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대면 예배가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영적 예배(로마서 12:1-2)인가?

 

김대운 목사(수원경성교회, 예장 합동)
김대운 목사(수원경성교회, 예장 합동)

우리는 지난 시간에 요한복음 420-26을 중심으로 예배는 장소나 형식이 중요하지 않기 때문에 비대면 예배도 문제 될 것이 없다는 주장의 오류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예배의 대상이신 삼위하나님께 올려드리는 예배는 성경이 명령하는 한도를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더군다나 주께서 명령하신 예배는 회중의 모임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회중으로 모이지 않을 뿐 아니라 성경의 명령이 아닌 정부의 명령을 따르는 예배가 어찌 합당한 예배의 방식일 수 있겠습니까? 이는 성경의 명령에서 벗어난 잘못된 예배의 방식입니다.

오늘은 지난 시간에 이어서 로마서 121-2절을 중심으로 비대면 예배가 이웃 사랑을 실천하기 위한 예배라는 주장의 오류와 모순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로마서 12:1-2).”

 

1. 비대면 예배가 이웃사랑을 실천하는 예배일까요?

바울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우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고 권면했습니다.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이란 전적인 은혜의 역사로 우리를 구원하여 주신 주님의 자비의 관점이란 말입니다. 이러한 시각에서 볼 때 우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는 것이 우리가 드려야 할 영적 예배, 합당한 예배라는 말입니다. 제물은 죽음이 전제되어 있는 데, 죽은 제물이 아니라 산제물이라고 함으로써 이는 곧 거룩한 희생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즉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하여 자신을 희생하는 것이 바로 우리가 드려야 할 영적 예배, 주님께 드려야 할 합당한 예배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팬데믹 시대에 대면예배는 코로나 확산의 위험성이 있으니까 주님께 드려지는 영적예배, 합리적 예배가 될 수 없다는 주장이 많은 호응을 얻었습니다. 이웃의 생명을 해칠 수 있는 예배가 어떻게 주님께 드려지는 합당한 예배가 될 수 있는가라는 물음과 함께 그들은 현장 예배를 고수해서는 안 된다고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여기에 많은 교회와 교인들이 수긍했습니다. 비대면 예배의 신학적 위험성을 외치는 소수의 목소리는 그냥 묻히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이 주장이 과연 성경적으로 합당한 주장일까요? 과연 이 주장의 근거로 로마서 12장 본문이 사용될 수 있을까요? 과연 전염병 확산을 막기 위하여 모든 모임을 중단하고 예배까지 비대면으로 전환하는 막대한 희생을 치를 때 주께서 영적예배, 합당한 예배로 받으신다고 생각하시나요?

전염병 확산을 막기 위한 이웃 사랑의 실천은 방역수칙을 철저히 준수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그 동안 교회는 정부에서 요구한 것보다 더 높은 수준으로 방역수칙을 지켜왔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방역수칙을 철저히 지킨 교회에서는 확진자가 다녀갔어도 집단감염이 발생하지 않았습니다. 일례로 수원중앙침례교회의 경우 코로나바이러스에 감염된 교인 세 명이 바이러스가 전파될 수 있는 기간에 각각 1~3회에 걸쳐 교회 예배에 참여했으나 이 세 명 모두 마스크를 착용했고, 같은 예배에 참석했던 700여 명의 교인도 모두 마스크를 착용함으로 집단감염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방대본은 이를 방역 모범 사례로 소개했고, 많은 주류 언론들이 마스크의 힘이라는 제목을 붙여서 이 사례를 보도했습니다. 집단감염이 발생한 소수의 교회는 방역수칙을 어긴 것이 그 원인으로 지목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웃을 사랑해야 하니까 모든 교회가 모이면 안 된다고요? 그러면 마스크를 벗고 취식을 해야 하는 식당이나 카페를 운영하는 그리스도인은 이웃에게 코로나를 확산시키지 않기 위해서 코로나가 종식될 때까지 운영을 중단해야 하나요? 그러면 임대료와 직원 월급, 관리비는 어떻게 충당해야 할까요? 방역수칙을 철저히 지키면서 운영해도 이웃 사랑의 법을 어기는 것인가요? 그리스도인 버스 운전기사와 지하철 기관사도 밀폐된 공간에 사람들이 많이 운집하도록 만드니까 한동안 일을 그만둬야 할까요? 또 그리스도인들은 감염의 연결고리가 되지 않기 위하여 대중교통도 피하고, 시장이나 마트도 이용하면 안 될까요?

이웃사랑의 가장 강력한 실천은 비대면 예배가 아닙니다. 그런 논리라면 우리는 모든 외부 활동을 중단하고 집에만 머물러야만 합니다. 그러나 수많은 교인이 예배는 비대면으로 드리면서 친구들과 친족들을 만나고 휴가를 가고 사람들이 운집하는 마트와 백화점, 시장, 커피숍에서 대면으로 사람들을 만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비대면으로 드릴 정도로 이웃을 사랑하는 신자라면 당연히 모든 활동을 비대면으로 전환해야 함에도 예배를 제외한 거의 모든 활동을 대면으로 진행하는 위선적 행태를 보이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보여야 할 진정한 이웃사랑은 다름 아닌 복음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코로나로 어려움을 당한 이들을 돌아보는 것입니다. 현장 예배를 포기하는 것은 이웃사랑 실천이 아니라 오히려 두려움과 불안함을 핑계로 타협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복음을 실천하는 가장 기본이 바로 예배입니다. 1세기의 기독교인들을 생각해 보세요. 그들에게 예배란 목숨을 거는 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주일에 모여 있으면 더 쉽게 발각될 수 있었습니다. 잡힐 위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예배에 나왔습니다. 주님의 은혜에 대한 고마움이 생명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주 앞에 나오도록 만들었습니다.

청교도들은 정부가 명령하는 예배가 아닌 성경의 명령을 따라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스코틀랜드의 언약도들도 국교회 예배를 거부하고 가정에 모여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러자 국왕은 5인 이상 집합금지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야외에 모여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모임을 소집한 자들은 사형, 모임에 임한 자들은 재산을 몰수당해도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지켜진 스코틀랜드의 신앙이 바로 장로교입니다.

북한에 있는 지하교회 교인들도 예배드리다가 발각되면 전원 노동교화소나 총살을 당합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몰래 모여서 예배를 드립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청교도들, 언약도들, 북한의 그리스도인들이 왜 그렇게 목숨을 걸면서까지 예배를 드린다고 생각하십니까?

주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 때문이었습니다. 주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가 그들로 하여금 목숨을 걸고 주님 앞에 나와서 예배를 드리도록 이끌었습니다. 이렇게 목숨을 걸고 예배를 드리는 모습 자체가 그들이 믿고 있는 복음을 실천하는 방법이었습니다. 목숨을 걸고 예배를 드리는 이들의 모습이 곧 복음의 진리에 대한 강력한 외침이었습니다. 이렇게 목숨을 걸고 예배드리는 신앙인들의 삶이 어떻겠습니까? 그들은 주님께서 받으시는 거룩한 산제물이 되기 위하여 예배 뿐 아니라 모든 일에서 복음의 진리를 위하여 자신을 희생하는 이웃 사랑의 실천가들이었습니다.

이웃 사랑의 예배 적용은 방역수칙을 철저히 지키고 전염병으로 어려움 중에 있는 이웃을 돌아보는 것만으로 충분합니다. 이웃 사랑을 이유로 예배를 포기하는 것은 합당한 적용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만일 그러한 이유로 예배까지 포기해야 한다면 우리의 모든 일상생활을 포기하고 집에만 머물러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처럼 이웃 사랑을 내세워 비대면 예배를 정당화시킬 수는 없습니다. 이웃을 위한 우리의 희생은 철저한 방역과 함께 코로나로 인하여 어려움을 당한 이웃들을 돌아보는 것만으로 충분합니다. 코로나를 핑계로 대면예배까지는 희생할 수가 없습니다.

 

2. 비대면 예배는 세속을 본받은 예배.

바울은 우리가 주님께 드려야 할 영적 예배를 말하면서 가장 중요한 조건으로 세상을 본받지 않아야 함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과연 모이지 않고 영상을 이용하여 가정에서 드리는 비대면 예배가 여기에 부합한다고 생각하십니까?

물론 영상이라는 문명의 이기를 많은 부분에서 사용할 수는 있습니다. 교회의 선교나 친목, 성경 공부를 위해서는 사용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공 예배에 적용하는 데는 많은 문제점이 따릅니다. 대한예수교장로회 대신 측 <교회생활 바른용어집>은 재택예배(영상예배)의 문제를 다음과 같이 지적합니다.

 

예배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함께 모여서 하나님께 공적으로 경배하는 행위이다. 이 함께 하는 과정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그것은 겉으로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모임을 증거하는 것, 하나님의 은총이 적용되고 있는 것, 함께 하는 과정을 통해서 신자로서 하나님의 임재를 확인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는 지체들로서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고 있음을 확인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재택예배(영상예배, 비대면 예배)란 이러한 모든 것을 부정하는 결과에 이른다.

이렇게 말하면 반드시 등장하는 것이 실용론이다. 예를 들어서 환자나 특별한 사정이 있어서 예배에 동참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필요하다는 논리이다. 하지만 이러한 논리는 다분히 인간중심의 사고에서 출발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만일 재택예배라는 것을 말하거나 받아들인다면 기독교는 더 이상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는 없는, 단지 인간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는 것이 된다.

 

이렇게 대한예수교 장로회 대신 측 교회생활 바른용어집은 영상예배, 비대면 예배를 예배의 의미 자체를 부정할 뿐 아니라 실용주의로 규정하였습니다.

이 시리즈의 첫 번째 글에서 신앙 고백서가 가르치는 예배에 대해서 살펴본 적이 있습니다. 그중에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대요리 문답은 이렇게 교훈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제정하신 일이 없는, 그 어떠한 종교적인 예배를 창안하거나 아니면 고대로부터 있었던 관습에서라거나 경건에서라거나 무슨 좋은 의향에서는 등 무슨 다른 구실을 붙여서든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의 요소를 가감하여 예배를 부패하게 만드는 모든 미신적인 일은 금하시는 것이다. 이외에 하나님께서 우리더러 당신만을 예배하도록 열망하시며 모든 잘못된 예배는 영적인 매춘행위이므로 그것에 대하여 진노하신다.”

 

어떤 선한 의도가 있어도 진리에 근거하지 않는 예배는 영적 매춘행위, 우상숭배로 규정하였습니다. 이는 나답과 아비후가 다른 불로 제사 드린 것과 같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실 그동안 한국교회는 영상 예배에 대해서 신학적으로 부정적인 견해를 취하고 있었습니다. 다분히 세속주의와 실용주의의 교회 침투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코로나라는 사태를 맞아서 차분한 신학적인 검토 없이 갑자기 이웃사랑이라는 전가의 보도를 내세워 비대면 예배를 덥석 받아들이고 말았습니다. 우리가 비대면 예배를 받아들일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비대면 예배는 세속을 본 받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이웃사랑을 실천한다면 정부가 요구하는 것보다 더 강화된 수준에서의 방역수칙을 지키면서 어려운 이웃을 돌아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그것이 코로나 시대에 우리가 할 수 있는 희생입니다. 공 예배까지 희생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비대면 영상 예배는 세속을 본받은 치명적 약점을 갖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는 결코 우리가 주님께 드려야 할 영적 예배, 합리적 예배가 될 수 없습니다. 세속적인 시각에서는 합리적일 수 있을지 몰라도 성경적 시각에서는 거부해야 할 예배의 방식입니다.

이렇게 로마서 121~2절은 비대면 예배론자들의 주장처럼 결코 비대면 예배를 지지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단호히 거부해야 할 세속적 요소임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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