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사람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까?

A. 들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기독교TV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는 내용이 자주 방영되고 있다고 합니다. 그 방송을 보신 분께서 저에게 질문했을 때에 저는 “하나님을 음성을 직접 들을 수 없다”고 답변했습니다.

첫째,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듣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 자기 믿음을 고백하는 사람입니다. 간략하게 말하면 “듣는 사람이 아니라 말(고백)하는 사람”입니다. 들은 내용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자기가 말하는 내용이 중요합니다. 들은 내용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고백하는 내용을 밝히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둘째,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하실 때가 있었는데, 그 때도 소수의 자기 사역자에게 제한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사역자를 통해서 자기 의지를 밝히셨습니다.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에 황홀경은 전혀 나타나지 않습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임할 때에 “두려움” 혹은 “듣는 자가 거부하는 현상”이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듣는 일은 매우 이례적이기 때문에 사람은 절대로 즉각 수용할 수 없습니다. 지금은 주의 사역자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들을 수 없습니다.

셋째, 하나님께서 직접 음성으로 말씀하지 않음을 정확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성경의 충족성을 견지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들었다고 주장하신 분들의 내용은 “내가 너를 사랑한다” 등 극히 일반적인 내용입니다. 이런 내용도 있었다고 합니다. “사람은 오는 데는 순서가 있지만 가는 데는 순서가 없다” 이런 내용을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일반적으로 확립된 내용을 전능자께서 비상한 방법으로 말씀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어떤 목사는 이상한 소리로 말한 뒤에 “하나님께서 여러분 사랑합니다”로 통역까지 진행한 모습이 있기도 했습니다. 그러한 말은 이상한 소리로 하나님께서 들려줄 필요가 없습니다. 자연스러운 언어를 복잡하게 전하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일 것입니다.

넷째, 그리스도인은 신앙 체험을 합니다. 체험에서 각성(覺性)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그 때 내적음성이 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음성은 어디에 근거한 것입니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는 성경에 근거한 말씀입니다. “오는데 순서와 가는데 순서”는 성경도 아닌 일반 격언입니다. 근거가 있는 소리를 들었다면 그것은 내적 각성에 의한 하나님께서 주신 감동(感動)이지 하나님의 음성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적당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설교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는데 것에도 소극적이고 주의합니다. 일상생활의 충격(impact) 등에서 발생한 각성(覺性)을 하나님의 음성으로 결론하는 것은 성급한 결정입니다.

다섯째, 그리스도인의 신앙 체험은 매우 귀중한 것입니다. 그러나 체험은 표준이 될 수 없습니다. 슐라이어마허(Friedrich Schleiemacher, 1768-1834)가 종교감정(Feeling of Absolute Dependence)을 신앙 체험을 표준으로 삼아서 자유주의를 이끌었습니다. 자유주의가 붕괴되었다고 하는데, 여전히 체험을 부각시키는 것은 자유주의가 종식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신앙 체험은 각 개인이 소유한 자산이기 때문에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자기 신앙 체험을 말하는 것은 규범화의 우려가 있기 때문에 매우 주의해야 합니다. 우리나라에 많은 신앙 간증의 문제점이기도 될 수 있습니다. 자기 신앙 체험을 말하는 목적은 무엇일까요? 체험으로 자기 신앙의 정당성을 증명하려는 것은 매우 부당합니다. 성경에서는 적그리스도는 기적과 표적으로 미혹할 것이라고 말씀하였습니다(살후 2:9, 요일4:3, 요이1:7, 유1:4). 기독교의 표준은 진리입니다(요 8:32). 교회는 진리의 기둥과 터입니다(딤전 3:14-16). 진리는 주의 영께서 내주하셔서 들리는 복음에서(per verbum) 주시는 말씀입니다(cum verbo). 중보자께서 구속 사역을 완수하시고 승천하셔서 천상통치를 진행하실 때에는 하나님께서 자기 사역자나 백성에게 직접 말씀하시는 방식을 취하지 않으시며, 충만한 계시를 자기 사역자를 통해서 전달하십니다. 다른 방편으로 말씀을 직접 수납했을 때, 그 말씀의 전달자를 하나님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부당합니다.

여섯째, 만약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말을 들었다면 엄청나게 권위 있는 실체가 됩니다. 신의 음성을 들은 혹은 접한 사람은 그 자체로 신성화가 되기 때문입니다. 신과 접촉한 사람이 하는 발언은 자연스럽게 신적 권위를 갖게 됩니다. 무당들의 공통점은 신접(神接) 경험입니다. 그들의 세계는 신이 서열화가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오직 한 분 하나님뿐입니다. 그 하나님의 음성을 소유한 사람은 얼마나 특별한 사람이 되겠습니까? 그런데 그 하나님께서 상식적인 말을 전하는 인격이라면 그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눅 16:31).

일곱째, 기독교는 체험의 종교가 아니라 고백의 종교입니다. 자기 경험한 체험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믿는 내용을 말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사도행전에서 두 번이나 다메섹 경험을 진술하는데(행 22장, 행 26장), 경험의 놀라움이 아닌 주 예수 그리스도(부활하신 주 예수)를 증거하기 위한 방편이었습니다. 신앙 체험으로 주 예수가 증거된다면 유익할 것입니다. 체험했기 때문에 정당하다는 주장은 데카르트와 슐라이어마허의 주장에 편승하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성경과 교리에 근거해서 평가하며 평가받는 것을 즐거워합니다. 성경과 교리에 증명되지 않은 체험, 그리스도의 이름을 나타낼 수 없는 체험은 마음깊이 간직하며 타인에게 발설하지 않습니다. 체험은 나에게 준 보화이기 때문에 타인과 공유하는 보화가 아닙니다(참고, 마 13장, 밭에 감추인 보화 비유). 복음은 타인에게 적극적으로 말하는 보화입니다(참고, 마 13장, 값진 진주 비유).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를 사모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것”을 사모하는 그리스도인이길 바랍니다.

고경태 목사(형람서원, 한영대 겸임교수)
고경태 목사(형람서원, 한영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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