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에서 흔히 잘못 쓰이는 단어 몇 개를 나열해 보겠습니다.
‘가롱, 그리세린, 나염, 나이롱, 로얄제리, 메론, 무랑루즈, 부르스, 빠레트, 아랑 드롱, 우담바라, 팜프렛, 프랑카드.’
이들 단어가 모두 받침 리을(ㄹ)이 하나씩 빠졌다는 공통된 오류를 지니고 있습니다. 따라서 바른 표기는 이렇습니다.
‘갤런, 글리세린, 날염, 나일론, 로열젤리, 멜론, 물랭루주, 블루스, 팔레트, 알랭 들롱, 우담발라, 팸플릿, 플래카드.’
강의 중에 가끔 수강하신 분들에게 ‘-을’로 끝나는 우리말 2음절 단어 5개를 들어 보라는 퀴즈를 즐겨 내곤합니다. ‘가을’, ‘고을’, ‘노을’, ‘마을’까지는 그런대로 대답을 잘 내놓는 편이지만 마지막 한 가지 ‘리을’을 바로 내놓은 사람은 드물었습니다. 혀끝을 잇몸에 가볍게 대었다가 떼거나, 잇몸에 댄 채 공기를 그 양옆으로 흘려보내면서 내는 소리를 언어학에서 유음(流音)이라 하는데, 유음에 해당하는 우리말 자음이 바로 ‘리을(ㄹ)’입니다.
개인적인 경험에 따르면 중국인 중 ‘라라라’처럼 초성 리을을 제대로 발음하는 사람은 드뭅니다. 중국어 발음기호인 병음(拼音) 중 ‘르(r)’가 있긴 합니다만 우리말의 초성 리을 발음과 전혀 다릅니다. 우리말의 초성 리을 발음은 혀끝이 입천장을 향하면서 혀가 접히거나 말리는 현상을 보이지만, 중국어 발음부호 ‘r’의 발음은 혀가 펴지는 상태를 보입니다. 아마도 ‘르’와 ‘즈’의 중간 소리라고 하는 게 맞을 것 같습니다. 볼펜으로 혀를 누르며 이 발음을 연습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우리말을 공부하면서 자음 중에서 유음 리을에만 나타나는 특징을 몇 가지 발견했습니다. 모양도 발음도 가장 아름다운 이 리을은 경우에 따라 스스로 사라지는 수줍음(?) 잘 타는 자음입니다. 이 수줍음을 잘 타는 리을의 특징을 구체적으로 정리해 봅니다.
첫째는 겸손하다는 것입니다. 리을은 앞장세우면 겸손해서(?) 니은(ㄴ)이나 이응(ㅇ)에게 자기 자리를 내주고 사라집니다. ‘로인(老人)’이 ‘노인’으로, ‘력사(歷史)’가 ‘역사’로 변하는 경우인데 이를 ‘두음법칙’이라 하지요.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요한복음 3:30) 하며 예수님께 기꺼이 자리를 내주고 사라지는 세례 요한의 겸손한 모습입니다.
둘째는 분수를 안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설자리가 아니면 사라집니다. ‘날다’가 활용되면 ‘날-십시오’가 아니라 ‘나십시오’, ‘날-읍니다’가 아니라 ‘납니다’, ‘날-는구나’가 아니라 ‘나는구나’처럼 리을이 사라집니다. 받침 ‘ㅅ, ㅂ, ㄴ’이나 어미 ‘-오’가 따라오면 설자리가 아니라고 판단하고 사라집니다. ‘리을 탈락’이라 하지요.
비스가산에서 가나안을 바라보며 무덤도 감추고 사라진 “땅 위에 사는 모든 사람 가운데서 가장 겸손한 사람”(새번역 민수기 12:3) 모세의 모습 같습니다.
셋째는 사랑이 많다는 것입니다. 리을은 사랑스럽게 동생(?)인 미음(ㅁ)이 오면 자리를 내주지도, 사라지지도 않고 좁은 받침 자리에 미음과 함께 지냅니다. ‘만들다’나 ‘대들다’가 활용되어 어미 미음을 만나게 되면 ‘만듦’, ‘대듦’처럼 명사형을 만듭니다. 그러나 발음해 보면 [만듬], [대듬]처럼 리을은 사라지고 미음만 남습니다. ‘말음법칙’이라 하지요.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한복음 13:34)는 새 계명을 주신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사랑하라, 네 이웃을 사랑하라,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을 남기신 것처럼 예수님 메시지의 핵심은 사랑이었고, 사랑으로 이 세상 삶의 방점을 찍으셨습니다.
행여 ‘리을보다 못한 사람’이란 소리를 듣게 될까 봐 두렵습니다. 오래전 강의실에서 새나오는 리을 발음을 연습하는 중국 대학생들의 소리가 지금도 제 귀에 쟁쟁합니다. 그 소리를 기억하며 리을의 특성을 곱씹습니다.
“라라라라라라라라….”
박재역 원장∥중학교 교사를 접고 동아일보 교열기자로 입사했다. 동아일보에서 정년퇴직 후 중국해양대학교 한국학과 초빙교수로 재직하며 중국 대학생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쳤다. 현재는 한국어문교열연구원을 운영하면서 문서 교열과 등록민간자격 '어문교열사' 양성 교육을 진행하고 있다. 저서로는 《성경고유명사사전》 (2008, 생명의말씀사), 《교열기자의 오답노트》(2017, 글로벌 콘텐츠), 《다 쓴 글도 다시 보자》(2021, 글로벌콘텐츠), 《맛있는 우리말 200》(2023, 글로벌콘텐츠) 등이 있으며 현재 다산은혜교회(대한예수교장로회)에 장로로 시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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