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가 예수님께 질문을 했다.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마18:21). 예수님의 대답은 아주 간단했다.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하라”(22절).
예수님의 대답은 용서에는 한계가 없다고 하셨다. 또한 조건이 없이 무조건적으로 용서하라는 메시지가 깔려 있다. 이것이 십자가가 주는 가치이다.
탕자의 비유를 통해 기독교 신학의 본질을 가르쳐주고 있다. 거지의 모습으로 돌아온 아들을 향해 아버지는 아들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는다. 죽었다고 생각했던 아들이 돌아왔다. 그것만으로 아버지는 기뻐한다. 그리고 잔치를 열어주고, 종이 아니라 아들로 받아주었다. 조건이 없는 무조건적인 용서가 진짜 하나님의 사랑의 본질이다. 무조건적인 용서가 흘러갈 때, 진정한 십자가의 능력이 회복되는 것이며, 하나님의 교회가 강력한 영적 권세를 회복하는 것이다.
오늘 본문은 일만 달란트 빚진 자의 빚을 왕이 전부 탕감해주었다. 즉 용서해주신 것이다. 만 달란트는 예수님 당시 갈릴리와 베뢰아 주민 전체가 로마 정부에 내는 1년 세금이 이백 달란트 밖에 되지 않는다. 이것과 비교해볼 때 일만 달란트는 엄청난 큰돈이다.
이에 비해 백 데나리온(당시 노동자 하루 품삯이 한 데나리온이다)은 장정이 100일 일한 품삯에 불과하다. 문제는 일 만달란트 빚진 자는 빚을 전부 탕감받았는데, 자기에게 100데나리온 빚진 자가 잠시만 참아주면 빚을 갚겠다고 애원하는데 그 청원을 거부하고 감옥에 넣었다.
일만 달란트 탕감 받은 사람의 못된 마음을 보고 왕이 악한 종에게 모든 빚을 갚을 때까지 다시 감옥에 넣었다.
이 비유에서 중요한 메시지가 있다. 큰 빚을 탕감 받은 사람이 조그만 빚을 탕감하지 않으면 자신의 죄에 대한 탕감은 무효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35절)고 결론을 내렸다.
용서할 줄 모르는 종의 비유를 통해 내리는 결론이 있다. 우리의 기도의 초점이 달라져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이미 모든 죄를 탕감 받았다. 십자가의 은혜는 예수님의 생명을 주고 얻는 고귀한 사랑이다. 그 십자가의 용서를 이웃에게로 흘려보내야 한다. 이것이 십자가 복음의 핵심이다.
이와같이 용서 청원은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십시오. 그와 동시에 우리도 우리에게 빚진 자를 용서’하겠습니다. 라는 고백으로 이어져야 한다.
오늘날 현대 그리스도인들은 ‘분열증’에 걸려 있다. 자신의 죄는 탕감 받고 싶어서 기도하고, 이웃이 나에게 준 상처와 피해등에 대해서는 절대로 용서하지 못하고 용서의 잣대를 거부한다. 결국에는 분열증에 빠져 있는 모습니다.
사순절을 통해서 우리 속에 있는 이중적인 분열증의 모습이 치유되기를 바란다. 우리 속에 진정한 십자가의 용서의 복음이 작동하고 있는지 점검해봐야 한다.
나에게 피해를 준 사람이 용서를 빌었을 때 용서하는 것은 그래도 쉽다. 그러나 오히려 강팍하게 상처와 아픔과 피해를 준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기독교의 복음은 한 발 더 앞서가서 상대방이 용서를 빌지 않아도 십자가의 피로 구원받은 내가 먼저 상대방의 과실을 용서하는 것이다. 이것이 진짜 십자가의 피로 구원받은 사람들의 모습이다.
손양원 목사님은 두 아들이 좌익운동 학생에 의해 순천 뚝방에서 처형되고 말았다. 그를 죽였던 안재선은 후에 손양원 목사의 사랑으로 그는 국군에 처형되려던 그 때 기적적으로 살아나 손양원 목사의 양아들이 되었다.
손양원 목사님은 두 아들의 장례식장에서 9가지 이유를 들어 감사의 조서를 읽었다.
첫째, 나같은 죄인의 혈통에서 순교자가 나왔으니 하나님께 감사
둘째, 허다한 많은 성도중에 어쩌면 이렇게 귀한 보배 사역을 나에게 맡겨 주셨으니 하나님께 감사
셋째, 3남 3녀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자과 차자를 바치게 하신 나의 축복을 하나님께 감사
넷째, 두아들이나 순교했으니 하나님께 감사
다섯째, 누워서 죽는 것도 그리스도인의 복인데 끝까지 전도하다가 총살로 순교당했으니 하나님께 감사
여섯째, 미국을 가려고 준비중이었던 두 아들을 미국보다 더 좋은 천국에 보내 주셔서 내 마음을 안심케 하신 하나님께 감사
일곱째, 내 사랑하는 두 아들을 총살시킨 원수를 회개시켜 내 아들을 삼고자 하는 마음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
여덟째, 두 아들 순교의 열매로 말미암아 무수한 천국의 아들들이 생길듯이 믿어지니 하나님께 감사
아홉째, 이같은 역경속에서도 이상의 진리와 사랑과 믿음을 찾는 기쁜 마음과 여유있는 믿음 주신 하나님께 감사
이와같은 내용의 답사가 계속되는 동안 식장은 눈물바다를 이루었다, 목사님은 자신의 아들을 죽인 사형수를 살리기 위해 각계에 호소하여 결국 그의 목숨을 구했을 뿐만 아니라 그를 자신의 양자로 삼았다.
손양원 목사님 기념관 1층에 가면 자리잡고 있는 감사헌금 봉투를 접할 수가 있다. 그 봉투에는 두 아들을 잃고 감사한 뜻으로 헌금한 봉투에 1만환(당시 화폐단위)이라는 액수가 적혀 있다. 당시 1만환이면 손양원 목사의 생활비 10년을 모아야 할 금액이었다고 한다.
이것이 기독교의 용서의 복음이다. 용서의 복음이 교회속에서 흘러가야 한다. 그래야 교회가 교회로서의 기능을 할 수 있다. 세상의 어떤 종교도 할 수 없는 것, 세상이 할 수 없는 것 오직 기독교의 중요한 진리인 것이다.
인간과 인간을 연결시켜주는 화평의 다리는 용서이다. 인간과 하나님을 연결시켜주는 화평의 다리도 용서이다. 용서는 서로를 연결시켜주는 인터페이스이다. 이 용서의 기능이 살아날 때 교회도 가정도 사회도 건강하게 세워지게 된다.
용서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을 다시 기억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의 죄도 사하여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소서”(눅11:4). 먼저 나에게 피해를 준 사람을 용서하는 것이다. 그리고 나의 죄를 용서해달라고 기도하라는 것이다. 이것이 기독교의 기도이며, 용서신학이다.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 하셨더라”(막11:25).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계하고 회계하거든 용서하라”(눅17:3)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마18:35)
예수님의 메세지는 아주 분명하다. 각각 중심으로 용서하라. 형제의 죄를 용서해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도 용서하신다. 이것이 십자가 신학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