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훈 목사의 시[에딘버러 일본인교회 담임목사]

해당화

 

시절은 어느 새

아쉬운 봄을 갉아먹고

기다림은 가녀린 흔들림이 되었고

눈물은 선홍빛 아픔이 되었다

꽃잎 하나에 파도가 일렁이고

또 꽃잎 하나에

바다 향이 너울댄다

꽃잎 하나에 하늘이 베어 있고

또 꽃잎 하나에 짠내 묻은 바람을 담고

그렇게 온몸으로 사랑하여

땅에서 피어 하늘을 담아 바다로 진다

지고서야 그리던 바다가 된다

사랑하여 그렇게 피고 바라고 기다리다

너에게로 지는 것

떨어진 꽃잎 하나 바다에 흘러가거든

그 사랑

이제야 만난 것일 거라고

지고서야 꽃이 되었노라고.

   꽃 그늘 

 

그늘에도 어쩔 수 없는  

향기가 베어있나보다 

나비도 지나치지 못하고 

앉은 걸 보니 

그대 드리운 그늘만으로도 

나는 늘 봄이어라 

느닷없는 결별

    -코로나 사태에 대한 에딘버러의 단상

 

참 낯설다

햇살 쨍한 날이면

잘 익은 향긋한 딸기 밭에

노곤한 몸 녹아 내릴텐데

 

참 낯설어

마음 한켠 눈물 고인다

가시금작화 사이로 난

작은 길 걸으며

코끝

달콤한 바닐라 향

가득할텐데

 

참 낯설다

피어나 활짝 핀

봄을 향한 감탄이

어쩌면 이 봄에 찾아온

낯선 결별 때문에

이다지도 낯설다

 

사랑하는 이들의 따뜻한 포옹도

즐거이 건네는 눈인사도

결별의 벼랑 끝에

낯설게 댕그렁거린다.

담쟁이 사랑

 

연초록 봄햇살을 좇아

고전풍의

검은 색 담장을 보듬은 몸부림

 

지독히도 사랑하였노라고

생글거리는 노래였노라고

그 몸서리치는 시절의 필연에

너무도 사랑하여 꽃조차 되지 못하고

남겨진 눈물마저

진하디 진한 화석이 된거라고

또다시 봄이야 온들

그 어지럽도록 휘날리는

푸른 향기가 앉을 곳 있을까마는

남루한대로

함께 하므로 사랑이라고

 

봄이 아득히 멀어지는 어느날에라도

행여 지친 나비 날개짓으로 날아올라

떨어지는 꽃잎 바람에 휘날려

꽃이 되고

향기가 되어 주도록

아직도 사랑하노라고

끝없이 사랑하노라고

목련 그늘 지나며

 

봄이어서 피는 게 아니다

그리워 봄이 오는 것이다

 

우유 빛 담백한 봄이

세상 없을 매끈한 아름다움을 타고

흐르듯 미끄러진다

누군가의 노래이리라

작은 흔들림에 봄이 찰랑거린다

보는 이들마다 두근거린다

누군가의 편지이리라

아련한 추억 담아

터져 흩날리는

저마다의 사랑이라 불리울

 

봄이 너울거린다

노래가 흥얼거린다

추억이 눈부시다

그늘 아래를 걷는 나에겐

목련이 봄인지

봄이 목련인지

 

봄이어서 피어나는 것이 아니다

그리워 서성대는 봄의 소리가

귓가에 쟁쟁거린다.

백야(白夜)

 

어느 해인가 여름

한 낮의 사윈 시간들이

하얗게 쌓여있다

 

내 뒤척이며

불면의 악몽에 내 영혼은 절름거리고

끝인 듯 시작인 듯 모를 시간은

그렇게 침식되어 가는

밝은 밤

 

연방 울어대는 나즉한 새소리도

하얀 시간에 애처롭게 묻힌다

이토록 어둠에 목마른 적이 있던가

어색한 늘어짐에

애꿎은 시계만 들었다 놨다

 

새벽은 하얗게 왔는데

아직 새벽은 까마득하다.

별 헤는 밤

 

셀 수 없음을 알면서도

또 한번 헤어보다

불현듯 고마워진다

이 미칠 듯한 광경

혹여 보지 못할까

자신을 감춰 이 짙은 어둠

흩뿌린 이에게

 

찾을 수 없음을 알면서도

또 한번 빛 숲 헤매어 보다

불현듯 눈물이 난다

칠흑 어둠에 길 잃을까

자신을 떼어 하늘에

빛 그림자 남겨둔 이에게.

별의 향기를 짊어진 여행자

 

어둠이 납처럼 짓눌린 이에게

별의 향기를 짊어진 여행자가 되고 싶다

 

언제부터인지도 모를

팽나무 그늘에 놓인 와상에

선선히 앉아

지나가듯 얘기하고 총총히 가는

여행자처럼

누군가에게

별의 향기를 짊어진 여행자가 되고 싶다

 

어둠에 갉아 먹힌 달빛조차 초라한

다시 올 리 없는 그 밤을 아쉬워

한숨을 태우는 그 누군가에게

가늠조차 못할 그 무게에

무디어지고 헤어진

인생을 붙들고 있는

누군가에게

별의 향기를 짊어진 여행자가 되고 싶다

 

호호 불며

얼어붙은 숲 길 걷는

외로운 여행자의 동행이 되고 싶다

지난한 시간은 안개처럼 삼켜 지리니

남겨진 발자국은 향기 되리라

어둠의 고백

 

뜨거웠던 어둠은 새벽을 토해내고

바다의 깊음은 밤의 열정을 삼키고

몸서리치도록 아름다운

사랑의 언어를 쏟아낸다

 

너무 늦지 않았길…

 

도무지 잡아볼 수 없는 손길이었음에

가장 깊은 곳에 그리움만 감춘다

아무도 믿지 않을지도 몰라

한밤의 피워낸 그 빛나는 꽃을

그것 때문에 아침은

그다지도 빛나는 것을

 

사무치도록 슬픈 것은

단 한번이라도 보지도 못할 운명이면서도

밤은 이 깊은 침묵 속에서

별빛으로 새벽을 조각한다

순간도 마주칠 리 없을지라도

그대, 거기 있음을 알기에

따뜻함을, 빛남을 알기에

 

결코 받아볼 누구 없는 무의미한 고백일지라도

어둠은

지독히도 아름다운 모순의 언어

만날 수 없는 기다림의 고백

누군가의 기다림은

하염없는 아픔이고 눈물이고 또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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