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은 에덴동산 한가운데에 생명나무를 두셨다. 그리고 아담과 하와에게 말씀하셨다.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마음껏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그 한 가지 금지의 명령은 사랑의 거부가 아니라 사랑의 경계선이었다. 모든 것을 주셨지만 단 하나의 경계를 남겨두신 이유는, 인간이 피조물로서의 자리와 자유의 책임을 잊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다. 경계는 사랑을 제한하기 위한 선이 아니라, 사랑이 왜곡되지 않도록 보호하는 울타리였다. 경계안에서 인간은 가장 안전하고 자유롭다.
그러나 오늘 우리의 세상은 이 경계를 무너뜨리고 있다. 정치에서는 여야의 경계가 무너져 진리보다 이익만 남았고, 법의 영역에서는 선과 악의 경계가 희미해져 정의의 감각이 마비되었다. 인간관계 속에서는 존중의 경계가 사라져, 사랑이 집착과 이용으로 변질되고 있다.
경계가 사라진 곳에는 언제나 혼란이 찾아오고, 결국 관계는 단절되고, 신뢰는 무너지고, 공동체는 파괴된다. 사랑에는 반드시 경계가 있다. 그 경계를 지킬 때 비로소 사랑은 타락하지 않고 성숙으로 나아간다.
에덴동산의 금지된 나무는 인간을 억압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생명과 질서를 지켜내기 위한 하나님의 사랑의 장치였다.
목포에 역사문화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는 1924~1925년경 설립된 북교동 교회가 있다. 북교동 교회는 근현대사의 격동의 시기에 서남해안 지역 기독교사의 한 축을 담당해왔다. 무엇보다 건축적 문화적 가치를 지닌 옛본당은 '1933년 유달산에서 채석한 웅회암'으로 지어진 교회다.
입구에 들어가면 카페가 있다. 카페 한가운데 인조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는데, 그 나무에는 ‘생명나무’라는 이름표가 붙어 있었다. 처음엔 단순한 인테리어로 보였지만, 곧 그 상징이 마음을 깊이 울렸다. 왜 하필 카페의 중심, 모든 시선이 머무는 곳에 생명나무를 두었을까? 그건 아마도 삶의 중심에 무엇을 세워야 하는가를 묻는 메시지일 것이다.
그 카페 한쪽에는 북교동교회 교회창립100주년 기념 “성경필사” 코너가 있었다. 누구의 강요도 없이, 마음이 이끄는 대로 성경 말씀을 이어 써 내려가는 자리였다.
그 단순한 행위 속에 신비한 질서가 숨어 있었다.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보이지 않는 경계, 세속과 거룩의 섞이지 말아야 할 경계, 그리고 사랑이 방향을 잃지 않게 하는 거룩한 울타리가 그곳에서 자연스럽게 드러나 있었다.
오늘 우리 사회가 다시 배워야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경계 안의 사랑”이다. 경계는 우리를 억압하거나 제한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보호하고 지켜주기 위한 울타리이다. 부모의 경계는 자녀의 안전을 위한 것이며, 하나님의 경계는 인간의 생명을 지키기 위한 것이다. 경계를 지킬 때, 관계는 더욱 건강하고 깊어진다.
반대로 경계를 허물 때, 사랑은 방향을 잃고 관계는 혼란스러워진다.
정치에는 진리의 경계가, 법에는 정의의 경계가, 교회에는 거룩의 경계가, 가정에는 존중의 경계가 있어야 한다.이 경계들이 무너질 때 사회는 혼란에 빠지고, 사랑은 본래의 의미를 잃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시금 ‘경계 안에서 피어나는 사랑’을 배워야 한다.
경계를 세울 때 자유는 제자리를 찾고, 사랑은 다시 생명으로 이어진다. 모든 것을 다 가졌지만, 마지막은 하나님께 속해 있었다. 그 마지막을 지켜드릴 때, 사랑은 완성된다. 사랑은 자유지만, 경계를 지킬 때 비로소 진짜 자유가 된다. 경계 없는 사랑은 결국 욕망이 되고, 경계를 지킨 사랑은 생명이 된다.
신앙이란 이 경계를 두려움으로 지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기꺼이 순종함으로 머무는 일이다.
우리의 신앙은 그 경계 안에서 자란다. 기도의 자리, 말씀의 자리, 예배의 자리를 지키는 것도. 결국 하나님과의 사랑의 경계를 세우는 일이다. 경계를 지킨다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그분의 질서를 존중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너는 자유하라. 그러나 그 자유 안에서 거룩을 지켜라. 그것이 내가 너를 사랑하는 이유이니라.”
《북교동 교회 카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