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핵찬반해법] (2) 대한민국이여! 이분법의 수렁에서 벗어나 새롭게 비상하라

  • 입력 2025.03.25 1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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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시133:1)

이분법을 조심하라

하나 된 아름다운 대한민국을 가장 싫어하는 대적이 있다. 대부분 사람은 그를 보지 못한다. 우리를 속이고 거짓으로 미혹하는 영적 실체를 보지 못하면 이 싸움에서 이길 수 없다. 그는 하늘에서 분을 내어 쫒겨 난 사단이다, 눈에 안 보이는 교묘한 사단의 주된 임무는 하나 됨을 파괴하는 일이다. 그는 뱀으로 가장하여 에덴동산에 화목하게 잘살던 인간에게 다가와 모든 관계를 분리하여 인간을 함정에 빠뜨리게 했다. 이 미혹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국민을 서로 나누고 상대방을 대적하는 실체는 사람이 아니다. 악한 영이 사람을 사용하여 이 일을 꾸미고 있다. 싸움의 실체를 알지 못하면 이길 수 없다.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하나 됨을 파괴하는 일은 하나님의 질서를 어기고 자기의 세계를 구축하려는 숨은 욕심에서 나온 것이다. ‘

이분법으로 구도를 정하고 둘 중에 한쪽을 자기편으로 끌어드리는 이런 행동은 최초의 사단의 전략이다. 모든 인간의 죄는 여기에서 시작된다. 이것을 우리는 인본주의라고 말한다. 자기의 편의주의로 선택하고 해석하는 시도로 여기에 합류하면 안 된다. 하나 됨을 파괴하는 행동은 분명히 악한 것이다. 우리는 이 계략을 잘 분변하고 함정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 하지만 거의 이 구도를 사람들은 선택하고 자기 욕망을 위해 적용하는 것이 우리의 문제점이다,

지금 한국의 정치와 사회는 양분화로 몸살을 앓고 있다. 진보와 보수 이름으로 국민이 양극단에서 자기주장을 하는 대결 구도가 점차 심각해지고 있다. 이것은 인간이 사는 곳에는 늘 일어나는 일상의 일들이지만 요즈음에는 그 강도가 심해지는 경향이 있다.

특히 한국인에게 이분법 구조가 형성된 것은 정치적, 역사적, 공간적 배경을 이해해야 한다. 지정학적으로 남과 북으로 나누어져 전쟁 중에 있기에 분리와 이분법으로 생각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청나라와 일본의 침략을 경험한 것과 전쟁을 경험한 세대는 경험적으로 이분법은 자연스럽게 몸에 체득된 우리의 생존의 수단이기도 했다. 교회도 그런 뿌리에서는 예외가 아니다.

 

보수와 진보로

갈라진 대한민국 

거대한 이분법 패러다임-인본주의 헬레니즘

모든 것을 이분법으로 판단하도록 인류를 세뇌시킨 거대한 패러다임이 있다. 수천 년 동안 세계 역사를 지배하면서 지금까지 인류를 괴롭히고 전쟁으로 나라를 파괴한 사상이 있는데 인본주의 헬레니즘이다. 지금 대한민국이 첨예하게 맞선 진보와 보수도 이 패러다임에 기초를 두고 있다. 이 패러다임에 사로잡힌 나라는 한때는 세계 최강을 이루었지만 결국은 모두 역사에서 사라졌다. 애굽. 바벨론. 바사. 헬라 . 로마 등이 헬레니즘 이분법의 통치로 멸망을 자초했다. 이분법의 뿌리는 인간의 자만과 탐욕이다. 이분법의 과정은 욕심이 잉태하고 죄를 낳고 사망에 이르는 수순으로 진행된다. 이런 이유로 이분법은 모두를 망하게 하는 우리 속에 퇴출해야 할 제1순위다. 그런데 지금 우리나라가 이런 악성 바이러스인 헬레니즘 이분법에 종노릇하고 있다. 이분법은 매력적이어서 한번 빠지면 중독처럼 헤어나기 힘든 특징을 갖고 있다. 지금 대한민국을 살리는 길은 어떻게 헬레니즘 이분법에서 구출하느냐이다.

한덕수 "극단 갈라진 사회는 불행뿐" / SBS
한덕수 "극단 갈라진 사회는 불행뿐" / SBS

한민족이 왜 서로 다투는가?

왜 우리는 서로 다투는가? 생각해 보면 실제 원인은 마음에 있다. 그것은 인간의 탐욕에서 나온 것이다. 십계명을 보면 마지막 10계명은 탐심을 내지 말라는 것이다. 십계명은 열 마디 말씀이다. 엄밀히 말하면 열 가지라고 이해하기보다 모두 하나 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다. 예수님은 탐심이 곧 우상숭배라고 말했다. 십계명중에 1-3계명은 하나님에 대한 것으로 우상숭배와 관련이 있다. 안식을 지키지 못하는 것도 탐심 때문이다. 살인. 도적질. 거짓말. 간음, 거짓증거 등은 모두 마음속에 있는 탐심에서 나온 것이다.

결국 양분화되어 서로 다투는 것은 외적인 형태와 보이는 것으로 갈등이 생기고 한편으로 서는 이유는 모두 마음의 욕심이 근원이다. 그런데 이것은 각자 마음속에 숨어 있기에 누구도 알아차리지 못한다. 이분법의 근원은 내적인 욕망이다,

탐욕과 우상숭배로

갈라 선 대한민국

지금 우리는 국가의 운명이 법에 달려 있다고 생각하며 마지막 결정을 헌법재판소에서 위임하고 있다. 법은 옳고 그름을 판결하는 역할을 한다. 정의의 관점에서 법을 제정하고 그것을 지키는 법치주의는 민주주의에 가장 기본이 되는 상식이다. 이 상식이 무너지면 나라를 세우기가 어렵다. 법이 사라지면 그때는 힘이 작용하면서 더 수습하기 어려운 상황이 된다. 그래서 민의에 의해 법을 제정하고 법에 따라 실행한다. 이것이 가장 이상적인 국가의 모습이다, 문제는 인간이 정한 법이 모든 질서를 다 세울 수 없다. 왜냐하면 법은 최소한의 기본적인 국민의 약속이기 때문에 가능한 그 약속을 지키는 것이 합당하다.

문제는 우리가 법을 만든 사람이지만 우리 모두 지킬 수 없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하나님이 법을 우리에게 주신 이유는 모든 법을 다 지키라는 것이라기 보다는 나는 법을 지키지 못하는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함이다. 법은 우리를 악에서 나를 제어하는 기능이 있다. 법을 만든 이유는 법을 통하여 자기가 문제를 깨닫고 자발적으로 법을 지키는 사람이 되기 위함이다. 민주시민으로서 살기 위해서다. 법 때문에 사람이 존재하는 것이 아닌 이웃을 사랑하고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기 위함이다. 질서를 지키고 이웃을 배려하고 자신의 자유를 지키며 다른 사람의 자유도 인정하여 행복한 공동체를 이루기 위함이다. 사랑이 없는 법은 의미가 없다. 사랑으로 법을 완성하는 것이 법 제정의 이유다. 이것은 법을 실천하고 판결할 때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원리다. 결국은 사랑이다. 이 판결을 통해 자신의 허물을 겸손하게 깨닫고 스스로 책임을 지며 아울러 다른 사람의 허물을 덮어주고 용서하며 서로 동반자로 다시 세우는 것이 법의 역할이다.

 

법을 제대로 알아야 사랑이 보인다

그런데 문제는 법을 인간이 지킨다는 태생적 한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전제해야 한다. 기계는 미리 작동시켜 정한 매뉴얼에 따라 하면 된다. 그러면 고장날 일이 없다. 비행기가 잘 운행을 한다. 그러나 인간은 기계가 아닌 마음과 영혼을 가진 존재다. 눈에 보이는 일차원적인 부당한 행위를 법으로 질서를 세우고 제제와 조정을 법으로 가능하다. 이것이 법의 역할이다. 문제는 모두에게 평등한 법으로 적용되어야 하는데 공평하게 법 적용이 현실적으로 힘들다. 왜냐하면 인간은 육적인 존재이지만 또한 마음을 가진 존재다. 그런 사람을 보이는 법조문으로 행동은 제제할 수 있지만 마음까지 정죄하거나 강요할 수 없다. 그래서 인간에게는 정의 법으로는 한계가 있다. 정의법으로는 인간은 모두가 죄인이다. 누구도 의인이라 말할 수 없다. 판단하고 고소하고 심판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아닌 죄인인 인간이 한다. 죄인이 죄인을 판결하는 것이 모순이지만 직무에 따라 심판의 권한을 법관에게 부여하고 그 일을 국민이 위임을 했다. 법에 따라 정직하게, 양심대로 소신 있게 판결을 해야 하는 것이 법관의 위치다.

 

네가 공의법을 아는가?

이것을 해결하는 또 다른 법이 필요한데 그것이 공의이다. 공의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헤세드. 체다카로 쓰여진다. 정의는 정의가 쉽다. ’미쉬파트‘란 말로 재판을 말한다. 법에 따라 판단하면 된다. 성경에도 두 가지 법이 존재한다. 정의와 공의다. 공의를 인애와 사랑과 자비란 말로 번역하기도 한다. 정의는 눈에 보이는 법이라면 공의는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베푸시는 사랑의 법이 여기에 해당된다. 재판관은 두 가지가 필요하다. 법에 따라 판단하는 정의와 정의법으로 해결이 안 되는 상황에서 문제를 해결하는 공의법을 가지고 있어야 바른 판결이 된다.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아닌 두 법이 공존하면서 해결점을 찾아가는 것이 지혜다. 이런 경우에는 두 편이 모두 수긍하게 된다. 필자는 공의를 창조적인 법이라고 말하고 싶다. 기존법으로 해결이 어려운 경우에 이런 창조적 법이 주어진다면 멋있는 판결이 된다. 이것은 인간의 욕심과 자기 고집을 주장하거나 법만 강조해서는 해결이 안 된다. 한 차원 깊게 나아가지 않으면 얻을 수 없다. 공의법은 하나님의 마음이 담긴 것으로 미완성 되는 정의법을 공의법으로 이 문제를 완성한다.

흔히 난감한 판결을 할 때 솔로몬 재판의 지혜를 많이 말한다. 그러나 솔로몬의 지혜는 하늘이 주신 것으로 보통 사람에게는 없는 특별한 은혜다. 솔로몬 재판은 보이는 증거나 말을 듣고 재판하는 수준을 넘는다. 물증이나 말과 행동, 또는 증인에 의존하는 기존의 재판으로는 해결이 어렵다. 분명히 심증으로는 판단이 가지만 그것을 객관적으로 공감이 가지 않으면 그 판결은 문제를 일으킨다. 솔로몬은 나타난 현상보다 사람 내면에 초점을 두고 재판했다. 누가 진짜 어머니인가? 어머니의 마음을 시험해 보는 데서 해결점을 찾았다. 숨어 있는 마음을 찾는 것이 지혜다. 재판은 사람의 마음의 상태를 살피는 것이다. 사람 자체에 관심을 두는 것이 재판의 핵심이다.

공의법은 사랑의 법으로 모두에게 힘과 위로와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힘이 있다. 공의법은 우리나라 헌법에는 거의 없다. 정의법은 이분법으로 헬레니즘 방식의 인본주의 판식이다. 지금 우리에게는 정의법만 있다. 정의법과 공의법은 모두 필요하다.

예수님에게 찾아온 무리들이 있었다.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힌 한 여인을 데리고 와서 율법에 따라 돌에 쳐서 죽여야 한다고 말했다. 법을 어긴 사람은 법에 따라 처리해야 정의가 살아 있는 공동체가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런 경우에 법에 따라 심판하고 죄를 묻는다. 이것이 상식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모든 일을 그렇게 처리한다면 모든 사람은 모두 돌에 맞아 죽어야 한다. 왜냐하면 마음으로 간음한 것이라고 법을 적용하면 누구도 살아남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법을 어겼으면 법에 따라 돌로 치라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사람들이 돌을 들어 치려는 순간 한마디를 더하신다. “단! 죄 없는 사람이 먼저 죽이라” 그러자 하나둘씩 사람들이 물러갔다. 예수와 여자 혼자만 남았다.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그리고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 놀라운 해법이다. 둘을 모두 살린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공의법이다. 이것이 신본주의 헤브라이즘 법 적용이다.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다. “모든 것이 가하나 가한 것이 아니다. 모든 것은 덕을 위해 하라”, “가이사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모두 둘을 이분화하고 정죄하지 말고 함께 문제를 풀어 가야 한다.

 

위기 속에서 둘이 하나로 가는 법을 배우라

지금까지 대한민국은 보수와 진보 두 개의 선택지밖에 답이 없었다. 그것은 전쟁의 상처로 분열된 남북의 서로 다른 체제와 여전히 끝나지 않은 전쟁 국가라는 특별한 상황이 지금 두 개로 나누는 상황이 되었다. 진보와 보수, 좌파와 우파, 영남과 호남의 두 개로 나누어지는 뿌리는 북한을 어떻게 대하는가에 따라 정체성이 달라진다. 우리는 자기가 정한 노선을 주장하면서 행복한 자유민주국가를 외치지만 여전히 갈등은 깊어지고 있다

탄핵의 반대와 찬성으로 분리되는 구조는 철저히 이분법의 헬레니즘을 토대로 하고 있다

그렇게 자기주장을 외쳐도 문제가 해결이 안 된다는 것은 지금 사용하고 있는 방법을 바꾸라는 것이다. 우리도 모르게 형성된 이분법이 구조를 따른다면 한국의 미래는 여전할 것이다. 그동안 대한민국은 이분법에 매여 다툼과 싸움이 일어났다. 이제는 그 프레임에서 벗어나야 한다. 우리도 모르게 몸에 밴 헬레니즘 이분법에서 국민들과 모든 지도자들과 정치가가 달라져야 한다. 새로운 방식을 따라야 하는데 이것이 헤브라이즘이다, 우리는 더 다른 방식으로 하나 되는 길을 찾아가는 것이 미래의 한국을 세우는 길이다. 갈등과 대적과 비난에서 이제는 일치와 화해와 배려와 인정과 나눔으로 나가야 한다. 그래야 대한민국이 다시 비상할 수 있다. 그렇게 될 때 대한민국은 평화와 자유와 즐거움이 있는 행복한 나라가 될 수 있다. 해결이 안 되는 방법을 고수하면 파멸에 이른다. 이런 점에서 지금 위기에 처한 대한민국이 새로운 방식으로 민주주의를 이루고 국민이 통합하는 기회가 된다. 무엇이든지 편하면 방법을 바꾸거나 개혁을 안 하는 법이다. 위기가 기회다. 방법을 바꾸는 결단이 국민 모두에게 있어야 한다. 이일을 위해 대통령이 역할을 하면 가장 좋다. 헌법재판소도 이 역할을 하면 좋을 것이다. 이것이 진정 대한민국을 구하는 길이다. 행복은 본질적 가치에서 나온다. 상대방이 적게 하기고 나는 많이 가지면 과연 행복할까? 이분법으로는 절대행복이 오지 않는다. 본질적 가치와 변하지 않는 진리가 우리를 인도해 나갈 때 진정한 행복국가가 된다.

좌우편으로 나누는 이분법의 패러다임은 인본주의로 마지막은 모두를 패망에 이르게 된다. 한쪽만 죽는 것이 아닌 모두가 죽는 것이 이분법이다. 좌우가 같이 가는 길을 찾아야 모두가 산다. 좌편과 우편이 나누어있지만 방향은 하나다. 그래서 좌우편은 한 몸이다. 사람의 몸은 좌우로 나누어있지만 그것은 몸의 균형을 잡고 앞으로 나가는데 한 마음이 되어야 한다. 한쪽이 기울어지면 몸이 흔들거려 넘어진다. 서로 도와 몸을 살려야 한다, 날개 하나가 무너지면 그 비행기는 추락한다. 진보와 보수도 마찬가지 원리다. 나누는 이유는 서로 하나되기 위해서다. 서로 다투는 일이 생기면 자기의 힘을 빼고 권한 안을 상대방에게 주어 서로 하나되는 일에 목표를 두어야 한다.

문제가 발생했는데 예전처럼 이분법으로 야당이 힘을 가졌다 해서 하나를 무시하고 혼자 법을 정한다면 배가 한쪽으로 기울어져 그배는 침몰하게 된다. 이번 탄핵 문제도 이런 기본 상식을 지키지 않다 보니 혼란이 온 것이다. 여당과 야당 모두 서로의 책임이 있다. 무조건 한쪽으로만 기울면 그 배는 침몰한다. 이것이 진리이다. 이 가치를 이루는 진보와 보수가 되면 모두 의미가 있다. 하나 되는 것이 공동선이다. 이것을 조율하는 것이 정치다. 국회 의원에 당선되면 하나 됨을 이루는 목표와 원칙에 선서하고 의정활동을 해야 한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진리다. 우리는 이런 방식을 헤브라이즘이라고 말한다, 신본주의로 하나님은 모두의 하나님이시다. 아버지는 자녀들처럼 서로 반목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서로 화목하게 지내는 것을 원한다. 서로 하나 되는 길을 찾자.

 

아브라함과 황희 정승을 만났다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이 조카 롯과 같이 애굽에 갔다가 돌아오면서 많은 재물을 얻어 그것을 즐거워하다가 재물이 많아 다투는 일이 생겼다. 이때 삼촌인 아브라함이 조카에게 말한다. 우리 형제이니 서로 싸우지 말고"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겠다”라고 제안한다. 힘이 있는 사람이 양보하고 약한 자를 배려하는 것이 이분법을 해결하는 키다, 서로 싸우는 것은 옳지 못하다는 이것이 공동가치가 되면 좋을 것이다. 아브라함은 비록 물질은 작게 가졌다 해도 그가 얻은 것은 하나 됨을 이루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 되었다. 우리도 서로 번갈아 가면서 좌하고 우하면 얼마나 좋을까?

“고려와 조선시대를 통틀어 최장수 재상(국무총리와 같은 사람)이 있다. 그는 황희 정승이다. 고려 말 3명, 조선 초 4명의 왕을 모신 재상으로 자신을 극렬하게 반대했던 황희를 중용한 사람이 세종대왕이다, 황희정승이 지금 한국의 탄핵정국을 보고 해법을 제시한다면 어떻게 했을까를 생각하며 한 일화를 소개한다.

어느 날 황희 정승 집 두 여종이 서로 말다툼을 심하게 하고 있었다.

“손님이 오시니까 음식 준비를 먼저 해야 돼.”

“아니야,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먼저 청소해야 한다고 생각해.”

화가 난 한 여종이 황희 정승에게 달려와 자신의 억울함을 하소연했다.

“대감마님, 손님이 오시면 배고프시니까 음식부터 준비해야 하는 것이 맞지요?”

그러자 그는 “네 말이 옳다.”라고 답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다른 여종이 와서 입을 열었다.

“아닙니다. 집안이 어지러운데 손님이 오시기 전에 청소부터 먼저 해야 하는 거지요.”

황희 정승은 말을 다 들은 후 고개를 끄덕이며, “네 말도 옳다.”라고 답했다.

마침 옆에서 이를 지켜보던 조카가 따지면서 물었다. “아니 숙부님 이상 하십니다. 옳고 그름을 가려주셔야지, 두 사람 말이 다 옳다고 하시면 어떡합니까?”라고 말하자 그는 또다시 “네 말도 옳다.”라고 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정승 부인이 나서서 말했다.

“다툼이 있으면 누가 옳고 그른지 윗사람이 정확하게 알려주어야 집안의 법도가 서는데 그렇게 흐리멍덩하시면 어떻게 하십니까?”

부인의 말을 듣던 항의 정승은 또 말했다.

“듣고 보니 당신 말도 옳구려.”

“인본주의 헬레니즘 방식은

내 기준에 따라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지만

신본주의 헤브라이즘은

나를 포기하고 둘을 하나로 만드는 길을 찾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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