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義, Righteousness) 이해는 쉽지 않습니다. 유교적 개념은 “마땅한 삶의 길”입니다. ‘옳을 의(義)’자는 ‘양 양(羊)’자와 ‘나 아(我)’자의 조합이고, 나 아(我)는 손 수(手)에 창 과(戈)의 조합입니다. 이 문자를 합한 의미는 “손에 창을 잡은 사람이 양처럼 행동한다”가 됩니다. 기독교에서 한자를 연구할 때는 “손에 든 창으로 양을 잡아, 그 죽은 양을 내 머리 위로 들어 올림, 그 양 아래 있는 나, 그 내가 의롭다”로 개념화하기도 합니다.

서철원 박사는 “의(義)를 하나님 앞에서 얻은 생존권”이라고 정의합니다. 하나님은 생명의 근원이며, 생사(生死)를 결정하는 심판자이십니다. 그 하나님께 받은 의는 하나님 앞에서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생존권, 양자권입니다.

성경에서 히브리어 체다카(tsedaqah), 헬라어 디카이오쉬네(dikaiosyne)가 주된 어휘입니다. 그런데 구약성경에서는 체다카(tsedaqah)는 공의로 번역했고, 미쉬파트(mishpat)는 정의(正意)로 번역하는 경향입니다. 미슈파트(משפט)는 원래 재판관(shofet)에 의한 판결을 의미하며, 정의, 공법(公法), 등으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성경의 미쉬파트와 체다카가 두 성격이 의의 두 가지 성격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아모스 5:24(참고 겔 18:9)를 LXX에서 번역할 때에, 미쉬파트는 κρίμα(정의, 판결)로, 체다카는 δικαιοσύνη(의)로 번역했습니다(καὶ κυλισθήσεται ὡς ὕδωρ κρίμα καὶ δικαιοσύνη ὡς χειμάρρους ἄβατος/But let judgment roll down as water, and righteousness as an impassable torrent(lXX 영역)).

히)미슈파트. 헬)κρίμα(크리마). 라) iustitia, 영) justice 우리말로는 ‘정의’이고, 히)체다카. 헬)δικαιοσύνη. 라) iustitia, 영) right, 우리말로는 ’공의‘입니다.

‘κρίμα’는 신약성경 기록에서 등장합니다. 영역에서는 judgement, condemnation으로, 마. 23:14; 롬. 3:8; 5:16, 13:2; 고전. 11:29; 딤전. 5:12, 벧전 4:17 등입니다. 판결, 정죄에 해당하는 어휘는 κρίσις, κρίνω, κατακρίνω가 있습니다.

그런데 의를 이해하는 과정에 로마서 1:17의 디카이오스(δίκαιος), 롬 5:1 의롭다함을 받음, 디카이오덴테스(δικαιωθέντες), 롬 5:16, 디카이오마(δικαίωμα) 어휘 연구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데 로마서 5장에 κρίμα와 κατάκριμα도 제시되고 있습니다(롬 5:16).

16 καὶ οὐχ ὡς δι’ ἑνὸς ἁμαρτήσαντος τὸ δώρημα· τὸ μὲν γὰρ κρίμα ἐξ ἑνὸς εἰς κατάκριμα, τὸ δὲ χάρισμα ἐκ πολλῶν παραπτωμάτων εἰς δικαίωμα.

For the judgment following one trespass brought condemnation, but the free gift following many trespasses brought justification.(ESV)

εἰς δικαίωμα(5:16)은 justification으로. δικαιοσύνης(5:17)은 righteousness로 번역하는 경향입니다. 우리 번역에 “의롭다 하심에 이름”, “의의 선물”입니다. 성경 번역을 그대로 이해하자면, 죄인이 의인이 되는 것을 justification으로, 사람에게 주어진 선물은 righteousness으로 볼 수 있습니다. 다만 구약성경에서 just와 right는 미츠파트와 체다카로 번역하는 유형이었는데, 신약성경에 와서 크리마 judgement로, 디카이오마, 디카이오쉬네에서 justification과 righteousness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간단하게 정리하면, 하나님의 성품을 의(義)로 제시할 수 있고, 그 의에는 체다카와 미츠파트가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필자는 의(義), 체다카는 생명, 미츠파트는 심판으로 분류하고 있습니다. 아모스 선지자의 말씀처럼, 하나님의 공의와 하나님의 정의가 넘치는 세계를 상상합니다.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가 넘치는 세계가 어떤 세계일까요? 구약 선지자는 메시아의 오심을 구상(構想)했을 것입니다. 1세기 유대인들이 꿈꾼 하나님 나라는 구약성경에서 말씀하는 메시아 오심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메시아로 말미암아 이 땅의 안정과 번영을 꿈꿨습니다. 사도들도 그 범주에서 자유롭지 않았습니다. 승천하시기 전 예수께 이스라엘 나라가 언제 회복될 것인지를 질문했습니다(행 1:6). 부활하신 주 예수는 이스라엘 나라 회복이 아닌 승천하셨고, 성령 받음을 명령하셨습니다. 이스라엘 회복. 하나님 나라는 성령 받음으로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종교개혁시대까지 성경에서 제시하는 “하나님의 나라”는 “그리스도의 나라”로 대응되어 사용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그리스도의 나라의 시작은 성령받음에서 입니다. 시작이 같으면 끝이 같으며, 시작이 다르면 끝도 다릅니다.

δικαιοσύνη θεοῦ는 the righteousness of God, 하나님의 의입니다. “하나님의 의”와 “하나님의 칭의”는 같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의를 주셔서, 아담의 후손 중에서 일부에게 의롭다고 해주시는 것(εἰς δικαίωμα)이 칭의(justification)입니다.

의(義), 하나님의 의는 체다카와 미스파트입니다. 하나님의 의는 아담의 반역(Adam's transgression)과 전혀 다릅니다. 아담의 반역은 죽음이 왔습니다(롬 5:14). 아담이 오실 자의 모형인 것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오는 것에 대한 모형이며, 아담과 다른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the gift by grace)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롬 5:19에서 아담의 순종과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을 대조시켰습니다. 로마서 5:19에서 아담의 불순종과 예수의 순종을 대조시키며, 죄인과 의인으로 대조시켰습니다. “선인(善人)과 악인(惡人)”이 아니라, “죄인(罪人)과 의인(義人)”이었습니다. 불순종과 순종의 기준은 율법이 될 것입니다. 예수께서 율법에 순종했다는 주장은 당연한 것인데, 예수는 율법의 저자이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종으로서 율법을 받은 사역자인데, 그 율법을 주신 분이 예수(Logos asarkos)입니다. 예수께서 율법에 순종했다는 표현은 아담의 불순종과 대조적인 전개입니다. 예수께서 생명의 근원이심을 역사에 현시하는 기법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아담과 예수 그리스도 사이에 율법이 있는데, 율법으로 죄가 얼마나 가득한지 알 수 있는데, 죄에 대한 인식이 있을 때 은혜를 사모하게 됩니다. 죄와 은혜를 대조시키는데, 죄는 사망을 은혜는 의(생명)을 줍니다(롬 5:21). 의인(the righteous)은 믿음으로 의롭게 된 사람(a man is justified by faith)입니다. 의인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으로 삽니다(롬 8:2). 하나님께서 자기 의는 자기 백성에게 주심으로 백성이 의인이 됩니다. 구주 하나님의 이름은 예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죄인에서 의인으로 세우시기 위해서 십자가와 부활, 승천으로 성령파송으로 구원 도식을 대전환시켰습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게 하십니다(롬 10:13). 신자는 믿음을 주신 주의 이름을 알기 때문에, 그의 이름을 부를 수 있고, 주의 이름을 부름은 성령의 능력이 아니고서는 할 수 없습니다(롬 8장). 복음은 주의 이름입니다. 이름은 인격과 사역을 갖고 있습니다. 예수의 이름에 주와 구주의 인격과 사역이 있습니다. 믿는 자는 믿음의 주께 연합되어, 언제나 주의 이름을 부르며 믿음의 정진을 이룹니다. 자기에 있을 어떤 의로움에 관심을 두지 않고, 오직 주 예수의 이름이 전파되는 것을 사모하며 기뻐합니다(빌 1:18).

종교개혁가들은 칭의 된 후의 성화의 삶, 좀 더 그리스도인다운 삶, 참 그리스도인의 삶(혹은 분별) 등을 강조했습니다. 그것은 사회가 기독교 사회였기 때문입니다. 자기 사회를 기독교 사회라고 인지한 것은 좋은 판단이 아닙니다. 어거스틴은 <신국론>에서 기독교 도시라는 로마가 우상숭배와 음란이 가득한 곳이라고 지적했습니다. 복음 전도의 긴박성을 인지하지 못한 것입니다. 당시 유럽에는 세르베투스와 소시니안, 재세례파 등이 이미 드러내놓고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개혁파들은 자기화(보다 증진하는 믿음의 삶)을 추구했다면, 로마 카톨릭 진영에서는 예수회가 결성되어 유럽에서 축소된 것을 식민지와 아시아 지역에서 만회하려고 선교활동을 전개했고, 결국 세계적인 조직을 이루었습니다. 미국에서도 회중파가 정착했지만, 침례파가 다수가 된 것은 교리 논쟁(부흥운동 평가 등)에 빠진 집단과 달리, 복음 전도에 힘썼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루터와 칼빈은 교회 안에서 복음 전파를 강조했습니다. 그들은 예배 개혁을 추구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삶 속에서 복음대로 사는 것을 추구했습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복음 전파에 대해서 소홀하게 생각했고, 후일에 선교라는 다른 분야에서 복음을 전파한다고 주장하게 되었습니다. 복음 전파는 교회에 주어진 고유 임무입니다. 교회 밖 기관인 선교 단체에 복음 전파를 위탁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의는 복음에 나타나있고,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이 복음을 전파하지 않는다면 누가 듣고 구원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롬 10:14-15). 복음은 행동이 아닌 들음에서 납니다(롬 10:17). 그 복음을 들려줄 역할을 했던 이스라엘이 불순종하여 폐기되었고, 돌감람나무를 참감람나무에 접붙혔는데 폐기된 이스라엘처럼 활동하여 돌감람나무 열매만 맺힌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원가지도 아끼지 않으셨습니다(롬 11:22-23). 이제 이방인의 충만한 숫자가 들어오면 이스라엘까지 완전하게 구원을 얻습니다.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던 이스라엘은 폐지되었지만, 순종하지 않던 이방인을 불러 의롭다하시고 충만한 숫자가 차기까지 복음을 전하게 하셨습니다. 이방인의 충만한 숫자로 만물이 주께 나와 주께 영광이 세세토록 있을 것입니다(롬 11:36).

고경태 목사(형람서원, 한영대 겸임교수)
고경태 목사(형람서원, 한영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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