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욱중목사 시선, '철학'하십니까?

  • 입력 2021.05.07 17:00
  • 수정 2021.05.08 1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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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은 “지렛대(leverage)”와 같다

주식하십니까?” “코인하십니까?”- 요즘 20대로부터 은퇴세대에 이르기까지 전세대로부터 흔히 듣는 질문들이다. “영끌이란 신조어까지 등장하며 그 열기가 너무 뜨거워 투자 아닌 투기로 이어질까 많은 사람들이 걱정하고 있다. 오래전 소득 만불 시대에는 벼락부자되기 위해 그런 광풍이 불더니, 소득 삼만불 시대인 오늘날은 벼락거지를 면하기 위해 주식-코인-부동산광풍이 분다고 하니 소득지표에 역행하는 경제-사회심리가 참 아이러니하기 그지없다.

얼마전 이같은 긴장된 사희의 분위기를 그나마 위로해준 단비 같은 소식이 들렸다. 어느 여배우의 아카데미상 수상 소식이다. 70대 중반의 수상이라, 더 나아가 인생의 무수한 상처(scar)들을 딛고 일어서서 은막의 별(star)로 우뚝선 인간승리이기에 많은 국민, 더 나아가 수많은 세계인들에게 감동을 사고 남는 사건이었다. 수많은 화제를 낳은 그녀의 수상 소감중 눈에 뜨는 것은 그녀의 연기철학이었다. 이혼이 가져온 아픔과 가난 속에서 어린 두 아들들을 양육하기 위해 배역을 가리지 않고 생활비를 벌 수밖에 없었던 헝그리 정신과 그로부터 우러나오는 절박함이 그것이다. 그녀의 이런 연기철학이 이혼한 연예인으로서 겪을 수 밖에 없었던 수많은 사회적 차별과 편견 속에서 숱한 어려움들을 헤쳐 나갈 수 있었던 원동력이 되었던 것이다

그녀의 승리는 정신의 승리, “철학의 승리가 아닐까? 오늘날 영끌이니, “벼락거지니 하는 불안한 사회심리 속에서 고통받고 절망하는 많은 이들에게도 정작 필요한 것은 주식-부동산-코인보다는, 그 어떤 인생의 위기도 마침내 이기게 하는 정신력으로 무장하기 위해 철학에 관심을 갖는 일이 아닐까? 직면한 고난과 역경을 이기기 원한다면 주식하십니까?” 이전에 철학하십니까?”가 더욱 요긴한 질문이 아닐까?

주욱중목사, 조은비전교회담임, 연세대학과법학과졸업, (주)대우근무, 장신대신대원(M.Div), 역서로는 [거룩한 죽음], [지성인을 위한 신앙 지침서] 등이 있다.
주욱중목사, 조은비전교회담임, 연세대학과법학과졸업, (주)대우근무, 장신대신대원(M.Div), 역서로는 [거룩한 죽음], [지성인을 위한 신앙 지침서] 등이 있다.

철학은 무엇인가? 밥 먹여주는 것도 아닌 철학이 왜 그리도 중요한가? 철학의 사전적 의미는 인간과 세계에 대한 근본원리와 삶의 본질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근본원리또는 본질이 철학 속에 내포된 가장 중요한 관념일 것이다. 철학은 직립(直立)과 밀접하다. 모든 피조물들 중 인간만이 갖는 유일한 특징 중의 하나가 직립보행이라고 한다. 직립보행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중력을 거스르며 두 발로 디딜 수 있도록 발달한 인간의 근골격계에 있다. 두개골에서 골반까지 이어주는 척추관절과 그것을 지탱하는 근육의 발달이 인간의 직립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철학이란 내면의 직립보행을 가능하게 하는 내면의 근골격계와 같지 않을까? 하나님의 형상을 구현하며 참으로 인간적인 삶을 살기 위해 삶의 본질을 깨닫고, 그것을 구현하기 위해 반드시 지켜야 할 근본원리들이 구축되어야 할 것인데,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철학의 힘이다. “인간다운 삶을 위해 철학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듯 신앙인다운 삶을 위해서도 철학은 절대필요하다. 어거스틴은 다음과 같은 명제로 철학하는 신앙을 강조하였다.-“인식하기 위해서 믿으라. 그리고 믿기 위해서 인식하라”(Crede ut Intelligas, Intellige ut Credas).

철학하는 신앙은 무엇인가? 그것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세계 속에서 신앙의 본질이나 근본원리를 결코 양보하지 않음과 동시에 세상과 동떨어지지 않고 변화하는 세계 속에서 불변의 신앙가치를 구현하는 유연한 신앙이 아닐까?

뼈와 근육이 함께 움직임으로 직립의 운동성을 구현하듯 신앙하는 인간은 불변의 본질이나 근본원리(이는 마치 직립을 가능케하는 고정불변의 골격계와 같다)가 가변하는 세계 속에서 살아 움직일 수 있도록 끊임없이 생각하고 사고하는 철학적 노력(이는 마치 골격계로 움직이는 근육계와 같다)이 반드시 동반될 일이다 어거스틴의 위의 명제에서 믿음은 골격과 같고, 인식은 근육과 같다고 할 수 있기에 철학하는 신앙이야말로 든든한 내면의 근골격계를 이루어 가는 지름길이 아닐까

오늘날 한국교회는 철학하는 신앙을 추구하고 있는가? 목회자에게는 그에 걸맞는 목회철학이 있는가? 평신도들은 어떤 철학을 갖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가? 겉은 그럴듯해도 속이 텅빈 뼈는 작은 외력에 무너져 내리듯, “철학없는 신앙과 교회는 세속화의 외력(外力)에 속절없이 무너져 ()예수가 아니라 주()예수라는 비아냥을 세상으로부터 면할 수 없을 것이다.

이 땅의 교회가 거대한 몸집에 더해지는 세속화의 중력에 무너져서 더 이상 직립하지 못하고 네 발로 기어다니는 거대한 공룡으로 전락하지 않기 위해, 더 나아가 공룡처럼 멸절을 당하는 불행을 막기 위해 무엇보다 시급한 것은 철학하는 신앙의 회복에 있다. 사도 바울은 그의 서신들 곳곳에서 철학하는 신앙을 우리에게 교훈하고 있다. 그중에 하나가 고린도전서 610절이다 -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자로다남을 부요하게 하기 위해 스스로는 끊임없이 가난하게 머물게 하는 것”- 이것이 바울의 철학인 것이다.

얼마전 목회를 화려하게 마친 두 분이 계신다. 한 분은 재직시 사택으로 제공되었던 강남의 유명한 H아파트가 탐이 나서, 시무하던 교회가 분명한 거부의사를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떼를 쓰고 욕을 먹으면서까지 은퇴하면서 그 아파트를 차지한 분이다. 다른 한 분은 20여년을 재직하며 억대의 교회 부채를 상환할 능력과 기회가 있었지만, 은퇴시 까지 상환을 미룬 결과 기존의 부채 위에 자신의 거액의 퇴직금까지 빚으로 떠넘긴 분이다. 교회에는 엄청난 재정적 부담을 남기고 자신은 개인적 치부를 관철한 이들이다. 그러나 그 반대의 목회자들도 있다. 1980년대 말 목회를 한창 배울 때 목격한 일이다. 은퇴한 원로 목회자가 미국에 있는 자녀들에게로 영구출국하시면서 은퇴예우로 받았던 자신의 주택을 무상으로 시무하던 교회에 드리고 홀연히 출국하신 것이다. 같은 목회자들인데 무엇이 이같은 차이를 가져온 것일까?-“철학하는 신앙의 부재(不在)”에 있지 않을까? 아니 그보다 더 정확히 말하면 철학하는 신앙의 실종에 있다고 하겠다. 30여년 전 지금보다 더 가난했던 소득 5천불 시대에 가능했던 일이 소득 3만불 시대인 오늘날에는 오히려 더 찾아보기 힘들어졌으니 말이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새로운 활로는 바울과 같은 철학하는 신앙에 달려 있다. 철학은 지렛대(leverage)”와 같다. 지렛대가 작은 힘으로 큰 무게를 들어 올리듯 철학하는 신앙나의 가난을 통해 공동체(교회)의 부요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다윗의 물맷돌은 구국의 엄청난 레버리지가 되었고, 한 소년의 오병이어는 굶주린 5천여 명을 배부르게 먹인 또다른 지렛대가 되었다. 하나님이 이 시대를 향해 간절히 원하는 것은 바울-다윗-한 소년 같은 철학하는 신앙인들의 출현일 것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심이라”(고후 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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