려면 어디서 문제가 되었는지를 먼저 알아야 하고 그 지점을 정확하게 찾아야 회개가 이루어진다,

이것을 찾기 위해서는 이전의 교회역사를 고찰해 볼 필요가 있다. 현재의 문제는 과거 속에 이미 답이 있다. 이런 점에서 16세기 종교개혁의 정신을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로마가톨릭교회의 타락의 핵심 부분은 예배와 설교에 있다. 예배와 설교는 긴밀하게 연결되었다, 로마가톨릭교희의 예배와 설교는 성경에서 벗어난 이교적인 방식을 적용한 것이었다,

예배에서 가장 중요한 성경이 없고 성경을 사제가 대신했는데 그것이 설교였다. 사제의 설교가 곧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인식했기에 사전의 말이 곧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받아들였다. 하지만. 당시 설교는 성경이 없는 인간의 말이 많았다. 설교는 곧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등식이 교회의 조직을 관장했다. 점차 설교는 성경 없는 설교가 됨으로 결국은 교회를 타락시키는 주범이었다.

당시 가장 인기가 있는 교황의 충신인 테첼 신부에게 맡겨진 임무는 베드로 성당 건축을 위한 면죄부 판매의 임무가 부여되었다. 전국을 다니면서 헌금을 모금하는 일은 당시 로마교회가 얼마나 타락했는지 보여주는 한 장면이다. 특히 설교가 인간의 욕망을 추구하는 도구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설교가 형성된 출발 때 역사의 한 장면을 보면서 오늘 우리의 설교를 진단하는 표가 되어야 한다.

지금 우리의 설교는 어떤 모습인가? 테첼과 같은 설교를 하고 있지 않는지 점검이 필요하다.

 

우리 신학교에서 처음 배운 설교학의 풍경

지금 우리의 설교를 제대로 진단하려면 신학교에서 처음 설교학 과목을 스케치 하면 거의 모든 설교의 답이 다 들어 있다. 필자가 처음 신학교에서 설교학 강의 시간을 간단히 정리해보자.

과목은 설교학이지만 이론은 초대 교부들과의 유명한 설교가들을 연구하는 시간이었다. 그리고 대부분 주로 설교의 기술과 방법을 습득했다. 비디오 촬영을 하면서 교수님에게 피드백을 받았다. 어떻게 설교를 해야 하는가? 설교학의 대부분은 설교의 방법에 대해서 공부했다. 언어와 자세와 음성 톤과 리듬과 강조점 등 설교를 잘하기 위한 방법을 배웠다. 그런데 대부분의 방법은 연설 기법과 세상의 강의법들을 차용한 것이었다. 한 학기 동안 심혈을 기울여 한 과제가 있다. 그것은 신문과 기사 스크랩 예화를 주제별로 모아 화일을 만드는 일이었다. 일종의 예화를 모아 파일을 만들면 평생 설교의 자산이 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을 설교에 적용한 예는 거의 없었다. 그리고 설교의 방법 툴을 4가지 정도 알려주면서 그것에 대입하면 설교가 된다는 내용이 설교학에서 배운 핵심 강의였다.

당시에도 이해가 안 되는 점이었지만 정작 성경본문 연구는 해본 적이 없다. 각자 자기가 좋아하는 본문을 택하여 설교 이론과 틀에 따라 설교문을 작성하는 것이 전부였다. 마치 좋은 에세이를 작성하여 파토스, 에토스, 로고스의 소피스트의 기법을 따라 청중을 설득하는 기술을 가르치는 것이 설교학의 핵심이었다. 이것은 일반 연설문 작성과 같은 것이었다. 다만 성경을 구절로 삼는 다는 점이 달랐다, 그리고 한가지 전제는 건물 교회와 강단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설교였다. 만약 강단이 없는 소그룹에서 설교한다면 이런 설교기법은 적용이 힘든 배움이었다. 어찌 보면 건물교회가 아닌 초대교회 공동체에서는 사용이 어려운 설교학이었고 교회성장학의 배경 속에서 형성된 설교학이었다. 지금 대부분의 설교는 이런 배경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대부분 지금 교회에서 이루어지는 설교는 설교학에서 배운 것을 그대로 적용하고 있는 셈이다

왜 이런 설교학이 형성되었을까? 그것은 헬레니즘화된 교회에 맞춘 설교학이었지 성경이 말하는 설교와는 거리가 있었다. 이렇게 한번 길들여진 목회자와 설교방식을 다시 개혁하는 것은 만만치 않다. 종교개혁자들조차도 이 설교의 영역에서는 개혁을 외치지 못했다. 여전히 당시의 설교 방식을 그대로 고수했고 이것은 로마교회를 무너지게 한 잘못된 유산임에도 거의 손을 못대고 지금까지도 이 방법을 고수하고 있다. 이제는 성경을 몰라도 설교가 가능한 시대가 되었다. 설교문만 잘 작성하여 그것을 감정과 힘을 넣어 읽으면 설교가 되는 지금의 설교 방식은 과감하게 개혁되어야 한다.

 

헬레니즘화된 교회의

입맛에 맞는 설교 기술

증언자인가? 설교자인가?

성경의 설교는 성경 한 두 구절 읽고 그것을 논리적으로 이해시키고 설득하는 설교가 아니었다. 성경의 설교는 복음 사건을 그대로 보여주고 들려주는 것이었고 거기에 맞는 가르침을 동반한 설교였다. 그러나 성경에는 지금같이 설교문을 작성하여 설교하는 방식은 찾아보기 어렵다. 오히려 설교 표절도 가능한 길을 설교학이 열어 놓았다. 그러다 보니 실제로 목회자의 설교 표절이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이 한국 교회 상황이다. 이것은 머지않아 인공 지능이 설교를 대체하는 상황이 생길수도 있다. 실제 지금의 신학교에서 설교는 AI의 도움을 받아 설교문이 작성되고 있는 것이 대세로 가고 있다. 이것은 성경이 없어도 설교가 되는 그런 시대가 도래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런 점에서 설교라는 이름부터 성경적인 이름이 아니다는 점에서 전반적인 검토가 필요하다. 설교는 일반적인 명칭이지 성경의 말씀을 전하는 측면에서 보면 성경의 지침과는 적합하지 않다.

교회에서 말씀을 전하는 것을 설교라고 말하는 것은 오해 소지가 많다. 설교란 명칭은 인간의 말로 하나님의 말씀을 설명하고 설득하는 의미가 강하다. 성경 자체 보다는 설교자에게 초점이 있다. 말씀이 주체가 되는 것 보다 설교자에게 중심이 있다. 누가 설교하는가? 어디서 설교하는가? 에 관심이 있다. 설교자에 따라 은혜가 달라진다. 그런 이유로 성경은 설교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는다.

그러나 성경은 설교라는 표현 보다는 대언, 증언이라는 명칭을 사용한다. 신약의 대표적인 영향력 있는 설교자는 세례요한이다. 그런데 세례요한을 설교자로 말하기 보다는 증언자라고 말한다. 요한복음에서 강조하여 사용하는 단어는 증언자이다. 예수님 자신도 증언자로서 말했지 자신을 설교자로 말하지 않았다. 설교자라는 말은 강단을 전제한 중세 로마가톨릭 성당에서 사용된 것이다. 강단 중심에서 사용되는 명칭이다.

성경은 절대적인 것으로 인간이 그것을 제대로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것을 설교라는 방식으로 전한다는 것 자체가 모순이다. 절대적인 것은 절대적인 것으로만 설명이 가능하다. 상대적인 인간의 말을 아무리 잘 구사해도 절대적인 진리를 설명할 수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가장 좋을까? 성경을 그대로 읽는 것이다. 다만 성경을 읽을 때 온몸으로 움직이면서 읽고 믿음으로 읽은 말씀을 받는 것이다. 반복해서 성경을 함께 읽으면 좋다. 이것은 절대적인 말씀은 절대적인 말씀을 통해 깨달아지는 원리를 적용하는 측면에서 보아도 합당하다. 그러면 설교를 할 때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

 

인간의 말이 드러나지 않고

말씀 그 자체가 드러나게

가능한 절대적인 말씀을 약화시키는 방법과 기술은 사용하는 것을 자제하는 일이다. 말씀 자체를 살리고 그것을 드러내는 방법을 적용 하는 일이다. 인간의 말을 많이 하기 보다는 가능한 절제를 하고 본문을 나타나게 하는데 방향을 정하는 설교가 진정한 설교다. 설교를 마치고 갈 때 성경 자체와 본문이 마음에 남고 그것이 일주일 동안 지배하는 설교가 좋은 설교자가 아닐까?

 

저작권자 © 본헤럴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관련기사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모바일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