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사회는 아직도 1950년대 냉전 이데올로기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1970년대 산업화를 이루어 선진국과 유사한 경제규모를 이루었지만, 체계적인 학문을 이루지 못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서양 체계를 답습하는데 성공했지만, 한국화하는 것까지 정착시키지 못했다. 일반학문계가 그러한 것 같고, 신학계는 더욱 그러하다.

세계적인 대형교회가 즐비한 한국교회가 사회의 반지성주의를 선도하지 못한 기독교에 반지성주의가 강하기 때문이다. 기독교 반지성주의는 매우 위험하다. 그것은 자기 반지성주의를 정당화시키기 위해서 기독교를 선전 도구로 사용하기 때문이다(fallacy of putting the cart before the horse). 기독교는 결코 반지성주의와 한 쌍이 될 수 없다.

명문 대학을 졸업했기 때문에 지성주의라고 볼 수 없다. 탁월한 지성을 가졌다할지라도 사회를 반지성주의로 이끈다면 그는 반지성주의의 두목이지, 탁월한 지성으로 인정될 수 없다. 우리 사회의 반지성주의를 대변하는 것은 토론할 수 없는 풍토 때문이다. 광장은 토론의 광장이지 외침의 광장이 아니다. 촛불 집회나 태극기 집회의 광장은 토론이 아닌 자기 주장의 광장이었다. 그 광장에서 다른 의견을 볼 수 없었다. 같은 성향에게 환호를 다른 성향에게 야유를 퍼붓는 것은 반지성주의, 성숙하지 못한 지성의 태도이다.

대학 교육을 받은 지식인들에게 이러한 반지성주의가 나타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학문의 목적이 취업에 있기 때문이다. 지금 대한민국의 대학은 취업을 위한 단계에 불과하다. 취업과 좋은 수입을 내는 분야의 학과는 생존하지만, 그렇지 않는 학과는 과감하게 정리되곤 한다. 철학과가 없는 종합대학이 있을 정도이다. 종합대학(university)은 서양 교육 체계인데, 서양 학문의 기본은 신학, 법학, 의학(7년 학제)이다. 서울대학교가 종교학과를 운영하는 이유일 것이다. 약학 체계가 바뀌었고, 건축학과의 학제가 5년으로 늘어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광장에서 외치는 구호에 민중이 넘어가면 군중심리에 휩쓸려 개인의 의식이 사라지고 공동의식만 존재하는 반지성주의가 발생한다. 그것에 지식인이 동조하면 무서운 반지성주의가 발생한다. 그래서 단순하고 증명되지 않은 역사 지식을 배웠다고 선생이라고 추앙되는 이상한 현상이 발생한다. 반지성주의는 단순한 구도를 이해하고 확정하면서 발생한다. 즉 이해의 함정에 들어간 것이기 때문에 집단 지식으로 의식화(최면)된 것이다.

이해는 매우 예민한 인간 지성 기능이다. 인간은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 매우 제한적이기 때문이다. 그 예민한 기능을 제거하면 이해된 단순한 힘이 파괴력을 발휘하여 우월의식을 갖게 되지만, 타인에 대한 배려는 상실하게 된다. 그리고 자기를 굳건하게 위해서 단순 지식이 증진되지 않기 때문에, 타인을 대항하는 자세로 대치를 강하게 형성시킨다. 그래서 반지성주의는 지식의 증진이 아니라 폭력성이 등장할 수 밖에 없다. 자기 목적을 위해서 외부로 시선을 돌리기 위해서 강한 적을 대두시키기고 하며, 적이 없을 때에는 적을 상정시키기도 한다. 자기 단순한 지식으로 자기를 세울 수 없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죄의 굴레에서 벗어난 자유 종교이기 때문에 반지성주의는 용납될 수 없다. 그런데 한국교회는 반지성주의를 경건으로 미화시키는 성향이 있었고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다. 그러한 한국 교회 풍토에서 다양한 신비주의가 성장했다. 이제 한국 교회를 삼킬 정도가 되었다. 속히 반지성주의에서 벗어나야 한다. 반지성주의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빠르게 결과를 바라지 않아야 한다. 5년 정도에 결과가 나온다면 그것은 정상적인 지식으로 볼 수 없다. 어떤 지식의 성과를 하룻밤에 이루어주는 선생이 있다면, 훌륭한 선생이 아니라 거짓 선생이며 자기를 지배하는 압제자라고 생각해야 한다. 지식 이룸은 10년이 걸려도 이루지 못할 확률이 매우 높다. 그런데 자기 지식도 아니고 타인의 지식 이룸을 돕거나 지도하는데, 하룻밤에는 절대로 이룰 수 없다. 그것이 이루어졌다면 속임수이다. 거세된 수컷이 자기 기능을 하지 못하는 것처럼, 지성의 한 부분을 거세시켜 본래 기능을 없애버린 것이다.

이제 한국사회는 원하면 이루지는 급변 사회가 아니다. 마이너스 성장을 해도 부강한 나라가 되었다. 성장을 바라는 나라가 아니라 굳건한 나라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편이와 빠름을 위해서 인구 50%가 한 지역으로 집중된 이상한 구조를 이루었고, 빠름을 위해서 모든 산맥에 구멍을 뚫고 있다. 일제의 쇠말뚝에 대해서 흥분하던 민족이 그 산 밑을 뚫어버리는 기나긴 터널에 환호를 보내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우리 사회 구조는 1950년대처럼 단순하지 않다. 의식도 경제 수준도 매우 복잡해 졌다. 한국 사람이 외국에서 더 이상 기가 죽지도 않는다. 외국 유명 배우들이 영화 상영 홍보를 위해서 우리나라에 방문하는데도 별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런 우리 사회의 복잡성을 해소할 수 있는 지적 능력이 필요한 것이며, 복잡성을 단순케할 반지성의 강한 능력(구호)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구호로 그것을 이루려 한다면 결국 극과 극의 대치 정국을 만들어야 한다. 정치 지성은 자기 목적을 위해서 극단화를 추구할 수 있지만, 교회만큼은 그 소용돌이에 들어가지 않아야 한다. 사회가 양 극단으로 치닫는 것을 중화시키며 화합시킬 수 있는 지성을 교회가 소유해야 한다. 그 극단화에 더 앞장서는 기독교의 반지성주의는 자기 역할을 상실한 매우 위험한 형태이다. 기독교가 사회의 화합과 번영을 이룰 수 있는 탁월한 지성을 발휘해야 한다.

고경태 목사(형람서원, 한영대 겸임교수)
고경태 목사(형람서원, 한영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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