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신칭의(以信稱義, justification by faith), 이중칭의(二重稱義, double justification), 이중전가(二重轉嫁, double imputation)는 구원과 성화 이해에서 이해하기 쉽지 않은 구도이다.

신성로마제국 황제 칼 5세는 교황주의와 루터파의 화의를 위해서 1541년 레겐스부르크(Regensburg)에서 회의(Regensburg Colloquy)를 개최하여, 레겐스부르크 협의에서 문서(Regensburg Diet)를 작성했다. 레겐스부르크 협의 5문항에 이중칭의(duplex iustitia)을 제시했다. 이중칭의를 인정한 학자는 마틴 부처이다. 1541년 부처는 스트라스부르크에 있는 칼빈을 회의에 업저버로 참석시켰다.

레겐스부르크 협의 5문항(Article 5)이 칭의론에 관한 문항이다. 레겐스부르크에 참석한 교황주의 대표와 개혁파 대표들은 각기 주장한 내용을 편재시킨 수준으로 협의했다. 개혁파는 외부의 의(iustitia aliena)가 전가된 의(iustitia imputata)를 주장했고, 교황주의는 내재된 의((iustitia inhaerens)를 추가시킨 것이다. 레겐스부르크 협의를 본 양측의 수장은 모두 거부한 것이 특징이다. 루터는 내재적 의에 대한 부분을 수용하지 않았고, 교황주의는 외부의 의를 수용하지 않았다. 결국 레겐스부르크 협의에서 구도화시킨 이중칭의 구도는 인정되지 않았다. 각자의 칭의구도는 모두 이중적이지만 전혀 다른 칭의구도인 것도 확인되었다. 그런데 1999년 로마 카톨릭과 루터파가 이 칭의교리에서 화해 협약을 맺었다. 이것에 대해서 개혁을 후퇴시킨 것인지, 레겐스부르크의 실수를 회복한 것인지 평가가 나뉠 수 있을 것이다(참고. 김재윤, “의롭게 만드시는 하나님의 의: 레겐스부르크(1541), 트렌트(1547), 합의문서 (1999)로 본 로마 카톨릭교의 칭의 교리 연구”, 개혁논총 32권(2014년)).

루터의 칭의 개념은 외부의 의가 전가됨을 강조한 이신칭의 구도를 세우면서, 외부의 의가 인간 내부에 들어왔을 때에 형성되는 내재적 의에 대해서 전혀 인정하지 않은 것이다. 칼빈도 루터의 칭의 구도를 수용했다. 그래서 오직 믿음과 오직 은혜(sola fide et sola gratia)는 이중칭의에서 레겐스부르크 협약을 인정하지 않은 구도가 되었다.

루터는 외부적 의가 전가된 때 인간의 수동성을 제시했다(참고. 우병훈, “마틴 루터의 기독론: 그 구원론적이며 칼케돈적인 성격,” 『종교개혁과 그리스도』,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 총서, 제 13집(2019)). 그러나 구원에서 인간의 능동성을 전혀 인정하지 않았다(참고. 우병훈, “루터의 칭의론과 성화론의 관계: 대(大) 『갈라디아서 주석』 (1535년)을 중심으로,” 「개혁논총」 제46권(2018)). 이러한 구도는 칼빈도 동일하게 진행했다. 루터에게 성화론이 부재하다는 것은 루터의 십자가 신학(Theologia Crucis)에 대해서 명확하게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1518년 하이델베르크 논쟁에서 루터는 “이신칭의와 십자가 신학”을 제시했다.

로마 카톨릭의 칭의 구도는 칭의의 시작을 교회의 편입으로 보고, 교회에서 영세와 견진성사 그리고 고해성사 과정을 수행하면서 내재적 의를 인정하는 것이다. 로마 카톨릭식의 이중칭의 구도는 내재적 의를 인정하는 것이며, 자연에 부가된 돕는 은사, 부가된 의를 체계로 진행하는 것이다. 아퀴나스에서 체계화된 자연과 계시가 절충되는 구도가 유지되는 것이다.

그런데 잉글랜드 청교도주의도 나름의 칭의 구도를 이중적으로 구도화시켰다. 그리스도의 의를 수동과 능동으로 구분시킨 것이다("Active" and the "Passive" Obedience of Christ). 능동적 순종은 죄없는 삶이고, 수동적 순종은 속죄의 죽음이다. 루터나 칼빈에 있지 않았고, 로마 카톨릭에도 있지 않는 구도였다. 루터는 신자의 수동적 의(passive righteousness)의 전가를 제시했고, 능동적 의(active righteousness)를 인정하지 않았다. 청교도주의에서 이중칭의와 함께 나온 체계는 이중전가(double imputation) 구도이다. 루터와 칼빈은 성화에서 구체적인 구도화가 나타나지 않는데, 청교도주의는 성화에서 구체적인 신학적 구도화를 이룬 것이 이중전가이다. 이중전가의 문제점은 첫째, 이중이 아닌 둘의 문제였다. 그래서 항상 둘이 아니고 하나라는 표기가 필요하다. 그렇지만 그리스도의 능동 순종으로 획득한 의의 전가가 강조되는 것을 피하지 못하는 것 같다(참고. 사보이선언 13장). 둘째, 둘째 전가된 의의 성격에 대한 규정이 모호한데, 그리스도의 신성의 전가(the imputation of divine justice)로 이해될 수 있다. 그리고 그리스도가 무죄한 상태에서 수행한 의(sinless life)를, 그리스도의 수동적 의로 사함받은 신자도 무죄한 상태에서 그리스도와 동일하게 수행하는 상태로 이해될 수 있다.

칭의과 전가 교리를 한 쌍이지만, 모든 계층에서 일치된 견해는 없다. 다만 루터와 칼빈은 완전히 일치된 개념이다. 다만 칼빈은 이중예정까지 구도화시킨 것이 특징이다. 로마 카톨릭의 칭의 구도와 청교도주의의 칭의 구도는 같지 않다. 필자는 청교도주의에서 일어난 칭의 구도는 너무나 익숙한 기독교 사회에서 불신자가 신자가 되는 칭의 구도에 대한 인식이 약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루터와 칼빈은 동일한 사회였지만 성경의 의존했기 때문에 “죄인이 의인이 되는 구도”를 추구했다. 그런데 청교도주의는 “보다 더 하나님께 합당한 모습”을 이루기 위해서 노력했다고 평가하고 싶다.

20세기 새관점학파의 대표 주자인 톰 라이트는 전가 교리를 공격한 유력한 학자이다. 이에 대해서 존 파이퍼 목사가 적극 변호했다( John Piper, Counted Righteous in Christ: Should We Abandon the Imputation of Christ’s Righteousness? (Wheaton: Crossway, 2002); The Future of Justification: A Response to N. T. Wright (Wheaton: Crossway, 2007))이에 대해서 라이트도 칭의론을 펼쳤다(N. T. Wright, Justification: God's Plan Paul's Vision(London: IVP, 2009)).

라이트에게 칭의에서 “전가에 의한 의”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참여된 의(incorporated righteousness)”를 주장했다. 이중칭의는 두번째 의로움에 대한 논쟁인데, 라이트는 최종 칭의를 제시한다. “이미 그러나 아직 아니(already but not yet)”의 구도에서 칭의를 제시했다. 필자는 이미 그러나 아직 아니는 개인 칭의가 아닌 인류 전체 역사의 구도라고 제시하고 있다. 칭의는 개인의 구원과 성화에 대한 논의이다. 이미 그러나 아직 아니는 구원사적 개념인데, 필자는 구원사적 개념으로 “계시의 종료(성경의 충족성)”의 구도를 제안하고 있다.

톰 라이트가 사용하는 justification을 의화, 칭의로 번역함에 따라서 전혀 다른 의미가 될 것이다. 라이트가 사용한 justification은 의화로 번역해야 더 합당할 것이다. 칭의는 법정적 칭의 이해로 과거에 확정된 의 개념이며, 그리스도의 피의 효력으로 이루어진 구원 개념이다. 라이트는 그러한 칭의 개념이 없다. 전혀 다른 체계인 “아브라함의 언약 안으로 들어가는” 수준으로 제언하고 있다. 라이트는 의화 교리에, 전가와 주입 교리를 사용하지 않고, 언약 안으로 들어가고 머뭄(getting in, staying in)으로 신학을 전환시켰다. 법정적 칭의, 십자가 피의 구속 등이 없는 justification은 ‘의화’로 번역해야 한다. 루터는 법정적 칭의를 말했지만 칭의받은 자의 이중예정으로서 확실한 구원을 제시하지 않았고, 칼빈은 칭의를 이루신 하나님의 의지에서 이중예정을 확립했다. 칭의에서 의롭다하시는 주 하나님을 볼 것인가? 아니면 의인이 행할 삶을 볼 것인가?의 관점 차이가 있다고 볼 수 있다. 개혁파는 의롭다하시는 주 하나님을 믿고 의존하여 사는 삶을 추구했다. 거룩한 생활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된 삶이다.

두번째 의로움의 구도를 말하면서(이중칭의) 상급을 부정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필자는 오히려 하나님께서 주시는 상을 인정하며(히 11:6), 두번째 의인 내재적 의에 대해서 거부한다.

이중칭의는 서방교회나 개신교회에서 합의되지 않았다. 다만 개혁파, 루터와 칼빈을 따르는 부류는 이신칭의, 오직믿음과 오직은혜를 강조한다. 그러나 오직믿음에 대해서 의심하거나 부인하는 개신교 부류가 있다. 구교, 교황주의는 오직믿음을 말하지만 교회에서 평가하는 수준이라면 문제가 없을 것이다. 오웬이 대적하는 신학 부류는 로마 카톨릭, 반율법주의, 소시니안, 솔리피디안(Solifidian)이다. 오웬은 솔리피디언을 “보편적인 순종이나 선한 행위를 반대하거나 거부하는 사람들”로 규정했다(오웬, 『칭의론』, 박홍규 역, 128). 오웬의 소요리문답 22문은 “우리는 우리의 믿음으로 의롭다 여김을 받습니까?”라는 질문에 “아닙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의로만 의롭다 여김을 받습니다. 이 의는 우리에게 아무런 대가 없이 전가되어 믿음으로 붙들어진 것입니다”로 진행한다(대요리문답 19장). 오웬의 질문은 교묘하다. 인간의 무능력을 말하지만, 선을 행할 능력이 그리스도에게 전가받은 의로 진행할 수 있다는 체계이다. 오웬은 신자가 은혜로 행동한 사역에 의롭다고 선언하는 것을 제시했다(대요리문답 19:2). 그리고 소요리문답 23문에서 “오직 믿음 외에 우리에게 더 요구되는 것은 없습니까?” 답 “아닙니다. 회개와 거룩함과 또한 요구됩니다”로 제시했다. 대요리문답 20장 “성화에 관해서”에서 다시 구체적으로 진술한다(오웬, 『소요리, 대요리 문답』, 정성우 역, 2020). 오웬이 오직 믿음(sola fide)을 긍정적으로 생각하지 않은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이중칭의(二重稱義, double justification)는 합의되지 않는 영역이다. 자기 믿음 도식을 밝혀야 할 것이다. 오웬은 로마 카톨릭, 반율법주의자, 소시니안, 솔리피디안을 거부했다. 톰 라이트는 전가 교리를 거부했다. 최종 칭의를 말하는 구도에서 자유롭지 않다. 최종 칭의에 대한 규정은 알미니안, 감리교, 김세윤(종교사학파), 톰 라이트(새관점학파) 체계이다(불가지론). 로마 카톨릭주의는 칭의 확립을 교회가 주도하려고 하고, 구원파적 개념은 인간이 하려고 한다. 필자는 루터와 칼빈의 칭의 구도, 주 예수께서 주시는 죄사함과 은혜 구도로 이해하고 확립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고경태 목사(형람서원, 한영대 겸임교수)
고경태 목사(형람서원, 한영대 겸임교수)

 

저작권자 © 본헤럴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