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5장은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를 잘 설명하고 있다. 포도원 주인은 하나님이고, 포도나무는 예수님이고 가지는 제자이다. 이 비유의 중요한 논점은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어야지만 열매를 맺을 수 있다. 가지의 생존 법칙은 포도나무에 붙어 있을 때만 가능하다. 가지는 순례자의 삶을 완성하기 위해 선택의 문제앞에 늘 놓여 있다.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인생의 방향이 완전히 달라진다.
선택1, 성공이냐? 성장이냐?
가지의 지향점이 성공이냐? 아니면 성장이냐? 선택의 문제이다. 성공과 성장은 비슷한 개념인 것 같은데, 결과는 완전히 달라진다.
(1)성공의 기준점은 1등이다. 성공에는 서열이 존재한다. 1등과 비교하다보면 늘 열등감에 쫓긴다. 늘 부족하다는 느낌만 받는다. 기쁨과 감사를 잃어버리게 된다. 그러나 성장의 기준점은 자기 자신이다. 비교의 대상이 타인이 아니라 자기자신이다. 어제보다 오늘 웃으면서 시작했다면 성장한 것이다.
(2)성장의 한계는 어디까지인가? 성장에는 한계가 없다. 성장의 목표는 예수님이다. 주님이 은혜를 주시는 대로 장성한 분량까지 성장해 가면된다.
(3)성장에는 지름길이 없다. 오직 주님께 붙어있어야지만 온전한 성장을 기대할 수 있다.(요15:4-5, 7-8). 주안에서 온전한 성장을 원하는가? 예수님 안에 거할 때 성장이 있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어야지만 가지는 생존이 가능하고 열매를 많이 맺을 수 있다. 성장을 원한다면 기본부터 다시 점검하는 것이 우선이다. 가지의 사명은 나무에 붙어있어야 한다.
(4)상황논리에 익숙하면 온전한 성장은 거의 기대할 수 없다. 예수님 안에 살라. 나무에 붙어 있으라. 그러면 성장은 자연스러운 현상이 된다.
(5)성공에 매몰되다보면 가장 소중한 것을 잃어버리게 된다. 가장 큰 손실은 예수님을 잃어버리게 된다. 그러나 성장에 초점을 맞추면, 기쁨과 감사와 열정과 관계가 회복된다.
선택2. 안주냐? 비전이냐?
(1)사람의 성향은 안정되면 안주를 선택한다. 그러나 성경은 안주보다 비전을 향해 한발 한발 내딛을 때 삶은 정결해지고 건강한 에너지가 흐른다. 안주를 선택하는 순간 점점 편안함을 찾게 되고, 현재 가지고 있는 것만 지키려고 한다. 새로운 시도를 포기한다. 결국에는 안주를 선택하는 순간 미래로 한발자국도 나갈 수 없다. 그러나 비전을 선택할 때 현재를 지킬 뿐아니라 미지의 미래가 열리게 된다.
(2)예수님과 3명의 제자들이 높은산에 기도하러 올라갔다. 주님이 기도하실 때에 세 가지 현상이 있었다. 첫째는 용모가 변했다. 기도하면 얼굴 인상이 바뀐다. 광채가 나고 해같이 빛난다. 얼굴이 밝고 선한 에너지가 나온다, 둘째는 옷이 희어져 광체가 낫다. 희어졌다는 것은 순결을 상징한다. 은혜받은 사람은 옷차림이 달라진다. 옷에 품격과 신앙이 있다.
셋째는, 기도의 자리에 율법의 대표 모세와 선지자의 대표 엘리야가 등장하여 예수님과 함께 대화를 나누었다. 그 모습을 베드로가 보았다. 베드로가 주님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만일 주께서 원하시면 내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자고 제안했다. 이 지점에서 생각해볼 것이 있다. 하나님의 은혜로 한국교회와 성도들이 큰 복을 누렸다. 그런데 그 은혜에 취해서 “여기가 좋사오니”하며 그 자리에 머물러 있다. 비전을 향해 사명의 장으로 나아가려고 하지 않는다. 은혜와 황홀경에 취해있던 베드로에게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말씀을 잘 들으라’는 메시지를 남겼다. 가지는 안주에 초점을 두지 말고, 항상 예수님 말씀 따라 사명의 자리로 나아가야 한다. 가지는 비전을 붙들어야 한다.
선택3. 말씀을 따라갈 것인가? 상식을 따라갈 것인가?
(1)말씀과 상식은 출발 자체가 다르다. 말씀의 출발은 하나님이다. 그러나 상식의 출발은 나의 경험과 지식과 상황이다.
(2)시므온은 예루살렘 성전을 떠나지 않고 구원자 메시야를 기다렸다. 그때 마리아가 아이 예수님의 정결예식을 위해 예루살렘 성전에 갔다. 아이를 보자마자 안고서 기도를 드렸다(눅2:28-32). 시므온은 하나님으로부터 “너는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는 메시지를 받았다. 그는 메시지를 받고, 메시야를 기다렸다. 시므온은 말씀에 의지하여 이스라엘의 위로자를 기다리며 살았다. 하나님의 때에 예루살렘 성전에서 아기 예수를 만나 축복하는 기쁨을 누렸다.
(3)말씀을 따른 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결단이 필요하다. 나의 편리함을 내려놓아야 한다. 그래야 말씀을 따라갈 수 있다. 말씀을 따라가는 것은 전부를 내려놓는 결단이 필요하다..
선택4. 물질의 유산을 물려줄 것인가? 신앙의 유산을 물려줄 것인가?
(1)어떤 유산을 물려줄 것인가? 후손들에게, 다음세대들에게 어떤 정신을 물려주는 것이 가장 가치있고, 썩지도 않고,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빛나는 것이 무엇일까? 우리는 모두 동의를 한다. 물질이 아니라 신앙의 유산이라는 것을 안다.
(2)물질은 주기가 짧다. 물질은 가질수록 부족하다. 물질에 대한 가치가 부족하면 탐욕으로 발전하고 결국 물질의 노예가 된다. 물질에 청지기 정신이 없다면, 그 물질로 인해 망한다.
(3)신앙의 유산은 100년 200년 1000년 지속된다. 신앙에는 영혼이 담겨져 있기에 영원한 가치를 제공한다.
(4)모세는 광야세대에게 진짜 사는 길을 제시했다. 그것은 바로 믿음의 유산, 신앙의 유산이다. 광야세대에게 모세는 생명과 복을 선택하라고 명령한다(신31:15,16). 가나안 땅에서 복을 받는 길이 무엇인가? 생명과 복의 길은 무엇인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말씀을 지키는 것이다. 우상숭배하고 다른 신을 섬기며 하나님을 버리게 되면, 한마디로 말하면 믿음의 길을 포기하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신31:17,18). 믿음의 길을 포기하면 “너희는 반드시 망할 것이다” “너희가 차지할 땅에서 너희 날이 길지 못할 것이다”
저주와 화를 선택할 것인가? 아니면 생명과 복을 선택할 것인가? 그 선택은 각자에게 달려있다. 우리 가족은 믿음의 대를 이어가는 축복의 가정을 이루겠다는 꿈이 있다면 믿음을 선택할 것이다. 다음세대에 관심이 없다면, 내 후손들이 어떻게 살든 그것은 그들의 몫이다. 나는 관심 없다고 생각한다면, 신앙의 대가 끊어질 것이고, 가문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사라질 것이다.
신앙은 선택이다. 가지의 생존법칙은 선택에 달려있다.
(1)가지의 사명은 포도나무에 붙어 있는 것이다. 그럴 때 성장은 자연스러운 결과로 이어진다.
(2)안주하는 신앙이 아니라 비전을 가꾸는 신앙을 선택하라. 이것이 사는 길이다.
(3)말씀을 따라갈 것인가? 상식을 따라갈 것인가? 상식의 길에는 열매가 없다. 기적이 없다. 믿음의 이야기가 없다. 이것이 가장 큰 패착이다. 그러나 말씀의 길을 따라가면 항상 아름다운 믿음의 이야기가 있다. 믿음의 이야기가 있는 것이 축복이다.
(4)물질의 유산이냐 신앙의 유산이냐? 무엇을 후손들에게 물려줄 것인가? 모세의 설교를 잊지 말라. 팬데믹으로 인해 어려움이 있지만 한국교회 아직도 부자이다. 물질로 교회를 평가하지 말라. 신앙이 뒷받침이 안된 교회 자산은 어둠의 자식들이 모두 팔아서 난도질을 한다. 교회는 후손들에게 신앙의 유산을 물려주는데 목숨을 걸어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