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심준비론(Preparationism)에 대해서 비판적 의견이 있습니다. 회심준비론에 대해서도 다양한 의견이 있습니다. 우리는 회심준비론을 “구원받기 전 준비 과정이 필요한가?”로 한정해서 전개합니다.

개혁된 교회는 “세례 후에 견진례”를 시행하는 교황주의의 이중구도를 개혁하였습니다. 그런데 한국 교회는 “학습 후 세례”라는 구도를 취하고 있습니다. 전자와 후자는 전혀 다른 구도입니다. 필자는 “학습”이라는 구도를 “회심준비론” 체계와 유사한 것으로 연결시킵니다.

“학습 후 세례” 구도는 한국 개신교회만 취하는 독특한 현상입니다. 감리교, 예장 통합(2007년)은 학습 제도를 폐지하였습니다. 폐지한 것은 큰 문제가 없지만, 구원 도식에 천주교의 견진례를 도입에 대한 의견이 있다하니 우려스러운 사안입니다. 개혁 후퇴 시키는 것은 부당한 것입니다.

개가 토한 것을 다시 먹는 것처럼 미련한 자는 미련한 짓을 되풀이한다(잠 26:11)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웠다(벧후 2:22)

개혁된 교회가 개혁한 사안으로 회귀하는 것은 개혁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천주교로 합치하는 것이 더 합당할 것입니다. 항상 더 개혁(semper reformanda)는 개혁하기 전 사안으로 회귀가 아니라, 개혁한 상태에서 더 합당한 체계로 개혁이어야 합니다.

회심준비론을 주장했던 청교도들이 인간의 책임을 강조하지만, 구원 도식에 인간이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그 표현에서 그러한 요소가 발생했다면 문제가 없지는 않을 것입니다. 또한 가르치는 자는 자기 가르침에서 어떤 오해의 요소가 발생하지 않도록 절제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개혁파는 구원의 서정을 체계화하려고 했지만, 명료한 구원의 서정을 이루는 것에서는 성공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벌코프 박사와 박형룡 박사에게 나타난 구원의 서정(ordo salutis)는 좋은 견해이지만 정론(定論)으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루터의 구원 도식이 쉽지 않기 때문이며, 칼빈도 구원 도식을 정확하게 세우지 않았습니다. 필자가 이해하는 루터의 구원 도식은 “선포된 복음에 근거한 합당한(거룩한) 삶(복음과 십자가 신학)”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칼빈은 루터의 수준에서 칭의와 성화 부분에서 체계적인 면을 둔 것(unio mystica cum Christo; mortificatio et vivificatio)으로 평가합니다.

그런데 청교도주의에서 구원의 서정에서 세밀한 구도를 제언한 것이 “회심준비론”입니다. 루터가 율법을 강조한 것과 유사할 수 있지만, 동일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네덜란드 개혁파에서도 철저한 그리스도인을 위해서 입교와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엄격하게 운용합니다. 그러면서 세밀한 구원 도식을 도출시켰습니다.

구원받기 전 신자가 구도자(求道者)가 되어야 한다는 발상은 개혁파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회심준비론이 존재하는데, 그것은 엄격한 입교를 위한 교회의 정지(整地) 과정으로 평가할 수 있습니다. 입교에 엄격한 정지 과정을 준수하는 것에 대한 평가는 다른 문제일 것입니다. 청교도주의의 회심준비론이 문제가 된다면, 먼저 한국 교회의 학습 제도를 수정해야 합니다.

청교도주의의 회심준비론이 가졌던 우려를 한국 교회는 유지하고 있습니다. 한국 교회는 학습과 세례를 요식적으로 행하여 무분별하게 입교를 수행한 것입니다(교회성장만능주의). 그래서 오순절주의의 이중구도(세례 후 성령세례(성령충만))를 쉽게 용인했습니다. 구원파의 도전에 쉽게 공경받았습니다. 그러나 콘스탄티노플 신조에서는 “한 번의 세례”를 명료하게 제시합니다.

한국 장로교회는 세례와 학습의 구도에 대해서 명확하게 정리와 함께, 한 번의 세례를 정확하게 인지해야 합니다. 그리고 다양한 구도에 대해서 깊은 성찰이 필요하겠습니다. 한 번의 세례를 무력화시키거나 약화시키는 구도는 역(逆) 개혁이 될 것입니다. 한 번의 세례가 강조되어야 할 것은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이고, 성령의 내주와 연관되기 때문입니다. 세례는 성령받은자에게 수여되는 수동적인 자세입니다(행 2:38-41). 이창모 목사는 “회심준비는 없다. 회심조건은 오직 성령세례이다”(바른믿음)라는 글에서 행 2:38을 이해를 소개했습니다. 이 목사는 행 10:47에서, 고넬료에게 임한 성령으로 말미암아 베드로 사도가 세례를 베푼 것을 제시했습니다(행 11:17). 전자는 유대인에게 주어진 것이고, 후자는 이방인에 주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계시가 중지된 이후(성경 충족설)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원의 서정에서 차이는 없어졌습니다(엡 2:16). 누구든지 성령이 임하면 그 증거로 세례를 받는 것을 제언합니다.

그럼에도 교회에서 회심준비론을 말하고, 복잡한 입교 체계를 만드는 것은 좀 더 바른 교회를 위한 몸부림일 것입니다. 한국 교회는 그러한 영향에 있기 때문에, “세례 전에 학습”이란 독특한 체계를 형성시켰습니다. 그래서 저는 회심준비론과 학습 제도가 연관성이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제는 한국 교회가 학습 제도를 폐지하고, 한 번의 세례로 온전하게 교회회원이 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나 세례 후에 견진례를 도입하려 것은 세례를 미덥지 않게 평가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기 때문에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한 번의 세례로 구원은 확증됩니다.

고경태 목사(형람서원, 한영대 겸임교수)
고경태 목사(형람서원, 한영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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