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른 뼈들이 살아 나리라

마르고 앙상한 산수유 나무에 바싹 마르고, 비틀어진 열매만 있는 모습
마르고 앙상한 산수유 나무에 바싹 마르고, 비틀어진 열매만 있는 모습

2021년 새해를 시작하면서 교회는 처절하게 부서지고 무너지고 있다. 밝은 새해를 시작도 하기 전에 교회는 세상에서 가장 못된 사악한 집단처럼 두들겨 맞고 있다. 세상으로부터 너무 맞다보니 어디서부터 시작해야할지 모를 정도로 정신이 하나 없다. 일어날 에너지도 다 빼앗겨 버린듯하다.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는 교회의 기능을 회복해야 하는데, 어디서부터 문제를 풀어가야 할지 막막할 뿐이다.

신천지는 정통기독교와 별개의 이단 집단으로 정죄되었기에 예외로 하더라도, 성도들 중에 인터콥에 관여된 분들이 제법 많을 뿐 아니라, 교회 깊숙이 들어와서 역할을 감당하고 있기에 그 피해가 자못 크다. 대부분 정통교단에서 이미 인터콥에 대해 이단판정 이전에 내리는 경고 조치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 교회에서는 방치하고 있다가, 코로나 위기 앞에서 교회는 철저하게 세상에 피해를 주는 집단으로 인식되고 말았다. 그것뿐만아니라 일부 대형교회들의 코로나바이러스 대면예배 강행으로 정부와 마찰을 빚으면서 사회의 질타를 당하고 있다. 교회가 세상의 위로자가 아니라 오히려 세상의 짐이 되는 요소로 전락하면서 맹비난을 받고 있다. 코로나바이러스는 시간만 지나가면 해결된다. 이미 백신이 나왔고, 치료제도 개발되어 임상 단계에 있다. 조금 견디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데, 이것을 정부의 교회 탄압과 신앙의 자유권을 박탈하는 것으로 몰고 가면 어쩌면 승소를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민심을 잃어버린다. 사람을 잃어버리면 결국에는 교회 건물만 덩그렁이 남게 된다는 것은 역사의 교훈이다.

지난 12SBS “그것이 알고 싶다는 생후 16개월 만에 숨진 정인 양이 양부모 학대로 사망했을 것이라는 보도가 나왔고, “방송과 언론보도에 따르면 정인 양은 생후 7개월 만에 양부모에게 입양된 것으로 파악되었고, “20201013일 세 번의 심정지 끝에 병원 응급실에서 결국 세상을 떠났다.” 설상가상으로 양부모는 기독교 명문대학 CC(campus couple)였고, 양부모의 부모들은 목회자이며, 양아버지는 유명한 기독교방송 PD였다는 사실에 세상 사람들은 경악을 하고 있다. 교회는 세상에 얼굴을 들고 이렇게 살라고 외칠 근거도 면목도 사라졌다. 예수 믿으세요, 천국이 있습니다. 성경이 답입니다. 라고 외칠 명분이 모두 사라졌다. 부끄러워서 세상에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을 정도로 기독교인은 심연의 깊은 골짜기로 추락하고 있다.

지금은 세상을 향해서 교회가 탄압 받고 있고 종교의 자유를 박탈 당하고 있다고 큰 소리치는 시기가 아니다. 바리새인처럼 종교인으로 전락한 우리들의 내면을 깊이 보며, 나는 죄인입니다. 하염없이 무릎 꿇고 통회 자복할 시간이다. 때와 시기를 잘 분별하는 지혜가 요청된다. 개 교회의 자유가 한국 교회을 침몰로 몰아넣을 수 있다는 생각을 잊지 말아야 한다. 한국교회는 하나이다. 공교회 의식을 가져야 함께 살 수 있다.

망가질 대로 망가진 교회, 우리 스스로 일어날 힘이 전혀 없다. 베데스다 연못가에 누워 있던 38년 된 병자와 같은 신세가 되었다. 많은 병자들이 연못가에 있었다. 그들은 물의 움직임을 기다리고 있었다. 천사가 가끔 내려와 물을 움직이게 하는데 움직인 후에 먼저 들어가는 사람은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되었다. 많은 다양한 병자들이 병을 치료받고자 하루 종일 연못가에 있으며 물을 쳐다보고 있다. 그 병자들 중에 38년 된 병자가 누워있었다. 예수님께서 네가 낫고자 하느냐”(5:6). 38년 된 병자가 대답하기를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5:7). 38년 된 병자는 나도 병을 치료받고 싶습니다. 그런데 물이 움직일 때 나를 못에 넣어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내가 가는 동안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갑니다. 38년 된 병자는 자신의 병을 치료받고 싶은 간절한 열망으로 가득차 있다. 누워 있는 인생에서 두발로 걷고 사람답게 살고 싶다는 소원이 간절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네가 낫고자 하느냐질문했을 때, 38년 된 병자처럼 그런 간절한 마음으로 고백할 수 있는가? 그런 마음의 믿음과 소원이 있는가를 점검해봐야 한다. 재정의 문제든, 진학의 문제든, 취업의 문제든, 가정의 문제이든, 건강의 문제이든, 신앙의 문제이든. 죄악의 문제든, 한국교회의 문제이든, 내 인생과 나라를 어둠의 터널에 가둬놓은 그것으로부터 놓임 받고자 하는 간절함이 있어야 한다.

마이클 로지에 저서, [끌어당김의 법칙]이 있다. 로지에가 말하는 끌어당김의 법칙이란 무엇인가? “긍정적 것이든 부정적인 것이든, 내 삶은 내가 주의와 에너지와 집중력을 쏘는 대상을 자연스럽게 끌어당긴다고 했다. 한마디로 말하면 우리가 바라는 모든 것을 가질 수 있다는 말이다. 이 말을 신앙적으로 접근한다면 믿으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 불가능이 없다는 말과 일맥상통한다. 38년 된 병자는 건강한 예수님을 자기 문제로 빨아들인 것이다. 예수님을 자기에게 집중시킨 것이다. “나를 못에 넣어줄 사람이 없습니다.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들어갑니다.”

경기가 어렵기 때문에 인생의 문이 닫힌 것은 아니다. 경기가 어렵더라도 일어나는 사람들은 있다. 경기가 좋더라도 무너지는 사람들도 많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이 말씀에 즉시 대답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은 반드시 일어난다. 그러나 내 삶에 어둠이 가득 차 있는데도 아무런 생각이 없다면 그 사람은 새로운 미래를 열어갈 수 없다.

작년 가을에 꺾어다 놓은 나무가 죽었다고 생각했는데 최근에 꽃을 피웠다.
작년 가을에 꺾어다 놓은 나무가 죽었다고 생각했는데 최근에 꽃을 피웠다.

철저하게 무너지고 있는 한국 교회를 향해서 주님은 묻고 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라는 물음 앞에 주님 한국교회를 치료해 주세요. 이 땅에 교회가 회복되기를 원합니다. 십자가 앞에 낮아지는 자세로 견딘다면 다시 소망의 꽃을 피울 것이다.

지난 가을, 교회 복도에 산수유 나무을 꺾어서 화병에 꽂아 놓았다. 겨울을 지나면서 열매는 비틀어지고 말라버렸다. 당연히 나무도 말라죽은 것으로 생각했다. 죽은 나무가 보기 흉하게 복도에 있어서 버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죽은 나무에 꽃이 피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전혀 하지 못했기에 자세히 보지 않았다. 금주 수요일 예배를 드리고 나와서 보니 나무에 꽃이 피어 있었다. 불가능한 일이 일어난 것이다. 알고 보니, 매주 장로님이 나무에 물을 부어 놓으신 것이다. 겉보기에는 모든 것이 죽어 있었다. 그런데 밑에서 물을 머금고 있었기에 1월에 생각지 않은 꽃을 보는 기쁨을 누리게 되었다.

한국교회가 죽은 것 같이 느껴진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을 삶으로 살아내는 교회와 교인들이 있는 한 시간은 걸리겠지만 반드시 다시 일어나 역사의 등불이 될 것이다. 유대인들은 무너진 성벽 앞에서 울며 기도하고 있다. 나도 그런 심정으로 주님의 나라가 회복되기를 다시 꿈을 꾼다. 마른뼈들이 주의 말씀을 들으면 다시 살아난다. 그 희망을 다시 품고 살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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