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명철 목사】 말씀 사역자여! 말씀 안에서 깨어지고 부서져라

  • 입력 2022.01.14 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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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사역자에게 고하는 말씀 (85)

한명철 목사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은혜와 평강교회를 담임하며 30권의 저술과 글쓰기를 통해 복음 사역에 애쓰는 목회자다.
한명철 목사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은혜와 평강교회를 담임하며 30권의 저술과 글쓰기를 통해 복음 사역에 애쓰는 목회자다.

큰 나무 그러나 열매 없는 조국교회

17개월 3주 간에 걸쳐 이어져온 말씀 관련 외침이 종지부를 찍는 마지막 원고이다. 그동안 설익은 글을 읽어주신 독자 제위께 심심한 사의를 표하며 관계 되신 모든 분들에게 감사드린다. 아울러 말씀에 직간접적으로 연관된 이들에게 말씀의 은혜가 이전보다 더욱 풍성히 임하길 진심으로 빌어본다. 말씀 통달은 말씀 사역자 모두의 로망이기에 살아있는 동안 탁월함을 이루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경주하리라 믿는다. 시간이 지날수록 말씀과의 진솔한 만남이 일상 속에서 열매 맺는 기쁨이 샘솟길 진정으로 기원하며 필자의 고하는 말씀을 미련 없이 닫으려 한다.

조국 교회는 하나님의 축복 아래 놀라운 부흥과 번영을 이루었다. 짧은 기간에 온 세계 교회가 경이적인 눈길을 보낼 만큼 놀라운 성장을 이룩했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바로 복음이 뿌려질 당시에 누룩 같은 하나님의 종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민족 수난의 암흑기 때에 무지한 군중을 일깨운 것은 누룩 역할을 감당한 교회였다. 나라를 빼앗기고 갖은 학대와 수모를 겪어야 했던 지도자들과 잡초 같은 민중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며 조국 역사의 물줄기를 바로 잡아준 것은 기독교의 복음이라는 누룩이었다. 누룩이 되어 교회를 부풀리고 이 나라의 터전을 반석 위에 세우게 했던 초기 조국 교회는 비록 수난을 당하긴 했어도 그 장엄한 영광을 잃지 않았다. 하나님은 이런 조국 교회를 마음껏 축복해 주셨다.

이제 조국 교회는 서 말이 아니라 억만 섬에 비할 만큼 그 규모가 커졌다. 교회의 숫자만큼 말씀이 왕성하다. 부끄럽게도 역사하는 힘이 말씀의 뒤를 받쳐주지 못한다. 교회의 크기가 곧 말씀의 크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조국 교회가 괄목할만한 성장을 이룩한 것은 사실이다. 그것은 분명한 축복이다. 그러나 내적인 변화와 영적인 능력에 있어서는 그만큼 자라지 못했다. 겨자씨 같은 외적 성장(external growth)은 이루었다. 하지만 누룩 같은 내적 성숙(internal maturity) 곧 변화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세상에 영향을 줄만큼 부풀어 오르지 못했다는 증거이다. 공중의 새들이 깃들일만한 큰 나무가 되었지만 철따라 맺는 과실을 맺지 못해 유명무실해졌다. 말씀의 생활화에서 거듭 실패함으로 삶에서 말씀의 능력이 거세되기 시작하자 영적 생명의 능력 또한 사라졌다.

 

조국의 위기는 회개 없는 교회의 위기

현대 교회는 부싯돌에 갈리는 칼 소리를 들어야 한다. 이미 심판의 활시위가 당겨졌음을 깨달아야 한다. 교회는 회개해야 한다. 말씀 사역자들은 회개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심판을 면할 길이 없다. 무엇을 회개해야 한단 말인가? 하나님을 욕보인 죄를 회개해야 한다. 넘치도록 주신 축복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고 남용한 죄를 회개해야 한다. 다양한 은사를 주셨건만 하나님의 영광이 아니라 자신의 명성을 위해 남용한 것을 회개해야 한다. 교회의 유익이 아니라 개인의 이득을 위해 오용한 죄를 회개해야 한다. 주님의 뜻이 아니라 자신의 이력을 빛내기 위해 악용한 죄를 회개해야 한다. 무욕을 외쳤지만 성장과 부흥의 가면을 쓰고 욕심 사납기만 했던 사역의 꼴불견을 회개해야 한다. 군중의 박수에 뿌듯해하며 오른손으로 행한 선행을 양손 흔들어 광포하며 은인에게 배은하고 귀인에게 망덕(亡德)했던 비루한 삶을 회개해야 한다. 무엇보다 말씀을 말씀답게 전하지 못했음을 가슴 치며 자복해야 한다. 말씀의 대변자로서 살지 못한 삶을 회개해야 한다.

조국과 민족의 위기는 교회의 위기이다. 정치와 경제의 위기 저변에는 영적인 위기가 도사리고 있다. 지나간 세상 역사가 이를 증명한다. 교회의 위기는 교회 지도자들의 위기이다. 재를 덮어쓰고 머리를 풀어헤치는 대신 마음을 쥐어뜯으며 회개해야 한다. 민족의 죄를 양 어깨에 짊어지고 역사의 무거운 짐을 가슴에 끌어안고 통곡해야 한다. 말씀의 사역자답게 살지 못한 부끄러움을 통회 자복해야 한다. 회개의 울부짖음이 보좌에까지 이르러야 한다. 양들을 돌보는 목자보다는 양털의 부드러움과 양고기 맛에 눈이 뒤집힌 삯군들이 교회마다 건재하다. 삯군보다 더한 도적떼들이 득시글거려도 성업 중인 교회들이 많은 것은 대심판에 앞선 재앙이다. 예수의 이름을 팔고 사탄의 하수인이 되어 신성한 강단을 무대 삼아 질펀 놀아대지만 분별력도, 통찰력도 잃어버린 회중들은 심지마저 굳지 못해 쉬 선동되고 뒤늦게 후회하며 오래 고생하다 파멸에 이른다.

당신은 기도하지 않았다. 기도의 필요성을 누누이 듣고 스스로 인정하면서도 실제로 시간 내어 무릎 꿇지 못했다. 환도뼈는커녕 무릎에 작은 굳은살마저 박이지 못했다. 기도하자고 그토록 목소리를 드높였는데 정작 꿇은 것은 볼 품 없는 두 무릎이었지 마땅히 꿇어야 할 당신의 거짓과 욕심이 아니었다. 오히려 당신의 꼿꼿한 자아가 버팅임으로 거룩하신 주님을 꿇게 만들었다. 머리와 가슴의 말씀을 손과 발의 삶으로 바꾸지 못했다. 실천에 옮기지 못한 말씀들의 무게에 눌려 질식당하고 있는 것이 당신의 모습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빙자하여 세상을 정죄하고 당신 자신을 겹 싸기에 바빴다. 겉모습은 말씀으로 가득한데 속에는 말씀이 텅 비었다. 자녀로서의 외관은 있는데 능력을 잃어버렸다.

 

변화시키는 누룩인가? 변질된 누룩인가?

열린 말씀에 닫힌 영혼으로 인해 당신은 진정한 변화를 경험하지 못했다. 당신 자신의 변화가 없기에 다른 사람을 변화시키지 못했다. 누룩이 가루를 변화시키지 못하면 가루가 누룩을 변질시킨다. 변질된 누룩은 세상에 나쁜 영향을 끼친다. 실행이 없는 입술만의 가르침은 나쁜 누룩이다. 장로들의 유전을 지키기 위해 하나님의 능력을 거부하는 세속의 누룩이다. 변질된 누룩은 당신의 영혼에 곰팡이가 피게 한다. 당신 자신이 변화되지 않은 채 변질된 영혼의 소유자로서 살아간다면 썩은 전통과 교훈의 나쁜 영향력만이 다른 사람들에게 번져간다. 엘리야의 손바닥만한 작은 구름 한 조각이 36개월 동안 메말랐던 이스라엘 땅을 적시게 했다. 큰 비를 부른 것은 다름 아닌 엘리야의 작은 구름 한 조각이었다. 그렇다! 전능하신 하나님께 대한 불같은 신앙이 능히 큰비를 쏟아지게 만든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4:13)는 철저한 확신만이 마지막 때의 기갈을 면케 할 큰 비를 부를 수 있다.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진정한 능력은 하나님을 한없이 신뢰하고 그 말씀을 끝없이 추구하는 응집된 영혼의 힘에 있다. 당신은 골리앗을 쓰러뜨린 다윗처럼 이 시대의 골리앗을 쓰러뜨리는 작은 거인이 되어야 한다. 세속에 물들지 않는 참 경건으로 영혼을 단장하고 예수 사랑에 미쳐버리다시피 한 참 예수쟁이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밖에 믿을 것 없고 성령밖에 받을 것 없고 예수밖에 사랑할 것 없고 십자가밖에 자랑할 것 없고 복음밖에 전할 것 없고 사랑밖에 행할 것 없고 은혜밖에 받을 것 없고 죄밖에 거절할 것 없고 마귀밖에 미워할 것 없는 감추어진 누룩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끝없는 순종과 철저한 믿음만이 말씀 사역자를 누룩이 되게 한다. 채울 것으로 채워졌을 때 싸움에 능한 주님의 용사가 되어 이 세상을 말씀의 능력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 이 땅에 하늘나라가 임하게 할 수 있다.

경계해야 할 것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악하고 괴이한 누룩이지만 우리 자신이 되어야 할 것은 거룩하고 선한 누룩이다. 천년의 깊은 잠에서 인류를 깨운 것은 마틴 루터라는 한 줌의 누룩이었다. 18세기 썩어버린 영국 사회를 변화시킨 것도 그 시대의 누룩으로 나타난 요한 웨슬리였다. 말씀의 실천을 통해 교회 개혁을 추구했던 경건주의자 슈페너의 교회 안의 작은 교회”(ecclesiola in ecclesia)는 그 시대를 위한 누룩 지향 운동이었다. 이 운동은 모라비안 형제단을 통해 구현되었고 웨슬리에 의해 영국의 현실에 적용되었다. 오늘 우리에게 절실히 요구되는 것이 바로 작은 공동체로서의 생명력 있는 교회이다. 하나님은 언제나 말씀의 누룩이 된 개개인을 통해 자신의 크나큰 뜻을 이루셨다. 초대교회의 신자들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경계하고 하나님의 누룩이 됨으로 이방 민족들까지 감화시켰다. 세상을 변화시킨 것은 그들의 말이 아니라 그들의 구체적인 삶이었다. 대제국 로마를 무너뜨린 것도 바울을 비롯한 그 시대의 누룩이었던 12사도들이었다.

하나님은 이 마지막 시대에 말씀의 누룩이 되어 세상을 변화시키고자 하는 말씀 사역자를 찾으신다. 죄의 유혹을 거절하고 세속에 물들지 않는 참 경건의 사람을 찾으신다. 아집을 버리고 겸손을 구하며 욕심에서 벗어나 섬김의 옷 입기를 즐겨하는 소자를 찾으신다. 박해를 두려워하지 않고 조롱을 오히려 비웃으며 시시때때로 사선을 넘나드는 담력의 증거자를 찾으신다. 자신의 능력을 포기하고 주님의 능력을 힘입어 살고자 하는 무기력한 능력자를 찾으신다. 한 알의 밀이 되어 죽음으로 많은 열매를 맺게 할 순교자를 찾으신다. 자신의 전 존재를 진리의 빛으로 밝히고 자신의 전 생애를 영혼 사랑의 뜨거움으로 불태울 목자요 전도자인 사람을 찾으신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바로 그 한 사람을 찾으신다. 그를 통해 이루고자 하는 일들을 맡기실 바로 그 한 사람을 찾으신다.

말씀 사역자여! 말씀 안에서 깨어지고 부서져라

말씀 사역자는 자신의 천직인 영혼 구원하는 일을 위해 기도와 말씀에 전무해야 한다. 기도와 말씀 이상으로 해야 할 긴급한 일은 전혀 없다. 성직자, 평신도 할 것 없이 모두가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진정한 변화를 경험해야 한다. 말씀 안에서 깨어지고 부서져야 한다. 쉽게 내뱉는 말 같아도 결단코 쉽지 않은 영적 환골탈태의 길은 신실한 구도자들로선 피할 수 없는 숙명 같은 삶이다. 십자가에 터를 내리고 사는 이들은 누구나 예외 없이 두터운 자아가 깨어지는 아픔을 반드시 맛보아야 한다. 십자가의 죽음 없이는 부활의 생명은 주어지지 않는다.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에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는 자기 죽음을 경험해야 한다. 우리는 주님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이미 죽은 자이다. ‘주님,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옵소서!’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5:24)

 

오늘의 글로 길었던 말씀 관련 단상을 끝맺는다. 나팔 소리를 끝내도 여운은 남고 스쳤던 숱한 말들 중에서 한두 마디, 혹은 한두 문장이 어느 날 기억의 숲을 헤집고 나와 가만히 고개 내밀 때 그것이 당신의 말씀 묵상에 하나의 번득이는 의미로 되새겨지길 바란다. 세상이 존재하고 이 땅에 거하는 이들이 사라지지 않는 한 메신저들의 메시지는 지속될 것이다. 형식과 전달 방법은 다양해져도 메시지의 주제와 핵심은 본 모습을 잃지 않고 제 역할을 다할 것이다. 결코 끝날 수 없는 메시지의 주제는 인간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요 핵심은 생명과 진리이다. 여든 다섯 번째 글에서 정지함은 무엇을 이루어서가 아니라 글을 접했던 이들이 자신의 삶에서 말씀을 통해 이루어가야 할 삶과 사역의 과업을 위해서이다. 이제는 피 터지는 삶의 현장에서 말씀을 읽고 연구하며 묵상하고 실천하기 위해 몸을 일으켜야 한다. 그런 각오와 기대에 마음 다잡는 모든 이들에게 건투를 빌며 정성 깃든 맘으로 축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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