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원영목사]본질, 변하지 않는 진리(마21:1-11)

  • 입력 2025.04.21 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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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는 글]

(1)마21장은 예수님이 예루살렘 입성하는 장면이 나온다. 3년 6개월 동안 이 땅에서 사역을 하시고 만왕의 왕이 되시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러 예루살렘에 올라오신 사건으로 시작된다.

예수님 입장에서 볼때 예루살렘에 올라오신것은 죽으러 오는 길이었다. 자기 몸이 만신창이가 되어 찢어지고, 살점이 떨어지는 무시무시한 고통이 기다리는 십자가 길이요, 고난의 길이었다.

그러나 죄인의 입장에서 볼때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마지막 사역을 완성시키고 인류에게 구원의 선물을 주는 통로를 만들어 놓는 위대한 사건이었다.

(2)이사야 선지자는 메시야 탄생 600년 전에 메시야의 고난을 예언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사53:4,5). 십자가의 사건은 인간의 모든 저주를 짊어지시고, 부요함의 축복을 주시기 위한 위대한 희생이요 그분의 헌신인 것이다.

 

[본문연구]

주님은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는 걸어서 들어오시지 않았다. 제자들에게 마을에 내려가서 나귀 새끼를 풀어서 내게로 끌어오라고 하셨다. 왜 예수님이 말이 아닌 나귀를 탔을까?

 

1)선지자의 예언의 말씀을 성취하기 위함이다.

(1)마21:4,5절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이 말씀은 구약성경 스가랴서 9장 9절을 인용한 말씀이다.

예수님의 사건은 모두 구약에 예언되었다. 구약은 예언이고 신약은 성취다. 성경은 항상 짝이 있다. 신약에서 안풀리는 말씀은 구약에서보면 해석이되어지고, 구약에서 이해가 안되는 말씀은 신약을 통해서 선명하게 이해가 된다.

(2)예수님은 구약에 예언된 말씀에 순종했고, 그것을 이루셨다.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시는 것이 예수님의 삶이었다.

요5:30절, “나는 아무것도 내 스스로 할 수 없고 내가 듣는 대로 심판하노라. 또 내가 나 자신의 뜻대로 하지 아니하고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뜻대로 하려는 고로 나의 심판은 의로우니라”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몸부림치셨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산다는 것은 축복이다. 말씀을 믿고 그대로 따라하는 것이 자녀의 도리다. 예수님은 구약의 말씀을 성취시켰다. 우리속에 주님의 말씀이 성취되어지기를 축복한다.

 

(3)세례요한은 마지막 구약 율법의 예언자였다. 세례요한은 자신에게 주어진 길을 멋지게 사신 분이다. 세례요한은 자신에게 주어진 시대의 사명을 알고 싶어서 그는 광야에서 혹독한 훈련의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빈들에 있는 세례요한에게 하나님의 영이 임했다. 하나님의 뜻을 알았다. 세례요한의 사명은 예수님의 길을 평탄케하는 것이다.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이 세례요한에게 물었다, 네가 엘리야냐 아니면 구약에서 예언된 선지자 메시야냐? 세례요한은 선지자 이사야의 말을 인용하면서 자신의 사명을 분명하게 말했다.

“가로되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다”

(4)예수님은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라고 말했다(마12:50). 내 삶속에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원한다. 나의 뜻이 아니다. 하늘의 뜻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기를 소원하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 위해 몸부림치며 헌신하며 기도하며 믿음대로 살려고 수고하는 삶이 되라.

 

왜 나귀를 타고 입성했는가?

2)예수님은 정복자가 아니라 겸손과 평화의 왕이기 때문이다.

(1)예수님은 예루살렘 입성하실 때 말을 타지 않고 나귀새끼를 타고 입성하셨다. 말은 군사용이다. 말은 힘을 상징한다. 대장군의 말은 화려하다. 말의 화려함을 보고 그 사람의 직위를 알 수 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나귀를 타고 입성하셨는데, 다 자란 나귀가 아니라 나귀 새끼를 타고 입성하셨다. 나귀는 평화를 상징하는 동물이다. 이것이 예수님의 본질이다.

(2)항상 낮은 자리를 찾아가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우리가 되찾아야 할 진리이다. 좁은 길을 걸어간다는 것은 항상 낮은 자리를 선택하는 것이다. 평화를 누리기 위해서는 누군가 낮아져야지만 가능하다. 높아지려고 하면 항상 갈등과 다툼과 이기심이 가득차게 된다. 믿음생활이란 낮아지는 훈련이다. 교회는 높아지는 곳이 아니다. 교회는 낮아지는 곳이다. 목사와 중직자는 대접을 받고 높은 자리에서 지시하고 그런 것이 아니다. 자신을 버리고 낮아지고 또 낮아져야 한다. 그래야 주님의 나라가 주님의 뜻이 세워진다.

(3)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서 서로 높아지려고 싸웠다. 요한과 야고보의 어머니가 예수님께 인사청탁을 했다. 나의 아들들을 당신의 나라에서 오른 쪽과 왼쪽에 앉게 하옵소서. 자들이 그것을 보고 분개한다. 높아지려고 하면 공동체는 파괴되는 것이다. 동체의 핵심은 겸손한 모습으로 낮아지는 삶을 서로 지향할 때 평화가 유지되게 되는 것이다.

(4)우리는 예수님처럼 새끼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 입성하면서 사명의 길을 끝까지 걸어가셨던 주님의 모습을 닮아가는 제자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사명의 길은 말을 타는 것이 아니다. 나귀새끼를 타고 걸어가는 것이다. 말은 화려하지만, 나귀새끼는 초라하다. 그런데 주님은 나귀새끼를 타고 사명의 길을 걸어가셨다. 본질을 잃어버리지 말라. 내가 왜 예수님을 믿는지 본질을 잃어버리지 말라. 본질을 잃어버리게 되면 남는 것은 거짓과 위선, 교만과 멸망밖에 없다.

 

3)제자들에게 나귀새끼를 빌려오라고 합니다. 그러시면서 하시는 말씀이 아주 흥미롭다. 주가 쓰시겠다 하라(3절).

(1)나귀새끼 주인은 제자들이 와서 자신의 재산인 나귀를 돈을 지불하지 않고 주님이 쓰시겠다고 하면서 끌고 갔을 때 안된다고 값을 지불하라고 요구하지 않고 즉시 보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서 삶의 지혜를 배운다. 우리의 시간과 재능과 물질과 사업장과 직장과 결혼에 있어서 주님이 주님의 일을 위해서 쓰시겠다고 한다면 네 여기있습니다. 주님 나라에 사용하십시오 라고 말할수있는 믿음과 헌신과 순종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기적의 주인공, 축복의 통로가 된다.

(2)하나님의 사람들은 주님의 부르심앞에 망설이지 않고 즉시 응답했다. 그 결과 위대한 인생의 반열에 올랐다.

-주님의 부르심앞에 이사야 선지자는 내가 여기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이 순간이 정치적 야망에서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이스라엘의 대선지자로 민족앞에 새로운 모습으로 설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영적 타이밍을 놓치지 말라.

모든 것은 때가 있습니다. 때가 지나면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 하나님의 일도 때가 있다. 신앙은 믿음은 지금 현재다. 현재를 믿음으로 반응하면 반드시 기적과 하나님의 영광이 회복된다.

 

-어린 사무엘은 잠을 곤히 자고 있을 때 하나님이 부르셨다. 부르실 때 즉시 깨어 달려갔다. 하나님의 부르심앞에 내가 여기있나이다 말씀하옵소서. 하나님은 어린 사무엘에게 엘리 집안의 포악과 부도덕을 영원토록 심판하겠다고 전했다. 사무엘에게 하나님의 뜻을 전했다. 이 사건 이후로 하나님이 사무엘을 이스라엘의 영적리더로 세워주셨다(삼상3:19). 주님의 부르심에 우리는 민감하게 반응해야 한다. 이것이 평범한 사람과 비범한 사람과의 차이점입이다. 작은 차이로 인해 지도자가 되는 것이다.

-5병2어의 기적의 사건은 한 어린이가 자신의 도시락을 내어 놓았다. 도시락을 내어 놓은 사람은 어린아이뿐이었다. 찰라의 순간 자기의 것을 내려놓았기에 그 아이는 평생 잊지못할 기적의 사건에 주인공이 된 것이다. 신앙이란 타이밍이다. 하나님이 원하실 때, 공동체가 필요할 때 그 요구앞에 순종하고 내것을 내어놓는 거룩함이 기적의 인물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타이밍을 잘맞추었다.

-베드로는 어부다. 예수님이 “나를 따르라‘ 그 한 마디에 즉시 그물과 배를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라서 위대한 지도자가 된 것이다.

-아브라함은 75세의 나이에 이방민족가운데서 우상장사를 하며 살던 평범한 가장이었다. 어느날 영광의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네가 떠나면 네게 복을 주고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겠고 큰 민족을 이룰 것이다. 이 말씀을 믿고 즉시 말씀따라 순례자가 되었다. 그 순간의 선택이 믿음의 조상이 된 것이다.

 

4)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9절)

무리들은 예루살렘으로 입성하는 예수님을 향해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호산나는 구원하소서라는 의미이다. 무리들은 소리쳤다. 구원하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1세기에 있었던 군중들의 외침이 오늘 한국교회의 외침이요 우리들의 외침이 되기를 소원한다. 우리의 구원자는 오직 예수님밖에 없다(행4:12).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을 무시하고, 교회를 무시하고, 신앙인들을 무시하고 조롱해도 예수님은 구원자다. 이것이 변하지 않는 영원한 진리이다. 예수님이 이름 없이는 우리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 우리 인생의 유일한 구원자는 오직 예수님 한 분 밖에 없기 때문에 예배를 생명처럼 여기고 예배한다.

 

최원영목사. 본푸른교회. 본헤럴드 및 TBMC 대표, 서울신대신학박사. 등
최원영목사. 본푸른교회. 본헤럴드 및 TBMC 대표, 서울신대신학박사.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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