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윗은 하늘에 올라가지 못하였으나 친히 말하여 이르되 주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를 네 발등상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하였으니"(행2:34–35)
서론_“주”란?
본문은 시편 110편 1절을 인용했다. 왜 베드로는 오순절 설교를 하면서 시편 말씀을 인용했을까? 시편 말씀의 핵심은 무엇인가?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과 부활의 권세를 선포하는 것이다.
| “주”(Lord)는 헬라어(그리스어)로 ‘Κύριος’(Kyrios)이다. ‘큐리오스’는 주인, 지배자, 소유자, 주권자란 의미이다. 70인역(Septuagint, LXX)에서 하나님의 이름 YHWH(야훼)를 번역할 때 거의 항상 “κύριος”로 번역되었다. 70인역은 라틴어로 Septuaginta(“70”)에서 유래했고, 약칭으로 사용할 때 “LXX”(로마 숫자 70)로 표시한다. 기원전 3세기경,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서 유대인 학자들이 히브리어 구약 성경을 “헬라어”(그리스어)로 번역했다. 72명의 유대학자들이 12지파에서 각 6명씩 72명이 모여 70일 안에 번역했다는 의미에서 ‘70인역’이라 부른다. |
베드로가 시편 말씀을 인용해서 예수님을 "κύριος"라 부른 것은, 단순한 존칭이 아니라 “예수님이 곧 하나님이시며 통치자이시다”라는 강력한 신앙고백이다.
우리는 누구를 ‘주’라고 부르며 살아가고 있는가? 사람은 누구나 무언가에 종속되어 있다. 돈, 명예, 세상의 기준, 혹은 자기 자신. 하지만 성경은 분명히 말한다. 예수만이 주시다.
2. 본론
(1)다윗이 고백한 “내 주”는 누구인가?
본문은 다윗의 시편을 인용한 것이다.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여기서 ‘내 주(히. אדני / 헬. κύριος)’는 누구인가? 다윗은 가장 위대한 왕이었다. 그런데 그는 자신보다 더 크신 분, 하늘로부터 오신 ‘주’를 고백하고 있다. 다윗이 말한 ‘내 주’는 바로 메시아, 곧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이는 단순한 존칭이 아니라, 예수께서 단순한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권위와 임재 안에 계신 신적인 분임을 선포하는 고백이다. 다윗의 고백은 인간의 지혜로 알 수 없는 영역이었다. 성령의 계시로 인한 예언적 선포였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주신 종합구술시험 주제가 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생각하느냐? 이 질문에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고 답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이시니라“(마16:17). 베드로가 예수가 누구인가? 내가 누구인가?란 질문에 망설임없이 정확한 답을 했다. 예수님은 그의 대답은 하늘에게 계신 내 아버지가 가르쳐준것이라고 했다.
내 주는 누구인가? 이 질문은 우리 인생에 아주 중요한 질문이다. 망설임 없이 예수님은 나의 구원자이며 주님이다. 이 고백이 흔들림이 없어야 한다. 예배는 고백하는 것이다. 삶도 고백하는 것이다. 고백이 건강하면 인생은 강건하게 세워진다. 그러나 고백이 병들면 인생은 무너진다.
(2)“하늘에 올라가지 못한” 다윗과 “우편에 앉으신” 예수
다윗은 위대한 신앙인이었지만, 하늘에 올라가지 못했다. 그러나 예수는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하나님 우편에 앉으셨다. 이는 곧 예수 그리스도가 하늘과 땅의 권세를 가지신 주이시며, 하나님과 동등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나타낸다.
오늘 우리에게도 필요한 질문은 이것이다. 나는 진짜로 예수를 주로 믿고 있는가? 그분이 내 인생의 왕이시고, 결정권자이신가? 죽은 신을 믿으면 인생은 도둑맞는다. 그러나 살아계신 주님을 믿으면 인생의 문은 활짝 열린다. 시작은 미약하지만 갈수록 번성하고 창대하고 믿음의 이야기들이 기적같이 쌓여간다. 갈멜산에서 엘리야 선지자는 이방선지자들과 850대1로 싸웠다. 그 영적 전투에서 엘리야는 승리했다. 죽은 신을 믿는 것은 인생의 끝자락이 멸망이다. 그러나 살아계신 영원한 하나님을 믿는 것은 축복의 문을 열어가는 것이다. 이미 승리가 보장되어 있다.
(3) “원수를 발등상이 되게 하시리라”_이미 승리하신 주님
발등상은 완전한 정복과 승리의 상징이다. 예수는 죄와 사망, 마귀의 권세를 깨뜨리셨다. 그리고 지금도 그 원수들을 완전히 굴복시키시는 일을 진행 중이다.
하나님의 나라는“이미”와 “아직” 사이 (Already and Not Yet)이 존재한다. 클라임(C. H. Dodd)은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예수의 사역 안에서 도래했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를 실현된 종말론(realized eschatology)이라고 부른다. 예수님의 초림으로 하나님의 나라는 시작되었고, 예수님의 재림으로 하나님의 나라는 완성된다. 하나님의 나라는 완성되지 않았기에 이미(Alread)와 아직(Not Yet) 사이에 놓여 있다. 아직 완성되지 않은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서 살아가고 있다.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종말론적 교회공동체가 취해야할 신앙의 태도인가?
첫째, 지나친 낙관주의(번영복음)나 종말회피주의를 멀리해야 한다. “이미”만 강조하면 현실의 고통과 죄를 무시하게 되고, “아직”만 강조하면 믿음 없는 수동적 종교로 흐른다.
둘째, 긴장 속에서의 거룩한 삶을 강조하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 백성이 되었지만, 그 완성을 기다리며 믿음과 인내로 살아가야 한다. 주님이 재림하실 때까지 정결한 신부로 믿음의 길을 걸어가라. 이것이 바른 신앙관이다.
셋째, 신앙의 균형 있는 이해가 필요하다. 현실에서의 회복, 기적, 승리를 기대하면서도 아직 남은 고난, 기다림, 눈물도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예수님의 초림으로 원수들을 굴복시켰지만 완성된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다. 그래서 이땅 살면서 때로는 고난을 겪고, 세상 속에서 어려움을 겪는다. 그러나 분명히 알라. 결국 주님의 승리는 확정되어 있다.
3.결론_나는 그분을 ‘내 주’로 고백하고 있는가?
다윗은 자신의 후손이자,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내 주’라 고백했다. 그분은 부활하셨고, 승천하셨고, 지금도 하나님의 우편에서 다스리고 계신다.
우리는 예수를 ‘주’라고 말만 하면서도 내 삶의 실제 주인은 자기 자신일 때가 많다. 오늘, 주님의 승천과 통치를 다시 기억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참된 주로 받아들이는 삶을 결단하자. 날마다 내 삶의 모든 교만과 죄를 굴복시켜 살아계신 하나님앞에 날마다 순종하는 것이 제자의 삶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