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은 기념일이 참 많다. 거의 이틀에 한번 꼴이니 말이다. 그중 가정과 관련된 기념일들이 두드러진다. 어린이날, 어버이 날은 물론 입양의 날(11일), 성년의 날(17일), 부부의 날(21일)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가정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이같은 기념일들에도 불구하고, 주변에서 일어나는 몇몇 사건들은 우리들 가정의 현주소가 녹녹치 않음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우리 사회를 들끓게 하는 두 사건이 그렇다. 하나는 한강에서 일어난 의대생 변사 사건(이하 ‘한강 사건’), 다른 하나는 지난 14일 있었던 정인이 1심 선고(이하 ‘정인이 사건’)가 그것이다.
두 사건이 특히 많은 이들의 분노를 일으키는 이유는 무엇일까? ‘한강사건’은 친구의 갑작스런 죽음을 안타깝게 여기지는 못하고 처음부터 자신을 ‘법률적’으로만 방어하기에 급급한 생존자와 그 가족의 이기적 태도에, ‘정인이 사건’은 16개월 된 어린 입양아를 ‘짓밟아 죽인 죄’의 잔인함에서 더 나아가 피고인인 양부모의 파렴한 재판 태도에 있다고 하겠다. ‘가정의 달’을 기리는 우리 모두의 소망을 무색하게 하는 이같은 가정의 비극적 현실의 뿌리는 무엇일까?
‘가정(家庭)’은 ‘집 가(家)’와 ‘뜰 정庭)’이 합쳐진 단어이다. ‘가(家)’를 파자(破字)하면 지붕을 뜻하는 갓머리에 돼지 해(亥)로 이루어진 것을 알 수 있다. 가정의 기초로서의 재정적 중요성을 내포함과 동시에 옛날 집안에서 키우던 돼지를 그대로 옮겨 놓은 뜻도 있으리라. 가정의 또 다른 구성요소는 ‘정庭), 곧 뜰’에 있다. 크고 작은 뜰안에 뛰노는 가축과 심고 가꾸는 식물들이 가정의 빼놓을 수 없는 요소란 뜻이리라. 어릴적 좁지 않은 뜰의 한켠에는 채마밭이 있었고, 다른 한켠에는 작은 닭장이 있었다. 채마밭은 철마다 필요한 채소를 공급해 주고, 겨울에는 김장독을 묻는 겨울냉장고가 되었다. 철따라 채마밭을 뒤엎으면 코끝에는 흙내음이 진동을 하였다. 작은 닭장 안에서는 아침마다 신선한 달걀을 공급해 주었고, 특히 어느 겨울 눈오는 날 알을 낳았다고 재촉하는 닭울음 소리에 손에 들린 따스한 달걀의 촉감을 5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결코 잊을 수 없다.
이처럼 가정 안의 뜰은, 그 안에서 살아 숨쉬는 것들과의 교감을 통하여, 사람을 사람답게 만들어 주는 삶의 자리이다. 코 끝을 자극하는 흙내음은 ‘인생이 한줌의 흙’임을 깨우쳐 주는 살아있는 영성의 자리이며, 뜰 안의 살아 있는 모든 것들과의 교감은 나 외의 모든 생명체와의 공감능력을 키워주는 배움의 자리인 것이다. ‘한강사건’이나 ‘정인이 사건’이 많은 이들의 분노를 일으킨 주된 이유중의 하나가 ‘공감능력의 부재 또는 부족’은 아닐까? 한강에서 변사한 청년의 아버지가 내뿜은 한 맺힌 외침-“너희는 천년만년 살 것 같은가?”-은 아들을 잃는 친구 가족의 아픔에 공감하지 않는 생존자와 그 가족을 향한 절규가 아닌가. 어린 입양아를 죽인 죄로 1심에서 무기징역형을 선고 받을 만큼 큰 죄를 범하고도, 구치소 안에서는 잘먹고 잘 살 수 있는 정인이 양모의 기이한 행태는 공감능력을 상실한 괴물의 모습을 여실히 우리 사회에 보여 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
F. 니체는 그의 처녀작 “비극의 탄생”에서, 오늘의 이같은 불행한 사태들을 예견이라도 한 듯, 이렇게 말하고 있다. “지적 합리성에만 의거한 ‘아폴론적 이데아계’로만 인생을 바라보는 것은 천박한 것으로서, 거기에 ‘디오니소적 충동계’와의 긴장된 일체 관계가 더해질 때 인생을 제대로 바라볼 수 있다.” 니체의 이같은 혜안(慧眼)으로 가정의 의미를 바라본다면 이런 것이아닐까-‘가(家)’는 지적 합리성을 추구하는 ‘아폴론적 이데아계’의 상징어라면, 정(庭)은 ‘디오니소스적 충동계’의 상징어가 아닐까... ‘가(家)와 정(庭)’이 ‘긴장된 일체관계’를 이룰 때 천박함을 넘어 바람직한 가정을 이루어갈 수 있는 것은 아닐까.. 오늘날 빈발하는 가정의 비극은 ‘정(庭)’을 잃어버린 반쪽짜리 가정에서 시작되는 것은 아닐까. 하긴 ‘아파트’가 주거의 아폴론적 이데아계인 것처럼 ‘영끌’의 대상이 되어버린 오늘의 세태속에서 디오니소스적 충동계인 ‘뜰’은 이미 그 설 자리를 오래전 상실하지 않았는가? 뜰을 잃었기에 공감능력을 배양할 터전도 잃었고, 타인의 아픔에 공감하지 못하는 가정들이 속출하기에 오늘의 비극적 사건들을 막아 내기 힘든 것이 우리 사회의 현주소가 아니겠는가?
예수는 공감의 화신(化神)이다. 그의 온전한 인격 안에는 ‘하나님 나라’라는 아폴론적 이데아계에 대한 명징(明澄)한 논리뿐 아니라, 지극히 작은 자들의 세미한 신음소리를 하나라도 놓칠 수 없는 ‘공감’이란 디오니소스적 충동계가 긴장된 일체 관계를 이루고 있다. 그래서 예수는 결코 천박하지 않으며 더 없이 고매할 수 있고, 그러기에 ‘공감하는 신앙’이야 말로 예수를 바르게 믿고 있다는 확실한 증거가 될 수 있으리라.
‘뜰 있는 집’ 마저 재개발로 속속 무너지고, 그 대신 ‘뜰 없는 집’-니체의 표현을 빌리면 ‘천박한 집’-인 아파트들만 우후죽순처럼 늘어가는 세태 속에서 우리는 어디에서 공감능력을 배양할 뜨락을 찾을 수 있을까? 가난해서 뜰 있는 집을 마련하지 못한다면, ‘마음의 뜨락’이라도 잘 가꾸는 것은 어떨까? 정원을 뜻하는 가든(garden)은 gan(‘울타리’란 뜻)과 oden(또는 eden)의 합성어라고 하는데.......우리들 ‘마음이란 울타리(gan)’ 안에 ‘작은 에덴(eden)’을 끊임없이 가꾸어 간다면, 인간은 물론 다른 모든 생명체들과의 공감능력을 끊임없이 키워나갈 수 있지 않을까? 그리하여 우리 모두 공감하지 못하는 천박한 인생은 기필코 모면해야하지 않겠는가?
“이 세대를 무엇에 비할까? 마치 어린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서 다른 아이들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과 같다. ‘우리는 너희에게 피리를 불어도 춤을 추지 않았고, 너희가 애곡 을 해도 울지 않았다’” (마11:16-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