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헤럴드 최장일 주필께서 “한국의 교단별 목사 안수 절차”를 잘 소개했다. 아마도 코로나19 상황에서 교회개혁을 위한 방안을 놓고 목사 세움에 대한 비판적 시각이 발생하신 것 같다.

교회의 전문 사역자를 ‘목사(牧師, pastor)’라고 하는 것은 상례이다. 그러나 천주교, 정교회, 영국국교회(성공회)는 목사라고 하지 않고 ‘사제(司祭, priest)’라고 한다. 천주교는 ‘신부(神父)’라고 부른다.

중세시대 학문의 기본은 신학(神學)이다. 또 다른 학문은 의학(醫學)과 법학(法學)이다. 기본 학문인 7과목을 이수한 뒤에 전공 분야를 수련하는 체계였다. 3학(Trivium)은 문법, 수사학, 논리학이고, 4학(Quadrivium)은 대수학, 기하학, 천문학, 음악이다.

그러나 근대화되면서 중세 학제는 변화했고, 목사 양성 과정도 변화되었다. 그러나 7년 학제를 유지하는 것은 중세 학제를 근간을 유지하는 것이다. 4년 대학 교육과 3년 신학 교육(seminary)이다. 7년을 공부한 뒤에 사역을 할 수 있고, 전문 신학에 입문할 수 있다. 4년 신학교육과 3년 신학대학원 교육이 중복이라는 견해도 있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4년 일반교육을 받은 인재와 4년 신학교육을 받은 인재가 함께 경쟁하는 구도가 바람직하다. 그럼에도 매우 탁월한 학생에게는 정규 과정을 등급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효율성을 위해서 좋다. 그러나 교회 사역자는 규범적인 교육 기간과 연수 기간을 이수해야 한다. 7년 학제 운용은 개신교 교단이 공통적으로 운영한다. 그러나 7년 후 목사 안수까지 과정에서 약간의 차이를 갖고 있다.

장로교에서는 거의 유사하지만 처음 형성된 ‘강도사(講道師)’ 제도를 운영하고 있는 교단이 있고, ‘준목’ 제도 혹은 전도사에서 바로 목사로 가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신학교 졸업 후 목사가 되기까지 준비 기간(수련 기간)은 유사하다. 최장일 목사의 글에서도 볼 수 있듯이 감리교에서 목사 안수까지 과정은 장로교보다 좀 더 어렵다. 참고로 장로교가 운용하는 장로는 치리장로로 목사에게 있는 치리권은 분리시켜 협력하여 성도를 치리하도록 구도화시킨 정치 제도이다. 감리교와 침례교에는 (치리)장로를 세워 운용하지 않는다. 모든 목사는 ‘장로(elder)’이다. 장로를 목사라고 구분시킨 것은 pastor라는 용어 때문일 것이다. 목사가 장로라는 의식을 갖도록 주지시키는 것은 성경에서 등장한 장로의 직무를 계속하기 때문이다.

한국 목사 양성 프로그램에서 첫째 문제점은 교단별 신학 분별점이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초기 선교사들이 초교파적 부흥 운동에 영향을 받은 사역자들이 사역했기 때문이다. 침례교 신학교나 장로교 신학교나 교단은 다르지만 신학의 내용은 차이가 없을 수도 있다. 그것은 한국 장로교 신자들이 좋아하는 외국 사역자 중에서 장로교 사역자는 거의 없다. 오히려 침례교, 성공회 사역자를 좋아한다.

둘째, 장로교만의 문제일지 모르지만, 사역자 양육할 때에 개인이 신학을 연마하는 것이다. 그것은 네비우스 선교정책 - the Nevius Method of church planting, 자립(self-support), 자전(self-propagation), 자전(self-government) - 의 영향이라고 생각한다. 네비우스 정책은 선교정책으로 교회 세움에는 유용했지만, 교회정책으로는 바람직하지 않다. 교회는 자립이 아닌 협력과 형제에 대한 책임이기 때문이다. 목사후보생 양육에 대해서 책임지지 않으며, 양성하여 인준한 목사에 대해서도 책임 의식이 없다. 노회는 자기가 세운 사역자에 대한 책임 의식을 가져야 한다. 그렇게 된다면 목사후보생 선발에서 더 면밀한 검토가 진행될 것이다.

셋째, 학제 중심으로 신학 교육을 하는 것이다. 신학교가 너무나 체계적인 과정에 있기 때문에, 과정만 이수하면 자격을 획득하게 된다. 신학생들은 도제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신학교 교수와 교회 사역자들 중에서 1인 이상의 도제를 두어서 사역자의 인격적이고 실제적인 관계를 형성시켜야 한다. 과정 이수가 아닌, 엄격한 선생의 허락으로 졸업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렇게 되면 신학의 계보를 정확하게 알며, 신학을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될 것이다. 목사이면서도 신학을 분별하지 못하는 사역자가 너무나 많다. 냉혹하게 표현한다면, 신학을 분별하지 못하면 변증하지 못하기 때문에 “설교할 수 없는 능력자”라고 분류할 수 있다. 설교할 능력을 갖춘 목사후보생이 실재 사역 현장에서 설교를 하면서 현장 사역자에게 인정을 받아 목사가 되는 구도를 제언한다.

16세기 목사는 당시 최고의 지식인이었다. 그런데 1930년대 목사는 우리사회에서 지식수준이 낮았다. 춘원 이광수는 1917년 3월 「청춘」(靑春) 제11호에 “금일 조선야소교의 결점”을 기고하여 비판했다(계급적, 교회지상주의, 교역자의 무식함, 미신적).

“현시 조선 교회는 전제적, 계급적이요, 야소교의 근본 특징인 자유, 평등의 사상을 몰각하였으며 종교의 신앙을 인생의 전체로 여겨 신자, 비신자의 구별을 선인, 악인의 구별같이 하고……교역자가 문명을 이해하지 못하여 다수한 교인을 미신으로 이끌어 문명의 발전을 저해하여 미신적 신앙을 고집하여 문명적 종교의 사명을 감당치 못한다”(김인수의 글에서).

그런데 교정된 사례는 하나도 없다. 거기에 더해서 “교만”하기까지 하다. 자기를 성찰하지 못하고 타인의 과오를 지적하는데 앞장서고 있다.

그러한 가장 기본적인 문제는 교회 사역자의 무지이다. 기독교를 안다면 계급주의, 지나친 단순화 등은 허용하지 않는다. 가장 첨예한 영역인 종교 분야에서 서툰 사역자가 있는 것은 용광로 작업을 어린아이에게 맡긴 꼴이다. 험난한 환경을 이기며 전환시킬 수 있는 사역자를 양성할 수 있는 체계를 갖추어야 한다. 교회 사역자는 체계적인 과정을 이수해야 하는데, 전문 지식 훈련과 인격을 도야하는 체계를 거쳐서 양성해야 한다.

고경태 목사(형람서원, 한영대 겸임교수)
고경태 목사(형람서원, 한영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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