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 괴테는 “항구에 정박되어 있는 배는 안전하다. 그러나 그것이 배의 존재 이유는 아니다”라고 했다. 되새김해야 할 귀한 문장이다. 80대 중반을 향해 가는 분께서 “열정에는 나이가 없다. 내 인생에는 노인이 없다. 죽어라 뛸 것이다”라는 새해 문자를 보내왔다.
생각이 늙으면 노인이 된다. 나이와는 상관없다. 생각이 죽어 있거나 병들어 있거나 꿈이 없다면, 그 사람이 청년일지라도 그는 이미 노인이다. 노인을 나이로 평가하는 시대는 이제 구시대의 유물이 되었다.
나이가 든 백발의 노인이라도 꿈과 열정, 비전과 사명을 이야기하고, 그것을 향해 도전하며 걸어간다면 그는 영원한 청년이다.
100세 시대라는 말이 이제 우리 사회에 익숙해졌다. 더 나아가 120세 시대를 공공연히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늘어나고 있다.
과거 농경사회에서는 1모작만 가능했다. 자연의 이치에 따라 살았다. 그러나 이제는 다양한 농법이 개발되면서 연중 생산이 가능한 시대가 되었다. 특히 AI를 접목한 스마트 팜 농법은 농업에 혁신을 가져오고 있다. 땅을 가지고도 1모작만 하는 사람은 어쩌면 한 달란트를 받아 땅에 묻어 둔 사람과 같을지도 모른다.
날마다 생각을 혁신한다면, 인생은 살 만하다. 인생의 열정과 희망과 도전을 잃지 않는다면 몇 모작도 가능한 시대다. 미리 자신의 인생에 한계를 정하지 말라. 한계를 정하는 순간, 멈춤이 시작된다. 그리고 더 이상 성장의 에너지는 나오지 않는다.
생각의 멈춤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날마다 말씀을 묵상하며 주님께 가까이 가는 것이다. 주님과 함께하는 것이 인생의 복이 된다. 영혼이 맑아질수록 마음도, 몸도 맑아진다. 영혼의 공간에는 마음과 생각, 그리고 육신의 공간을 움직이는 정보가 담겨 있다.
물이 탁하면 물속이 보이지 않는다. 또한 미세먼지로 인해 한낮에도 마치 화성처럼 뿌옇게 가려진 도시를 볼 때가 있다. 탁하기 때문에 시야가 가려지는 것이다. 얼마나 답답한가? 숨조차 쉬기 어렵다. 그럴 때 우리는 맑은 공기, 맑은 하늘을 간절히 바라게 된다. 그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절실히 깨닫는다.
영혼이 탁하면 인생이 보이지 않는다. 길을 잃은 사람과 같다. 답답함, 무력감, 방황, 그리고 타락이 밀려온다. 성경에는 인간의 본성을 지적한 구절이 많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렘 17:9)이라고 한다. 인간이 옷을 입고 좋은 환경에서 우아하게 밥을 먹고 차를 마시면 뭔가 인간다움이 풍긴다. 그러나 그 겉모습으로 인간다움을 평가하기는 쉽지 않다. 인간은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하다. 이것이 인간이다. 겉사람이 아닌 속사람이 인간다움을 결정한다. 인간다움은 속사람에서 나온다. 속사람이 건강하면 할 수 록 인간다움의 향기는 매력이 된다. 꽃보다 아름다운 당신이 되기 위한 가장 선한 조건은 속사람, 영혼의 맑음이다.
영혼이 탁하면 인생은 바른길보다 부패한 길을 자연스럽게 선택한다. 이것이 인간의 모습이다.
맑은 영혼을 유지하는 길은 이 땅의 물질로는 해결되지 않는다. 주님의 말씀과 함께 많은 시간을 보낼 때 찾아오는 은혜다. 영혼이 맑으면 결정도 명쾌해진다. 왜 선한 결정을 내리는 것이 어려울까? 왜 자신의 것을 내려놓는 것이 고민될까? 왜 나보다 타인을 배려하고 사랑하는 것이 힘들까? 믿음으로 사는 것이 왜 그토록 갈등을 일으킬까?
이유는 많겠지만, 결정 장애는 영혼의 맑음과 흐림의 차이에서 오는 듯하다. 내 영혼이 하나님을 열망하고 사랑한다면 결정은 자연스럽고 편안하다.
마치 선과 악, 거짓과 참, 낮과 밤, 슬픔과 기쁨, 천국과 지옥이 서로 반대라는 개념을 우리는 알고 있다. 둘 중 무엇을 선택할 것인지 묻는다면, 모든 사람은 좋은 쪽을 선택한다. 이와 같이 영혼의 맑음이 바른길을 걸어가는 힘의 근원이다.
영혼이 맑은 사람들의 고백은 비슷하다. 그것은 시편 기자의 고백과 같다.
“할렐루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찬양하라. 나의 생전에 여호와를 찬양하며 나의 평생에 내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시편 146: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