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닫으신 예배는 아닐까?
예수님은 예배에서 중요한 두 가지를 말씀하신다. 그것은 영과 진리다(요4:24). 영이신 하나님을 느끼며 진리를 찾는 마음으로 드리는 예배가 예배를 성공에 이끈다. 예배는 눈에 보이지 않는 영이신 하나님에게 드리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예배 중에 눈에 보이는 것들을 의존할까? 혹시 거대한 예배당과 인간의 수를 의지하면서 정작 거기에 계시하는 하나님에 대해 희미 한 것은 아닌지 돌아보아야 한다. 불순한 인본주의 요소를 혼합한 예배에서 제거하는 예배 갱신이 필요하다. 매 주일 밀물과 썰물처럼 수많은 익명의 사람들, 교회 마당만 밟고 가는 의례적인 예배, 불순한 마음으로 예배와 대회와 집회를 열고 예배란 이름으로 우리의 목적을 이루는 것은 없는지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이런 우리의 모습을 보시는 하나님의 마음은 견디기 힘들 것이다.(사1:12-13) 어쩌면 지금 코로나는 이런 한국교회와 예배의 모습을 보시고 오랫동안 불편하셨던 주님이 잠시 예배당 문을 닫으신 것은 아닌지(말 1:10) 스스로를 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성경에 나오는 예배자들을 본받아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일은 예배하는 일이다. 세상 어느 누구도 예배를 멈추게 할 수 없다. 예배는 가장 위대한 분을 높이는 일이기 때문이다. 요한계시록은 참다운 예배의 모습을 잘 그려주고 있다. 예배는 세상에서 가장 최고의 분에게 드려지는 가장 거룩한 일이다. 우리가 교회로 부름을 받은 것은 이 일을 위해서다.
인간이 죄를 지은 이후에 처음에 행해진 것이 예배(제사) 였다. 창세기 4장은 가인과 아벨이 제사 드리는 예배의 최초의 장면이다. 죄를 지은 인간이 하나님 앞에 해야 가장 먼저 회복할 일은 예배다. 하나님이 보시는 합당한 예배를 드린 아벨과 그렇지 못한 가인과 이야기는 우리의 예배를 돌아보게 한다. 믿음으로 드린 아벨의 제사는 오늘 참 예배가 무엇인지 말해준다. 오늘도 하나님은 형식이 아닌 중심으로 드리는 예배하는 자를 찾으신다. 예배는 모든 주권이 하나님에게 있음을 인정하고 선포하는 시간이다. 하나님은 이런 예배자를 통하여 역사를 진행하신다. 아벨 이후에 소개하는 셋, 에노스, 에녹, 노아는 모두 예배자들이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살고 구원해주심을 감사하며 하나님께 제단을 쌓는 일이 곧 예배다. 이것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는 모리아 산 제사에서 예배의 모델을 가장 잘 보여준다. 예배는 자신을 모두 제물로 드리고 오직 하나님만 홀로 남는 것이다.
아브라함의 모티브는 야곱의 벧엘 제사와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어진 시내산 성막, 솔로몬 성전, 스룹바벨 성전으로 이어진다. 구약성경은 성전을 중심한 예배하는 이스라엘 공동체를 반복적으로 말하고 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데 실패함으로 패망한다. 하지만 경건한 남은 자들을 통하여 하나님은 예배를 받으신다.
예배하는 그루터기들
예수님이 성육신을 입고 우리에게 임하신 것은 하늘의 성전이 우리 속에 오신 사건이다. 마리아와 시므온과 안나와 세례요한은 모두 예수를 찬양하며 예배하는 그루터기였다. 예수님은 주님을 구주로 믿는 제자들을 선택하여 예배하는 자로 훈련하셨다. 나중에 십자가 죽음과 부활로 온전한 성전이 완성된다. 예배의 절기인 오순절에 시내산에서 하늘의 말씀이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에게 내려온 것처럼 예수님을 통하여 이제 모든 인류에게 하늘의 성소가 임하시는 이야기는 놀라운 감동이다
이제 누구든지 예수를 믿으면 내가 곧 성전이 되는 특권을 얻었다. 성전에 가는 것이 아닌 내가 곧 성전이 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성령이 거하시는 성전으로서 살아가는 것이 교회요 우리 크리스천들이다. 이렇게 부름을 받은 교회는 세상 속에서 예배하는 일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다. 왜 교회와 나를 성전으로 삼아주셨는가? 그것은 이 세상 속에서 예배자로 살아가기 위함이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요 4: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