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개신교회의 설교에서 마태복음 25장의 “지극히 작은 자”를 사회적 약자나 가난한 이웃 전체에 대한 봉사 명령으로 해석하는 경우가 흔하다. 이러한 접근은 선의에서 비롯되었지만, 본문이 원래 의도한 메시지를 흐리게 하고, 종말론적 경고를 무디게 만들 위험이 있다. 본문은 단순한 사회적 윤리를 논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제자 공동체—복음을 전하며 고난을 감내하는 이들—를 기준으로 심판을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마태복음 10장과 18장에서 ‘작은 자들’로 불리는 대상은 제자 공동체, 곧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다¹. 마태는 25장에서도 동일한 어휘와 신학적 맥락을 유지하며, 제자들을 대하는 태도가 바로 심판의 기준임을 보여준다. 따라서 사회적 약자를 섬기는 일반적 자선과 25장의 심판 기준을 동일시하는 해석은 문맥적·신학적으로 일관성이 없다.
교부들의 해석 또한 이를 뒷받침한다. 오리게네스는 “그리스도의 형제들”이 곧 복음을 위해 헌신하며 고난을 겪는 자들이라고 보았고², 크리소스토무스는 25장의 ‘형제’를 신자 공동체 내부의 이들로 규정하며³, 역시 아우구스티누스도 “그리스도의 형제란 복음을 위해 헌신하는 교회의 지체”라고 강조하였다⁴. 이들은 모두 본문을 단순한 사회적 빈곤 구제 명령으로 환원하지 않았다.
16세기 교회개혁자들 역시 같은 입장이다. 루터는 25장을 “복음을 위해 고난 당하는 자들을 대하는 태도”로 해석하며, 일반적 선행과 동일시하지 않았다⁵. 칼뱅도 “그리스도의 형제는 모든 인류가 아니라 복음을 위해 헌신한 이들”이라고 명시하며, 본문의 범위를 사회적 약자로 확대하는 것을 경계했다⁶. 이러한 전통은 오늘날 신약학자들의 견해와도 일치한다. R. T. 프랜스, 크레이그 키너, 다니엘 해링턴, 리처드 보컴 등은 마태복음 25장에서 지극히 작은 자는 제자 공동체를 가리키며, 사회적 윤리로의 무분별한 확장은 본문의 기능을 훼손한다고 평가한다⁷⁸⁹.
그러나 오늘 한국개신교회가 이 본문을 자선과 사회봉사에 치중한 설교로 활용하는 경향은, 성경 본문이 가진 날카로운 심판적 메시지를 흐리게 만든다. 본문이 요구하는 질문은 단순하지 않다. “너는 그리스도의 사람들을, 복음을 전하는 제자들(현대적으로 쉽게 이해하면 빈곤한 목사들)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은 우리에게 여전히 강렬하게 남아 있다. 사회적 선행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본문이 가리키는 핵심 대상과 심판 기준을 정확히 읽어야 한다는 의미다.
동방교회적 시각에서도 이 본문은 교회론적 의미가 중심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며, 지극히 작은 자에게 행한 것이 곧 그리스도에게 한 것이다¹⁰. 따라서 25장은 사회적 윤리의 근거라기보다, 교회 공동체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그리스도의 몸을 섬기는 태도를 심판의 기준으로 제시한다.
결국, 마태복음 25장의 “지극히 작은 자”를 올바르게 이해하는 것은 교회의 신앙적, 신학적 정직성을 회복하는 일이다. 교회가 본문이 의도한 바를 정확히 읽고, 그 안에서 사회적 책임과 교회 공동체의 책임을 함께 실천할 때, 우리는 본문이 주는 경고와 가르침을 온전히 살아낼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