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의 터널을 통과하는 이들에게 전하는 따듯한 메시지

송광택 목사, 한국교회독서문화연구회(www.bookleader.org) 대표, 한국기독교작가협회 고문, 바울의교회 글향기도서관 담당목사
송광택 목사, 한국교회독서문화연구회(www.bookleader.org) 대표, 한국기독교작가협회 고문, 바울의교회 글향기도서관 담당목사

강정훈 목사의 신간 내게 왜 이러세요?(두란노)는 욥기 강해와 골수암으로 세상을 떠난 아내의 이야기를 씨줄과 날줄로 엮은 책이다. 저자는 <프롤로그>에서 말하기를, 이 책이 승리의 간증집은 아니지만, 고난의 시기를 통과하는 이들에게 용기를 주고 싶어 글을 썼다고 했다.

아내가 숨을 거두었다. 골수암에 걸려 5년간 투병하다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죽기에는 많이 아까운 41세였다. 골수암으로 시작한 병은 난소암이 되면서 병원에서 손을 놓았다. 그때부터 낙심과 고통의 연속이었다. 수없이 기도에 매달렸고 기도한 만큼 낙심했다. 골수암이 발병한 지 5년 차에 들어 아내의 병세가 깊어지자 안수기도로 능력이 나타난다는 기도원을 찾아 살려 달라 기도하며 눈물로 밤을 새웠다. 내 신학으로는 참석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은사집회였지만, 지푸라기라도 붙잡지 않고는 하루를 견디기가 힘들었다. 죽음을 대면한 절망적인 상황 앞에서 내 신학은 제대로 힘을 쓰지 못했다. 그만큼 아내의 골수암은 내 바닥을 드러나게 했다.”(4)

필자는 이 책을 통해 다시 한번 고난의 의미를 묵상하게 되었고 저자의 진솔한 고백에 공감하였다. 이 특별한 책은 우리에게 어떤 메시지를 던져주는 것일까?

첫째, 이 책은 인생의 신비에로 초대한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는 신비가 있다. 창조주께서는 지금도 일하시며 피조세계를 다스리신다고 그리스도인은 고백한다. 그 고백에는 섭리 신앙도 포함되어 있다.

우리는 인생의 어려운 문제, 특히 고난에 관하여 정답을 알지 못한다. 구약성경의 욥기가 이를 웅변적으로 보여준다. 욥기는 성경에서 가장 깊이 있는 책 가운데 하나다. 욥기 말고, 욥에 대한 언급이 나오는 최초의 책은 에스겔서다. 에스겔 선지자는 의인의 본보기로 노아, 다니엘, 욥을 언급한다(14:14, 20), 에스겔이 이 사람들을 알게 된 것이 성경 이야기를 통해서인지, 아니면 다른 전승을 통해서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저자에 의하면, 오랜 세월 사람들은 욥기의 주제를 고난으로 생각해 왔다.(28) 여러 책에서도 욥기의 주제를 왜 선한 사람들이 고통을 받는가?’라고 정리하고 있다. “신학자들, 설교자들조차 욥기 주제를 고난에서 멈춘다. 그러면서 욥기를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와 고난을 다루는 문학 중의 문학이라고 치켜세운다. 고난처럼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문학의 주제는 없기 때문이다. 어느 영문학 교수들은 신자이든 비신자이든 영문판 욥기를 읽으라고 권한다. 그만큼 욥기는 고난을 표현하고 묘사하는 데 탁월하다. 그러나 욥기를 고난에서만 멈추는 것은 이 책을 오해하는 것이다.”(29)

저자에 따르면, 욥기의 주제를 고난이라고 정해 버리면 답이 나오지 않는다. 핵심에서 벗어나기 때문이다. “욥에게 일어난 고난을 제대로 해석했다면 친구들과 마음 상하는 말을 주고받을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애초에 42장까지 갈 내용도 아니다. 그러면 욥기의 주제는 무엇인가? 욥기는 하나님의 절대주권과 의에 관한 이야기이다.”(30) 고난을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서 해석하지 못하고 일반적인 시각으로 잘못 해석하고 마는 잘못을 저자는 지적한다.

저자는 이 책에서 욥의 세 친구의 한계를 지적한다. “욥의 세 친구는 언어의 훈련이 안 된 사람이다. 지금 욥에게 필요한 것은 고난의 원인과 결과가 아니다. 그것은 욥이 살아가면서 하나님 앞에서 개인적으로 구하고 찾아갈 문제이다. 지금 친구들이 해야 하는 것은 감정의 언어이다. 아픔을 같이하고 위로해 주고 격려해 주어야 한다. 친구들은 이걸 못한 것이다. 욥에게는 지적인 언어, 교리적이고 신학적인 언어가 필요한 것이 아니다. 감성의 언어, 위로와 격려의 언어가 필요하다. 그러나 친구들은 신학 언어로 책망과 변론을 한다.”(150-151)

이 책은 인생의 신비를 이야기한다. 고난 가운데 있는 이에게 다가가는 법, 그에게 말하는 법을 가르쳐준다. 욥기에 나타난 하나님의 절대주권의 의미를 깨우쳐준다.

둘째, 저자는 상처 입은 치유자로서 이야기하고 있다. 페스탈로치는 고난과 눈물이 나를 높은 예지로 이끌어 올렸다. 보석과 즐거움은 이것을 이루어주지 못했을 것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저자도 힘든 시련을 겪으면서 말로 다할 수 없는 고통의 시간을 통과했다.

저자의 아내는 골수암으로 큰 수술을 네 번이나 받았다. 암이 발생한 왼쪽 다리는 시멘트 전봇대처럼 굳었고 종일 극심한 통증을 유발했다. 그렇게 투병하다가 5년을 살고 세상을 떠났다. 당시 큰 아이는 초등학교 5학년, 둘째는 4학년이었다.

아내가 천국으로 부르심 받은 때 나는 정말 슬펐다. 아내는 40대 초반이었다. 그 이른 나이 때문에 아팠다. 게다가 아내는 개척교회를 하면서 고생만 하다가 떠났다. 나는 아내가 불쌍했다. 엄마를 잃은 아이들도, 젊은 나이에 혼자된 나 자신도 불쌍했다. 무엇보다 우는 것조차 교회에 누가 될까 봐 마음껏 울지도 못하고 떠났을 아내에 대한 연민이 가장 고통스러웠다.”(78)

아내가 세상을 떠났을 때 나는 아무 생각도 없었다. 한없이 슬프기만 했다. 길을 잃어버린 느낌이었다. 하나님이 내 목회를 기뻐하지 않으시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에 흔들리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한 여인의 남편이면서 한 교회의 담임목사였다. 남편으로서는 한없이 슬픔에 빠져 있을 수밖에 없었지만, 담임목사로서는 너무 오래 무너져 있으면 안 되었다. 나는 아내를 보고 있지만, 우리 교회 성도들은 나를 보고 있었다. 그들은 아내와 나를 위해 나만큼이나 간절히 기도했고 매달렸던 사람들이다. 나마저 그들을 떠난다면 나를 통해 바라보던 하나님에 대한 인상이 퇴색될 수도 있었다. 그래서 견디고 일어났다. 책임감은 때때로 슬픔을 이기게 한다. 나는 날마다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아내의 빈자리를 바라보던 눈이 서서히 하나님을 향했다.”(93)

저자는 아내가 떠난 이십 수년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여러 교회에 설교와 강의를 다니면서도, 책을 여러 권 내면서도 아내에 관한 말은 하지 않았다. 행여 내 입에서 아내라는 단어가 나오면 아물어 가던 생채기가 덧나기라도 할까 봐 그 말을 금기어로 두고 혼자 버거운 삶을 버티어 냈다.

그렇게 세월이 흘렀다. ‘세월이 약이라는 말은 맞다. 아내가 떠난 지 3년 정도 되자 기억에서 조금씩 잊히기 시작했다. 그동안에는 알게 모르게 아내를 떠나보내지 않으려고 붙잡았던 것 같다. 교회를 개척하느라 고생만 하다 죽은 아내에게 미안해서 쉽게 보내 줄 수가 없었다. 내 기억에서조차 잊어버리면 너무 불쌍하다 생각했다. 아내를 붙잡은 만큼 내 삶은 흔들리고 힘들었다.”(6)

그러나 남편으로서는 외롭고 힘들어도 담임목사로서는 나약한 모습을 보여 줄 수가 없었다. 아무 일도 없었던 사람처럼 매달 교육 월간지 <교사의 벗>을 발간하고 목회에 매달렸다. 그렇게 아내가 남긴 빈자리를 채워 갔다.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께 많이도 섭섭했다. 이제는 입을 열고 싶다. 영문도 원인도 모르는 고난 가운데 침묵하던 욥이 입을 열었듯이 나도 이제는 입을 연다. 사실 그전에 입을 열고 싶었다. 느닷없이 우리에게 일어나는 고난을 주제로 뭔가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앞에서도 말했던 것처럼 아내의 죽음을 팔고 싶지 않았다. 값싼 눈물을 얻어 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망설였다. 그러나 이제는 우리처럼 아플 누군가에게 내 아팠던 세월을 이야기하고 싶다. 내가 걸었던 길을 뒤따라오는 사람들에게 고난의 불가피성을 말해 주고 싶다. 고통스럽고 슬펐던 세월, 이십 수년이 지났으니 이제는 입을 열어 아내의 고통을 팔아도 아내에게 누가 되지 않을 때가 된 것 같다는 판단이 생겼다.”(6-7)

내가 걸었던 길을

뒤따라오는 사람들에게

고난의 불가피성을 말해 주고 싶다.

미국의 정신과 의사 스캇 펙(M. Scott Peck)고난은 잠자던 용기와 지혜를 깨운다. 사실 고난은 우리에게 없던 용기와 지혜를 창조해 내기도 한다. 우리는 오직 고난을 통해 정신적, 영적으로 성숙할 수 있다.”라고 말했다. 그의 말처럼, 저자는 고난을 통과하면서 영적으로 강해졌고 지도자로서 이전보다 더 성숙하게 되었다.

헨리 나우웬(Henri Nouwen)상처 입은 치유자에서 이렇게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상처 입은 치유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에서 많은 상처를 받았습니다. 그분은 제자들의 배신으로 인해 상처를 받았고, 가족들로부터 거절받으셨으며, 십자가에서 살이 찢기는 상처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아버지 하나님께도 버림을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이 받았던 상처 때문에 사람들을 원망하지 않고 상처 받은 사람들을 가슴에 끌어안고 치유하시는 분이 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상처 받은 우리 인생을 이해하십니다.”

저자에 의하면예수님이 위로자의 바통을 우리에게 넘기신다.

예수님은 

위로자의 바통을

우리에게 넘기신다.

상처를 받았던 이들에게 지금 상처로 아파하는 이들을 치유하라고, 고난의 강을 건너 본 너희가 지금 그 강을 건너는 이들을 위로하라고, 우리에게 위로사의 자격증을 주시면서 잘 사용하라 하신다는 것이다.

이렇게 저자는 고난당하는 이의 아픔에 진심으로 공감하는 상처 입은 치유자가 되었다. 독자도 이 책을 통해 고난의 신비를 이해할 뿐만 아니라 고난을 통과한 후 성숙에 이르는 길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셋째, 이 책은 고난의 터널을 통과하는 이들을 위로한다. 함석헌은 뜻으로 본 한국역사에서 이렇게 말했다. “눈에 눈물이 어리면 그 렌즈를 통해 하늘나라가 보인다. 사람은 고난을 당해서만 까닭의 실꾸리를 감게 되고 그 실꾸리를 감아가면 영원의 문간에 이르고 만다.”

저자는 아주 솔직하게 이렇게 말한다. “나는 잘 견디었노라고, 이겼노라고 간증할 입장이 아니다. 그동안 두려웠고, 기도의 응답을 받지 못했을 때는 상처를 받아 잠시 기도 생활을 포기해 버렸을 정도다.”

저자는 내게 왜 이러세요?”라고 하나님께 수도 없이 물었다. 하나님께 많이도 섭섭했다. 어릴 때 비신자 가정에서 태어나서 얼마나 열심히 믿음을 지켜 왔는데 하나님이 나를 이렇게 대접하시다니. 이러시면 안 된다는 마음에 많이도 섭섭했다. 지금도 아주 조금은 진행형이다. 문득 아내가 생각나고 지난날의 고통이 오늘 일처럼 상처에 데이면 잊어버리고 살다가도 발딱 경기가 일어난다.(8-9)

저자는 이 책이 비극적인 상황에서 세월이 오래 흘러가지만 답을 찾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아직도 많이 아프세요? 이렇게 생각해 보면 조금 낫지 않을까요?’ 하는 조심스러운 목소리라고 말한다. “그냥 같이 아팠던 사람의 이야기로 이 책을 읽어 주기를 바란다. 이 책은 고난을 해석하고 해결하려는 내용이 아니다. 오늘도 고난당하는 이들에게 지금 걷는 길이 동굴이 아니라 터널이라는 사실을 알려 주려는 데 목적이 있다.”(9) 고통은 언제나 수수께끼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에 대해서 믿는 것과 인생에서 실제로 마주치는 현실 사이에는 간극이 있다. 좋은 사람들에게 악한 일이 생기는가 하면, 악한 사람들에게는 좋은 일이 일어난다. 우리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8:28)라는 것과 그렇게 일하시는 하나님을 믿지만, 정작 모든 것중에 악한 것이 포함되면 믿음이 흔들린다.”(24)

저자에 따르면, 하나님은 특히 고통에 관한 문제는 대답을 아끼신다. 고통에는 의미가 있다. 그 의미는 나 스스로가 찾아가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통해서 성숙해지고 고상해지고 하나님을 더욱 깊이 알아 갈 수 있었다고 말한다. 그런데 고통의 의미는 거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열이면 열, 백이면 백 자신이 당한 고통의 의미를 다르게 받아들인다. 또 한 사람이 느끼는 고통의 의미는 수십수백 가지가 되기도 한다. 그러기에 고통은 언제나 수수께끼다.(25)

저자는 욥기가 고통의 문제를 어떻게 풀까를 가르치는 책이 아니라고 말한다. “이 책은 욥의 의에 관한 책이다. 하나님은 동방 사람 욥이 인간의 의로움이 아닌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의로움을 얻기 바라셨다. 욥이 거룩의 옷 입기를 바라셨다. 그 거룩을 입기 위해 하나님이 요구하셨던 것이 고통이다! 욥기에서 말하는 고통은 하나님의 의를 알아 가기 위해 더 큰 목표로 올라가는 사다리일 뿐이다. 바로 그것이 욥기의 주제이다.”(53)

이 사실을 알면 더는 착한 사람들이 왜 고통을 당할까?”라고 질문하지 않는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 시간에 내 고통이 하나님의 선하신 섭리 아래에 있음을 알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게 된다.

저자는 말한다. “성 어거스틴은 하나님의 도성에서 의미 깊은 말을 했다. “고통은 동일하나 고통을 당하는 사람은 동일하지 않다.” 사람이 무슨 고통을 당하느냐?’가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당하느냐?’가 문제이다. 똑같은 바람이 불어오지만, 오물에서는 썩은 냄새가 나고 백합화는 향기를 날린다. 우리는 눈앞의 상황에 의문을 품고 살 때가 많다. 그러나 어떻게 생각하느냐? 어떻게 해석하느냐?’로 그 의미가 달라진다.“(264)

저자는 고난은 견디는 것이지 이유를 묻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이것은 고난당하는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위로를 기대하지 말라는 의미가 아닐 것이다. 고난은 신비이기에 답을 찾는데 골몰하지 말라는 뜻이다.

누구에게나 저마다의 아픔이 있다. 그리고 불행은 누구에게나 닥칠 수 있다. 하지만 지나간 슬픔에 새 눈물을 낭비하지 말라고 저자는 권면한다. 영국 시인 로버트 브라우닝 (Robert Browning)의 말처럼 아직도 가장 좋은 것은 남아 있다.” 그러니 고난이 계속되더라도 죽을 생각은 그만두고 살아갈 생각으로 살아야 한다. 가장 좋은 날은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신이 지금 걷는 길은 동굴이 아니라 터널임을 기억하십시오.” 이것이 저자가 이 책에서 주는 격려와 위로의 메시지다.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8:18,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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