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후 13:13 The grace of our Lord Jesus Christ, and the love of God, and the communion(κοινωνίᾳ) of the holy Ghost be with you all, Amen(Geneva 1599 Bible). 참고로 ESV 등 현대 영역에서는 fellowship이라고 번역했습니다. κοινωνίᾳ는 초기에는 communion으로 그리고 현대에 들어서면서 fellowship으로 번역한 것입니다. fellowship으로 번역하면서 교제는 단순 교제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우리 성경에서 ‘communion’는 ‘교통’으로 번역되어 있어, 목사가 축도할 때에 ‘성령의 교통’을 매 주일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매 주일 접하는 중요한 언어이지만, 그 언어에 대한 깊은 이해는 상대적으로 적습니다. ‘communion’을 ‘교통’으로 번역되었지만, ‘친교’, ‘교제’ 등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친교나 교제” 등을 접했을 때에 ‘communion’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communion과 communication이 있는데, 우리는 communication에 더 관심을 두고 있는 것 같습니다. 먼저 하나님과 인간은 communication(소통)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지해야 합니다. communication은 구체적인 무엇이 전달(transmission) 혹은 교류(intercourse)되는 것이고, communion은 정신이나 영(靈)이 전달 혹은 교류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삼위일체의 페리코레시스(περιχώρησις/Perichoresis)는 하나님의 내적 교류이기 때문에 인간으로 확장될 수 없습니다. 공동체를 삼위일체에 근거해서 이해하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으며, 인간 공동체는 법에 근거해서 이해해야 합니다. 페리코레시스는 명료한 이해 방식이 아니라, 해소할 수 없는 삼위일체의 신비에 대한 과감한 접근입니다.

communion과 communication은 라틴어 communicare, '공유한다‘는 어원에서 시작되었고, community(공동체), communism(공산주의), common sense(상식) 등이 있습니다.

우리는 communion에 대해서 짧게 말하려고 합니다. Holy Communion(Eucharist, 감사하다)은 천주교, 성공회, 감리교, 루터파에서는 잘 논의됩니다. ‘communion’을 ‘영성체(領聖體)’라고 번역하여 사용하고 있습니다. 칼빈파는 communion을 성찬이 아닌 복음으로 중심을 옮겼습니다. 칼빈은 그리스도와 신비적 연합(unio mystica cum Christo, communion with Christ)의 체계를 구축했기 때문입니다. 칼빈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이루는 일을 성령의 사역으로 하며, “그리스도와 연합시켜 주시는 띠(vinculum)”로 제시했습니다(Inst., III,1,1).

먼저 성찬에서 ‘communion’이 확실하게 있다고 견지하는 것이 기독교적 사고입니다. 성찬의 실재론(Sacramental Realism)으로 제시합니다. 성찬에서 실재론과 상징론의 갈등은 1215년 4차 라테란 공의회에서 실재론으로 확정하며, 실체변화가 되는 화체설까지 확정하였습니다. 그리고 역종교개혁인 트렌트 공의회에서 다시 확인했습니다. 개혁파는 실재론을 취하지만, 화체 개념은 거부합니다.

루터파의 박일영은 “루터의 성만찬론은 공재설이 아니라 실재설입니다”라고 SNS에 제시했습니다. 박일영이 루터의 성찬 이해를 공재설로 표현하지 말라는 제언의 글입니다. 공재설(consubstantiation)은 교황주의 내부에서 화체설(transubstantiation)을 거부하는 한 의견이라고 했습니다. 화체설은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에 근거한 것으로 물질의 실체(substance)가 변하고 부속물(accidents, 예를 들어 색깔과 맛)은 그대로 남아 있다는 이론입니다.

실재설은 “복음”, 선포된 말씀(invisible word)와 보이는 말씀인 성찬(visible word)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성찬에서 communion이 있음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선포된 말씀에도 communion이 있다는 것을 주지시키려 합니다. 선포된 말씀은 보이지 않는 빵과 포도주입니다. 그래서 매주일 성찬이 수행되지 않지만, 그리스도의 살과 피의 communion이 실재 일어납니다. 그리고 축도(Benediction)에서 성령의 communion을 확언하며, 세상에서 선포된 말씀, 그리스도의 말씀에 순종해서 살 수 있도록 합니다.

우리는 communion을 교회 밖으로 이끌려고 하지 않습니다. 교회 밖에서는 자연법으로 생존합니다. 자연법의 창시자도 성자 하나님이십니다. 자연에서 하나님과 communion하는 방식은 죄를 용서하시고 교통(communion)하는 같지 않습니다. 자연에서는 죄사함이 아닌 자연과 법의 질서를 이루어야 합니다.

중세 교황주의의 오류는 communion을 사제가 독점하는 체계였고, 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에 해소했다고 하지만, 사제주의까지 포기하지 않고 있습니다. 급진적 종교개혁이라고 하는 재세례파는 communion을 교회가 아닌 밖으로 옮겼습니다. 이러한 성향은 경건주의, 청교도주의, 소시니안(유니테리언) 등에서 동일하게 견지하고 있습니다. 공산주의(Communism)는 종교를 부정하면서 사람으로 완전한 communion을 이루려고 했습니다. 마르크스-레닌주의는 코멘테른(Comintern)으로 형성되었습니다. 개혁된 교회는 communion을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유일한 기관은 교회에서 선포된 복음과 주께서 제정하신 형식으로 communion을 이룹니다. 이것을 “은혜의 방편(means of grace)”이라고 합니다. 은혜는 사제(司祭, priest)에 의해서 독점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자유롭게 오는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 성령으로 선포된 복음과 성례를 통해서 그리스도 안에서 수여됩니다. 

사도신경에서 “성도의 교통(communio sanctorum)”이 있습니다. 성도의 교통은 이해하기 쉽지 않은 개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인간의 교통을 논하고 있는데, 사도신경에서는 성도의 교통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천주교는 “성인의 통공(聖人~通功, Communio Sanctorum)”으로 번역해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천주교에서는 개신교가 “성인의 통공”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이해합니다. 존경과 교통(통공)은 전혀 다른 개념입니다. 우리는 성도의 교통은 성인과의 교통이 아니라, 산자의 교통을 추구합니다. 첫째, 그리스도인과 그리스도인에게 communion이 형성되는 것은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큰 선물입니다. 둘째, 산자와 죽은자 모두는 동일하게 함께 주 예수 그리스도를 섬깁니다. 셋째, 성도의 교통은 구제에 해당하는 부분입니다. 구제는 영적인 부분이 아니지만, 교회 직분으로 사역하는 고유 목적입니다. 우리는 “성도의 교통”을 믿음을 고백하는 내용입니다. 우리는 죽은자를 숭앙하며 교통하는 방식은 거부합니다. 믿음의 선진들을 가르침을 존중(尊重)하지만 선진을 숭앙(崇仰)하지 않습니다. 교황주의를 급격하게 거부한 세력은 사람이 아닌 자연과의 교통까지 주장하기도 합니다(Ecotheology). 사막의 수도사들이 자연과 교통한 것을 근거로 하는데, 극단적인 예를 일반화시키는 일반화의 오류(fallacy of hasty generalization)입니다. 사막의 수도사의 생활을 일상으로 이끌어 표준화시키는 것은 부당합니다.

그런데 콘스탄티노플 신경(381년)에는 “성도의 교통”이란 내용이 없습니다. 콘스탄티노플 신경에서 3조(성령조)에서 성령께서 “선지자를 통해서 말씀하고 계심(qui locútus est per prophétas)”을 고백합니다. 콘스탄티노플 신경(4세기 교회)에서 communion은 성령께서 교회에 하시는 말씀에 주목시켰습니다(계 2-3장). 이것은 개혁된 교회가 교회의 표지(은혜의 수단)을 복음선포(말씀)과 성례로 본 것과 같습니다.

고경태 목사(주님의교회, 한영대 겸임교수)
고경태 목사(주님의교회, 한영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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