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인호 박사와 함께 가는 누가복음 산책 (2)

 

임인호 / 서울신학대학, 호서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 호서대학교대학원 신약학박사, 서울신대-호서대-중앙신학교 외래교수 역임, 동인교회 담임목사
임인호 / 서울신학대학, 호서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 호서대학교대학원 신약학박사, 서울신대-호서대-중앙신학교 외래교수 역임, 동인교회 담임목사

서문에는 저자와 독자 그리고 글을 쓴 목적이 나옵니다. 짧지만 서문에는 중요한 많은 내용이 나옵니다. 그래서 가볍게 지나쳐서는 안 되고, 누가복음서를 읽을 때마다 서문에서 말한 바를 염두에 두며 읽고 연구할 필요가 있습니다.

서문에서 무엇보다도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데오빌로(θεόφιλο)’입니다. 누가복음서 독자로 언급되는 이 데오빌로가 누구인지? 하는 문제는 오리겐부터 오늘날까지 논쟁거리입니다. 데오빌로를 누가복음서 저작을 위한 ‘후견인’으로 혹은 ‘기독교인’으로 보기도 하며, 데오빌로를 ‘실제 인물’로 보기도, ‘상징적인 인물’로 보기도 합니다.

실제 인물로 보는 주장은 ‘데오빌로’를 부르는 칭호인 ‘각하’라는 말을 중요한 논거로 삼습니다. 왜냐하면 이 단어가 누가복음서와 동일 저자 문서인 사도행전에서 벨릭스와 베스도를 지칭할 때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요셉푸스의 <아피온에 대한 반박>을 보면, ‘각하’로 번역된 이 단어(κράτιστος)가 단순히 경칭의 의미인 ‘님’이나 ‘존귀한’이라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 것을 보면, 이 단어가 고위직의 호칭으로 단정하는 것은 힘들다 하겠습니다.

이 단어의 의미에 대한 고민이 우리 말 번역 성경에도 그래도 반영되어 있습니다. 개정역은 ‘데오빌로 각하로’, 표준새번역은 ‘존귀하신 데오빌로님으로’ 공동번역은 ‘존경하는 데오필로님’으로 가톨릭 200주년 성경은 ‘존귀하신 테오필로스님’로 번역합니다.

‘데오빌로’의 의미에 주목할 충분한 이유가 있습니다. 이 단어는 ‘하나님’과 ‘사랑하는’ 이라는 단어의 합성어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혹은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이 사랑하는 사람, 혹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누가복음서를 썼다고 보면 매우 그럴 듯합니다. 그래서 본인은 데오빌로를 실제 인물로 보는 것보다는 저자가 독자로 상정한 사람으로 보는 것이 더 적절하다고 주장합니다. 데오빌로를 이방인이며 고위직에 있는 사람이라고 보는 것은, 누가복음서의 독자로서도 잘 어울리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Saint Luke’, Guido Reni(1575~1642),1621
‘Saint Luke’, Guido Reni(1575~1642),1621

‘기독교인’이라는 말이 공식적으로 인정되거나 공식화되지 않았을 시절, 그래도 예수를 믿고 따르는 사람들을 부르는 말은 있었을 것입니다. 바로 이 단어가 ‘데오빌로’가 아닐까? 하는 추론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면서도, 할례는 받지 않는 이방인을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라고 불렀습니다. 예수를 믿고 따르는 사람들을 지칭하는 공식적인 말이 아직 없을 때, ‘데오빌로’가 대신하고 있지 않았을까하는 추론을 해 봅니다. 데오빌로를 이렇게 보게 하는 몇 가지 더 있습니다.

4절을 보면, 독자로 언급된 데오빌로는 말씀을 이미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알고 있는’이라는 단어는 ‘카테케세스(κατήχησις)인데, 초대교회에서는 전문용어였습니다. 클레멘트일서 17장1절이 기록될 때에 이 단어는 세례 지원자에게 행해진 세례 교육을 가리켰습니다. 그리고, 초대 기독교인들은 이 단어를 자기 선교 사업과 교회 생활의 본질적인 면, 즉 하나님의 구원 행동에 대한 가르침을 의미하는 특별한 단어로 사용하였고, 초신자, 그리고 가르침을 받는 문답자라는 의미로 사용하였습니다. 그리고 4절은 알고 있는 바를 확실하게 하기 위해서 누가복음서를 썼다고 말합니다. 이런 증거들로 데오빌로는 이미 말씀을 알고, 받아들인 사람이어야 합니다. 재미있는 것은 도로 포장의 한 방식인 ‘아스팔트’와 이 확실하게(아스파레이아)가 같은 의미입니다. 이렇게 누가는 누가복음서를 통해서 믿음이 흔들리는 사람들의 신앙을 견고하게 하려 한 것입니다. 이런 것들을 종합해서 누가복음서의 독자는 이미 신앙을 지닌 사람이라고 보는 것만은 적절합니다.

신앙은 어떻게 견고해 지는가? 어떻게 확고한 믿음을 견지할 수 있습니까? 누가복음서에 이런 질문을 한다면, 누가는 어떻게 대답할까요? 서문에 그 대답이 있습니다. 그런데 개정역에는 대답이 무엇인지를 잘 번역하지 않았습니다. 원문을 보면, 확신을 갖게 하는 과정이 나옵니다. 바로 ‘깨달음’의 과정입니다. 이 단어는 ‘에피기노스코오(ἐπιγινώσκω)’로, “알다”는 의미의 ‘기노스코(γινώσκω)’ 와 ‘위에, 근거하여’라는 의미를 지닌 ‘에피(ἐπί~)’가 결합된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누가복음서 마지막 부분에 한 번 더 나옵니다.

엠마오로 돌아가는 제자들은 눈이 가리워져서 예수와 함께 있으면서도 예수인지를 알아보지 못합니다(24:16). 하지만 이들의 눈이 밝아지자 예수를 알아봅니다(24:31). 그런데, 본문은 자세하게 보면, 이들의 눈이 밝아진 것에 대해서 이어지는 구절이 다르게 말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30절은 ‘예수께서 떡을 떼어 나눠 줄 때’라고 말하고, 32절은 ‘말씀하시고, 성경을 풀어주실 때’라고 말합니다.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떡과 말씀을 유비로 이해하면 가능합니다. 누가복음에는 이런 경우가 또 나옵니다. 예수께서 시험받을 때에,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는 말씀을 합니다. 이 말씀은 신명기 8장 3절의 인용인데, 신명기서 내용을 보면, 이렇습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신명기서에도 ‘떡’과 ‘말씀’이 개념적으로 연결되어 등장합니다.

‘Christ with his two disciples at Emmaus’, Hendrick Bloemaert)Museum Boijmans Van Beuningen)
‘Christ with his two disciples at Emmaus’, Hendrick Bloemaert)Museum Boijmans Van Beuningen)

신앙이 견고하지 못하고 흔들리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누가는 말씀의 부재, 말씀을 깨닫지 못함이라고 말합니다. 엠마오 제자들이 예수의 가르침을 통해 예수가 누구인지 알아본 것처럼 저자는 독자들이 누가복음서를 읽고 예수가 누구인지 깨달기(ἐπιγινώσκω)를 바랍니다. 예수와 같이 있으면서도 부활하신 예수를 알아보지 못한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 말씀을 통해서 변화되어 예수를 알아본 것처럼, 누가는 말씀을 알면서도 여전히 믿음이 부족한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누구인지 말씀으로 분명하게 알게 함으로 흔들리는 믿음을 견고한 믿음으로 나아가게 합니다. 이것이 누가복음서를 쓴 목적인 것입니다.

종합해서 요약해 말하면, 서문은 자기들 속에 이미 성취된 사건의 주인공이신 ‘예수’를, 이미 신앙을 지닌 ‘데오빌로’와 같은 사람들에게, 이들이 가진 말씀이 분명하다는 ‘확신’하도록 하며, ‘깨닫도록’ 하기 위해서, 잘 ‘구성’한 ‘이야기’로 ‘전승’위에 서 있고, 충분한 자격을 갖춘 자신이 누가복음서를 저술한다 말합니다.

이런 점들을 염두에 두면서 본인은 서문을 이렇게 번역하기를 제안합니다.

1장 1.2. 처음부터 목격자들과 말씀의 일꾼들이 우리에게 넘겨준 대로 우리 안에서 성취되었던 사건에 관한 이야기를 정리하고자 많은 이들이 시도했던 것 같이 3. 모든 것에 대해 새롭게, 자세하게 쫓았던 나도 당신에게 차례대로 쓰고자 생각하였습니다. 데오빌로 각하여, 4.(이렇게 하는 것은) 당신이 배웠던 그 말씀이 확실하다는 것을 당신으로 하여금 깨닫게 하기 위해서입니다(사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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